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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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1948년 6월, 영국 햄프셔 주 올더숏에서 데이비드 매큐언과 릴리언 바이올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노동계급 출신의 군인으로 소령 계급을 달고 전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매큐언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영국이 아닌 해외에서 보내게 되는데요. 그의 가족은 그가 12살이 되던 해애, 비로소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매큐언은 영국으로 돌아오자 서퍽의 소년들을 위한 기숙학교인 울버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요. 1970년에 매큐언은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노리치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는 등단한 이후로, 6번이나 부커상 후보에 오르게 됩니다. 1998년에는 장편, '암스테르담'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는데요. 이외에도 1981년에 '낯선 사람들의 위안'이, 검은개가 1992년에, 어톤먼트는 2001년에, 토요일이 2005년에, 체실 비치에서가 2007년에 각각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매큐언은 2008년 더 타임즈가 선정한,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목록에 올렸고,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는 그를, "영국 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100인들" 가운데 19위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Black Dogs"로 지난 199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입한 판본은 같은 해, 6월에 출판된 2쇄본 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과 관련해, "검은 개"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설명이 대미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다 그곳으로 돌아와 우리 곁에 유렁처럼 출몰해 떠돌 것이다. 유럽 어딘가에서, 언제가는"으로 매큐언은 우리에게 이 의미 심장한 메시지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작품을 다 읽으신 분들은 이 검은 개가 의미하는 바가 어느 정도 명확하다고 여기실 텐데요. 저는 이를 "과거의 파시즘, 오늘날의 극단주의"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누구보다 정치적 감수성이 예민한 "준"이라는 한 인물이 참혹한 대전으로 폐허가 된 인적이 드문 프랑스의 어느 오지에서, 검은 개 두 마리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런 그녀에게 개 두 마리로 인한 닥친 죽음의 기억이, 스스로의 삶에 커다란 명시적 전환점이 됩니다. 여기에 그녀의 사위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극중 제러미의 후일담은 단순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 역사의 일그러진 단편과 맞물려, 그 실체로 이어지며 남게 되는데요. 그의 장모가 맞닥뜨린 그 땅에, 과거 게슈타포와 히틀러에 부역한 프랑스 비시 정부의 비밀 경찰로 이어지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굴절'이 바로 프랑스에 남긴 전쟁의 상흔이었습니다.

도저히 헤어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시 결합할 수 없는 묘한 부부인, 준과 버나드는 주인공 아내인 제니의 부모입니다. 이 두 사람은 유럽의 대전 이후의 세대를 표징하는 인물들이기도 한데요. 이들은 1936년과 1946년, 그리고 1953년을 거치며, 한 눈에 서로에게 사랑을 확인했고, 그 와중에 이 젊은 두 부부가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각기 다른 외형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이들의 '분리된 삶'을, 현직 기자인 사위 제러미의 눈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시대의 상처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토록 더할 나위 없는 자유주의의 번영속에, 오늘날의 유럽이 서구 자유 진영의 대표격으로 인식되는 현 시점에서,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그 땅에 수많은 시신을 묻을 수밖에 없었던 1946년의 프랑스는, 이 부부에게 세상을 온전히 눈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한국 전쟁을 몸소 겪은 세대에게, 전쟁이라는 실체는 아마도 동일하게 몸과 마음에 각인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극중 3부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폴란드의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제러미와 제니가 겪게 되는 그 마음 깊숙이 박히는 절망은, "방문객은 이곳에 와서 절망하거나, 아니면 손을 주머니에 더 깊숙이 찔러넣고 따뜻해진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악몽을 꾸는 이들에게 한 발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라고 더해집니다. 수십만 명의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이 그 수용소여서 죽었다고 나와있는 그 몇 글자 마저도 우리에게는 먼 옛날의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 작금의 인상일겁니다.

저 역시, 매큐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유럽이 겪은 질곡의 역사를 특정한 개인의 지나온 삶과 연계시켜, 그것을 관통한 사람과 그저 역사로만 접한 후세대 간의 극명한 인식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의 주인공인 제러미가 지난 날 장모의 좌절된 삶과 왜 프랑스 오지 마을에 은거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집요한 그의 집착은 이러한 겉모습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제러미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양친을 잃고, 방황하던 십대 시절에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던 그만의 사정, 다시 말해 그런 장치가 있었지만 말입니다. 즉, 자신이 보기에도 생각이 깊고 누구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장모는 아내인 제니를 통해 맺게된 인연에서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그가 모친처럼 대하는 본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딸보다 더 오랫동안 별거한 장모와 장인어른 사이를 중간에서 이들을 잇는 역할을 자임한 것은, 제러미라는 인물의 본성을 엿보게 합니다

분명한 정치적 지향을 보였던 준은 1950년에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함으로써, 일말의 혁명적 아이디어를 삶의 지향점으로 계속 이어나가기 어렵게 됩니다. 버나드 역시, 그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본질적인 역겨움을 마찬가지로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대안으로 노동당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정치적 변절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당시 자유 노조의 시기라는 것은 그런 함축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겠죠. 때문에 버나드는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삶을 위해, 그런 정치에 몸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점에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준에 대한 원망과 두 사람 사이의 현격한 행동의 괴리가 나타나게 된 것이죠. 반대로 준이 말년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회의와 그것을 본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쏟은 것은 어쩌면 시대와의 타협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작품 속에서, "망각은 비인간적이고 위험하며 기억은 끝없은 고문이 될 터인데"라는 저의 눈을 절로 끈 문장은, 이처럼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2부 '베를린'에서 겪은, 말살된 나치즘의 망령인 초기 네오 나치의 잔재, 그리고 그 당시에도 현실에 남아 있던 파시즘의 유령을 버나드와 제러미 둘다, 몸소 체험하게 되는 그 두려움의 실체는 1989년 그 시기에도 많은 유럽인들이 이미 역사를 망각하기 시작했다는 근거로도 읽힙니다. 우리가 애써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끊없이 부정하고 망각했던 그 참혹한 역사의 잔재를 말입니다.


끝으로, 매큐언의 이 작품은 단순히 시대에 따른 이데올로기 투쟁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가 왜곡된 정치 해석과 이행으로 유럽 사회에 남긴 상흔과 그러한 배경속에 과거를 살아갔던 한때, 청안의 젊은 부부의 인생 행로를 짚어나가는 나름대로 우리에게는 의미있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매큐언은 작품의 말미에서 콜린 크라우치처럼, 이 파시즘의 망령이 다시금 전유럽에 나타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었는데요. 검은 개를 맞닥뜨린 생전의 준이 라벤더 풀밭에서 미지의 존재에게, 생명을 위협당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집에 라벤더 비누를 풀어 놓은 것처럼,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망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역사의 증거를 유럽의 시민 모두가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현 시점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나 체제 그 자체는 참으로 역겨운 것이기도 한데요. 모두가 언급하는 시민의 정치적 선명성이란 바로 이런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금 곱씹게 됩니다. 매큐언의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오랫동안 제게 각인될 것 같습니다.     


- 요즘들어 '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해 고심하게 됩니다. 권력의 정당성을 어느 한쪽에게만 몰아주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주의, 물론 카를 슈미트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진정한 자유주의적 관용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준의 신앙 표현이 숨막혔고, 자신들은 신앙이 있기에 선하고 신앙은 미덕이며 그러므로 불신은 무가치하거나 좋게 봐줘야 불쌍하다고 믿는 모든 신앙인의 무언의 가정이 불편했다.

준의 자식들은 자기 부모간의 차이라는 지겹도록 친숙한 주제가 얼마나 흥미로울 수 있는지 상상조차 못했다.

버나드는 벌써 수년 전 공산당을 떠나 노동당 의원을 지냈고, 기득권층이었고, 그중에서도 방송, 환경,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정부 위원회를 담당하는 자유주의적인 분파에 몸 담았다.

빛의 목격, 진실의 순간, 전환점, 그런 것들은 필시 포화상태인 옛 추억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헐리우드 영화나 성경에서 빌려오는게 아니던가?

"그럼 왜 세상이 개혁되지 않았지? 무상의료며 임금인상, 가구마다 자동차며 텔레비전, 진동칫솔 따위가 다 갖춰졌는데, 어째서 사람들은더 행복하지 않은 걸까? 이런 개혁에 뭔가 빠진 게 아닐까?

30년대의 공개재판과 숙청, 집산화, 대규모 수송, 강제노동수용소, 검열, 거짓말, 박해, 대량학살...... 결국은 모순은 너무 커지고, 신념은 깨지지.

이런 수용소를 기획하고 짓고 그토록 공들여 집기를 들이고 운영하고 유지하고 마을과 촌락에서 인간 연료를 거둬온다는 것이. 그 정력이라니. 헌신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을 실수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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