셰리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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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는 1873년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인 욘의 생-소베르-앙-퓌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쥘-조셉 콜레트로 전쟁 영웅으로,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이후 그는 자녀들이 태어난 생-소베르-앙-위세에서 세무 징수원의 직책을 맡게 됩니다. 콜레트는 어려서 공립학교에서 수학하고, 1893년에 '윌리'라는 필명을 사용한 작가인 헨리 고티에-빌라르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때 그녀의 첫 네 편의 소설은 그의 이름으로 출간됩니다. 그러다 이 콜레트와 윌리 부부는 1906년에 부부 관계를 청산했지만 그들의 이혼은 1910년까지 확정되지 않습니다. 1912년에 콜레트는 르 마탱의 편집자 헨리 드 주브넬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 콜레트와 주브넬의 결혼 생활 역시, 1924년 이혼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요. 이때의 이혼 책임은 부분적으로 콜레트에게 있었는데요. 당시 그녀는 의붓 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1925년에는 유대인이었던 모리스 구드케와 재혼하고 그는 그녀의 마지막 남편이 되었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 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다행이게도 독일 대사의 프랑스인 아내가 중간에서 관여해, 콜레트의 남편인 구드케는 바로 석방되지만, 독일군 점령 내내 이 부부는 다시 체포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전쟁 기간을 살게 됩니다. 1944년에는 콜레트에게 큰 명성을 안겨다 준 작품인 지지 Giji가 줄판되었고, 1948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지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열 한번째 장편소설인 셰리는 원제,"Cheri"로 지난 1920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12월에 번역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2쇄본으로 2025년 1월 판본입니다.

일부 해외 서평 블로거들에게 있어 이 작품의 주인공인 누누(레아 드 롱발 부인)가 '사교계 고급 창녀'로 이해되고 있지만 당시 프랑스 사회가 당시 귀족 계급의 마지막 잔재를 고려해 봤을 때, 창녀라는 표현은 조금 많이 나간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작품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수식어로 등장하는 '적대적 여자들끼리의 우정'이라는 표현은 샤를로트 플루 부인과 레아의 관계 를 언급하는 것 뿐만 아니라, ('가벼운 여자들의 적대적 친교'도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두 사람을 둘러싼 사교계의 미망인들과 과부들의 서로를 향한 형식적인 모습은 꽤나 사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앞선 샤를로트 플루 부인의 아들인 '프레드 플루 주니어'가 바로 레아가 그를 향한 지칭이자,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셰리"인데요, 이는 사교계 여성이 그 시대의 젊은 남자 애인을 에둘러 말하는 표현들 중 하나입니다.

레아는 극중의 시점에서 49세의 미망인 혹은 이혼녀로 보이는 여성으로 그 또래의 여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와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녀 자신이 속한 사교계에선 특별히 가십거리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작가인 콜레트는 자신의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늙은 여자'라는 세간의 단어와 그 의미를 빗대어 서술하는 문장들을 여럿 볼 수 있었는데요. 흔히 영화나 소설에서 보면 20대 가량의 젊은 여자들이 간혹 30대나 40대 여성에게 '늙은 여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의미를 넘어 여자들 세계에선 상당히 모욕적이고 심지어 멸칭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소리를 들은 여자들이 작게는 말다툼이나 크게는 몸이 엉켜 큰싸움으로까지 벌어지는 장면을 숱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콜레트가 논하는 '늙은 여자'에 대한 의미는 어떻게 보면 본래적이면서도 여주인공 레아를 향한 좀 더 변형된 의미로도 읽힙니다. 육체적 젊음이 시들어 자신이 더이상 남성들에게 매력이 되지 못한다는 얼마간의 서사와, 그것에 대한 예민한 태도를 보이는 레아의 모습은, 어느 사회나 이 '늙은 여자'에 대한 투영된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중 레아에게는 그런 '유지되는 젊음'외에도 그녀 스스로 적지않은 부를 소유하고 있어, 그 시대에서도 상당히 보기 드문 배경의 여성임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제 갓 20대를 바라보는 셰리는 어머니의 지나친 양육으로 인해, 혹은 자라면서 아버지의 감화와 영향을 받지 못한 것인지, 상당히 제멋대로 또한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그에게는 우연히 6년 전에 인연을 맺은, 누누라는 이름과 그 기대가 딱 들어맞는 여주인공인 레아가 곁에 있습니다. 물론 모두에게는 쉬쉬하며 만나고는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 둘을 둘러싼 사교계의 인사들은 거의 알고 있는 눈치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과 이들이 서로 나누는 어색하면서도 때론 친밀한 감정적 분위기 속에, 남자로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셰리가 특히, 레아의 품안에서 가장 편안히 잠을 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20대 남자의 때도 없이 불타오르는 정욕에서 세간의 편견처럼, '다루기 쉬운 늙은 여자'를 손쉽게 손에 넣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레아가 그에게 제공하는 편안함, 사려 깊은 태도, 신중한 언행과 같은, 자신의 모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완벽히 다른 유형의 여성이었기에, 작품 대미에서도 "내가 아는 레아는 그럴 수 없다"는 표현으로 독자들의 예견을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유독 자신만의 레아라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극중에 '젊은 부부의 사랑, 젊은 아이들'이라는 표현으로 외형적으로 보이는 자신과 셰리의 관계는 어찌됐든 정리되어야만 했다고 믿은 레아는 결혼 전에 자신에게 부득불 찾아 온 셰리를 단호한 거절과 함께 신부에게 보냅니다. 그럼에도 셰리에게는 자신의 아내인 에드메가 주는 '젊음의 육체'는 더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었고, 사랑하지 않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냉정함이 은연 중 드러납니다. 에드메에 대한 자신의 감정, 그리고 결혼 생활이 녹록치 않을 것이라는 느낌과 이러한 불편한 분위기에 셰리는 겉으로 어쩔줄을 몰라하는데요. 바로 그것의 배경에는 '돌이켜보니 자신이 레아를 상실했다'는 자기 혐오와 연민이 뒤섞이는 본질적인 감정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모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식객이자 '가까이 두지 않았던' 지인인 데스몬드와 호텔을 전전하며, 자신의 섣부른 방황을 합리화 하기도 하는데요. 결국 이렇게 극이 진행되는 지점에서, 콜레트는 어쩌면 독자들이 몹시 기대하는 이 둘의 '재회'를 자신만의 서사로 준비하게 됩니다,

단순히 사랑이 없는 결혼이라는 표면적인 의미에서 보다는, 이미 깊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기란 아마도 어려운 법일 겁니다. 그렇지만 복선과 여러 감정선을 통해, 셰리에게 자신의 아내인 에드메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사랑이란 감정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 현실적 처지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애달픔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죠. 간혹 다른 문학 작품을 보면, 결혼을 앞둔 여자가 오래 교제한 전 애인을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아마 현실에서도 그런 이야기들이 제법 있을 겁니다. 너무나 내밀한 내용이어서 쉽게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뿐이겠죠. 작가인 콜레트가 이 두 사람의 재회를 저런식으로 준비한 것은 아니겠지만 '레아'가 6개월 간의 여행에서 돌아왔고 스스로 홀가분하다고 여기는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역시나 의도가 짙은 만남이었습니다. 이는 레아와 셰리에게 각자의 다른 의도와 희망으로 연결된 재회였기 때문입니다. 레어가 과거에 경험했던 '성숙한 남자'의 이야기들을 문득 잊은 것처럼, 셰리 역시 그 순간은 결혼한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지난 날 끊임없이 함께한 시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6개월 간의 멀어짐은 두 사람을 그만큼 엇갈린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레아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고, 작가가 레아의 눈을 통해 본 셰리의 모습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작가는 셰리라는 인물 조성에 여느 다른 소설의 등장 인물들보다 특별한 개성을 만든 것은 여러모로 놀라운 점이었습니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의 사랑은 다른 식으로 증명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이 되었는데요. 작가가 마련한 대미가 그 끝이 아니라면, 두 사람은 또 그렇게 다른 재회가 예비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과거의 다른 관계에서 너무나 많이 쓸데 없는 돈을 소비해서 후회된다는 레아는 막상 셰리에게는 자신이 해준 것이 없음을 알고 몹시 놀라는데요. 극에 등장하는 애첩이라는 단어보다는 레아는 셰리에게 정부가 맞을 겁니다. 이 서사에서 정부(또는 애첩)는 자신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으려고 한다고 했는데 이런 것이 애초에 배제된 관계라면 그것은 아마도 사랑에 가까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는 집사의 자제하는 시선 속에서 ‘사모님은 정말 아름다워‘를 읽어낼 여유를 가졌고 그것이 불쾌하지 않았다.

서로를 침묵 속에 내버려두는 그 오랜 습관이 세리에게는 무기력을 레아에게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니까 뭘? 혹시 내가 네 입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딱한 놈, 난 너보다 더 고약한 놈들과도 키스해 봤어. 그게 뭐? 내가 네 발밑에 엎어져서 날 가져!라고 외치기라도 할 것 같아? 기껏해야 젊은 여자들밖에 모르는 놈이. 내가 겨우 키스 하나로 정신줄을 놓은 것 같냐고!"

그녀는 그 속에서 자신의 이름과 "자기야..."와 "이리 와..."와 "당신을 절대 안 떠나..."를 식별해 냈다.

얼마나 많은 순간에 그녀는 정복당했고, 그때마다 정복욕과 고백하고 싶은 쾌락에 휩싸여 그의 이마를 자신의 이마로 누르며 속삭였던가.

그는 아내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필요하면 짧은 명령으로 자신의 망설임을 위장했다.

‘애첩‘이란 대체로 자신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받기 위해 술수를 쓰는 여인을 일컫죠, 알아들어요?

레아는 성숙한 남자는 이별을 하면 했지 명명백백히 자신을 육체적으로 평가하며 다른 남자, 미지의 남자, 보이지 않는 남자와 비교하는 눈길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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