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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하는 삶, 소비되는 삶 ㅣ NOUVELLE VAGUE 13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궁선영 옮김 / 새물결 / 2024년 6월
평점 :
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유대교의 기본 원리를 추종하지 않는 폴란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그의 가족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보다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바우만은 폴란드 제1군에 입대하여 콜베르트 전투와 베를린 전투에 참여했는데요. 1945년 5월에는 그런 공로로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그는 2차 대전 시기까지는 자신이 헌신적인 공산주의자였음을 인정하기도 했는데요. 1953년에 이미 소령 계급이었던 바우만은 자신의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하려는 목적으로 바르샤바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근한 그 시점에 불명확한 이유로 불명예 제대를 당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바우만은 반시오니즘적 경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1954년부터 상당히 짦은 기간에 바르샤바 대학의 강사를 역임하고, 그즈음 폴란드 공산주의 정부에 비판적인 인식을 키운 바우만은 외부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를 거쳐, 1970년에 영국의 리즈 대학의 사회학 교수직을 수락하게 되는데요. 그의 본격적인 경력은 바로 이 시점부터 시작되고, 왕성한 학문적 활동, 일관된 사회학적 비판 의식, 신자유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개선 요구, 유동하는 근대, 시민의 쓰레기가 되는 삶 등에 대한 특별하고 고유한 성찰을 스스로 전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그의 이런 평생의 노고로 비롯된 논저는총 57권이 되는데요. 이는 세계화, 근대성과 탈근대성, 소비주의와 도덕성에 관한 주제로 후학 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들에게 학문적 귀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Consuming Life"로 지난 20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바우만의 이 책은 나날이 강화된 현대 자본주의가 어떤 사회적 이면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유동하는 근대를 내면화한 사회가 사실상 자본주의의 인질이 되어, 그것을 구성하는 시민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소비와 소비주의라는 주제로 이를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바우만이 말하고자 하는 이 소비와 소비주의는 그저 단순한 '쇼핑과 구매'라는 담론 그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노골적이고 맹목적인 이데올로기가 모두의 삶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밝히는 작업이기도 한데요. 그 역시도 4장에서 에밀 뒤르켐의 가히 위대한 작업이었던, '사회적 사실'의 근본적인 전환에 대해서도, 이 노골적인 소비주의 시대가 앞선 시대적 요청과 더불어 정체성의 문제를 비롯한 인간 사회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과연 이 소비와 소비주의에 기반한 우리의 삶이 모두의 이익과 삶 자체의 고유성에 이바지 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바우만 특유의 사회학적 비판 입장을 부족함 없이 접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우만의 설명이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그가 이전의 '생산자 시대'라는 언급은 아마도 뉴딜 시대의 광범위한 사회적 협력이 가능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식의 정치를 뜻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게리 거스틀 역시,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의 '자유주의'에 대해 깊은 공감에 따른 특별한 인식을 내비친 바가 있는데요. 거스틀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개념적 분석을 봐도 그러합니다. 다시 바우만의 글로 돌아와, 그는 서두에서, "분명 소비는 평범하고, 정말이지 하찮은 일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프리드먼과 하이에크 류의 '개인의 자아 실현'과 '개인의 이기적 목적'에 대한 그야말로 찬사에 가까운 동조에 이르러, 자본주의 체제 하에 수많은 개인들은 '돈'을 통한 어떤 개인의 이상실현에 가까워 질 수 있다고 강조해 왔는데요. 그런 수단적 측면에서 이 '소비'는 상당히 특이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바우만이 인용한 메리 더글라스는 명백하게, "사람이 왜 생존의 요구를 초과한 사치품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점은 바우만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결국 우리 사회는 이러한 맥락의 소비주의 시대로 이행해 왔고, 이런 소비를 주요 경제적 행위로 급부상 시키고, 모든 시민들의 마음에 내면화 하게 된 과정에는, 어떻게 보면 이 소비주의가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장에서 바우만은 우리 인간이 새로운 요구, 욕구, 충동에 대한 중독 등을 본성으로 갖고 있고 이를 위해 소비주의 경제는 과잉과 낭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인식을 다소 과장했다고 볼 수 없는 현실적 사례와 그런 다양한 인식을 이번 장에서, 여실히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는 소비 자체에 대한 과도한 정보 제공과 많은 소비자들이 폭식을 일삼는 환자들처럼, 소비에 집중하는 현상이 만연해 있다는 점을 바우만은 꼬집어 강조합니다. 즉, 이런 소비를 통해, 개인의 충동적인 행복을 충족하고, 이 소비 행위에 기반한,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소위, 소비적 개성을 표면화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요. 이러한 소비에 대한 욕망이 언제부터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메커니즘은 지금의 자본주의가 적극적으로 조장한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메커니즘의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소비 열풍'에 동참하지 못하는 수많은 소외자들을 양산하고, 이 소비주의적 맹신은 끝내 모든 사회가 경제적 불평등에 눈을 감게 되는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음 2장에서 바우만은, 이런 "유동적 현대라는 기획의 광범위한 실천'이 작용한 소비주의 사회의 일상적 삶이 모두의 인식에 자리 잡았고, 이는 더 나아가 '국가 정책의 원리'로 더 강화 되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종래의 자유 민주주의가 개인의 이기심 확대와 사사화에 따른 광범위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근본 원인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기본적인 소비 개념 자체는 즉각적이고, 소비하는 소비자의 행복과 만족에 연결되어, 일종의 정신적 충족감까지 개념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래의 '사회적 국가'라는 인식 자체가 후퇴하고, 국가는 이런 소비자들이 더 퍼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파운더리'가 되기에 이르는데요. 이것이 바우만이 진단하는 유동하는 현대의 삶을 사는 소비주의적 집단의 감출 수 없는 진면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규제 철폐와 사사화를 통한 생활정치의 상품화"가 소비자 사회를 규정하는 새로운 목록임을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 생활정치라는 것은 '거짓말 정치화'와 '정치 불산'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어 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우만은 2장의 논증을 통해, 통제받지 않는 소비주의와 그런 맥락의 사회화가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자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았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존 듀이와 같은 종래의 사회학자들에 의해 강조되는 '자신에 대한 책임','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이런 소비주의 시대에서는 불필요한 것이며, 오로지 바늘 귀처럼 스스로에 대한 삶에만 책임지는 것이 현재의 이상이라는 것을 역시나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3장에서, 바우만은 '소비와 개인의 선택의 자유' 그리고 그 문제를 함께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도 우리는 이미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구성원이 아니라, 고유한 개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에 강하게 전도되어 있는데요. 이는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무력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더 나아가 자유의 기본적 원리를 왜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밀턴 프리드먼식의 이런 '선택의 자유'가 우리 시대에서는 '자유의 여왕'이자, '자유의 더할 나위 없는 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통장의 잔고가 없어도 신용 카드를 통해, '소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그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들리기도 하는데요. 물론 이 부분은 제가 대략 희화화 하긴 했습니다만 저자인 바우만도 2장 후반부에서 이러한 인식을 내비치고 있었는데요. "20세가 되면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일련의 신용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이 시스템적 선택의 자유는 미국의 내수 경제를 어떤 식으로 몰아갔는지, 2008년 이후, 그 붕괴의 흐름을 통해 여실히 깨달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규제 철폐 자체가 많은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사항이라고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호도해 왔습니다. "복지가 시민들을 위한 최소한의 자본주의적 규제"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무분별한 사사화가 과연 모든 시민에게 이익이 되었는지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우만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비판을 받을 수 없는 사상이라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은 '모두에게 평등한 자유'라는 함의에 있어서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주 명백한 부분입니다. 결국 2장에서 바우만이 언급하는 대로, '소비하는 것'이 이 소비자 사회의 구성원들의 자격 요건이 되었고, 홉스 식의 사회적 보장을 위해 마땅히 '인간의 충동'과 같은 요인에 대해. 때에 따라 최소한의 제한이 포함된 어떤 (도덕적이고 제도적인) 규제가 필요했지만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결국 이 거대한 소비주의 사회가 개인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과대 포장하고 본질적인 이 '소비자들의 삶에 대한 행복'을 등한시 하게 된 연유이기도 한데요. 이는 거짓된 정치와 경제, 그리고 이를 조정하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이익을 누리는 자본주의적 구조가 나날이 변질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뮈르달이 제안한 '언더클래스'에 대한 논의로 바우만의 글은 마무리 되고 있는데요. 그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맥락으로, '범죄의 급증'과 '복지의 급증'이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결국 이런 분열된 비교의 맥락은 소위 언더클래스의 급증을 낳은, 신용카드 사회의 확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아주 외형적인 관점에서의 비평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용 카드'조차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배제된 언더클래스의 탄생과 급증은 소비주의 시대 자체가 얼마나 배타적인 면모를 갖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앞선 선택의 자유와 맞물려, 모든 문제는 오로지 개인들의 책임이라는 것이기도 한데요. 특히 바우만은 이 대목에서, 오늘날의 가난한 사람들이 (나머지에게 골칫거리인) '비고용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소비자'라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사회적으로 강요받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체제와 그 구성원 모두에게 말이죠. 그럼에도 많은 이상주의자들은 '인간적인 얼굴을 한 자본주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지만,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에서 인정했던 바대로 우리는 상당히 멀리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버리지의 복지국가 내지는 이 복지가 자유 민주주의의 안전망이 되고, 일부가 소외당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보루로서, 이것은 규제라는 명목으로 해체되어선 안 된다는 일련의 믿음들은 이미 과거가 되었습니다. 결국 저 역시도 더 많은 소비, 더 방대한 소비주의가 우리의 사회를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 그 점에 대해 비관적이며,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이 해체되는 주요 원인에 바로 이 '소비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우만은 글 3장에서, 일련의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삶'을 논하며, 성형수술이 어떤 식으로 그러한 삶에 이바지 했는지 이를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형수술을 받으려고 하거나 이미 받은 사람들이 소위 '과거의 총체적 부정'과 자신의 몸을 사실상 상품화의 단계로 위치시키고, 이러한 성형 수술 기법의 더할 나위 없는 발전은 바로 소비주의의 시대의 소비자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변화된 태도를 드러내는 일례라는 상당히 복합적인 분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소비주의 시대의 소위 '성형 수술 트렌드'는 이러한 사회적 맥락 위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80년 후 그리어는 이미 "심지어 중국 북서부의 가장 먼 변방에서조차 여성들이 헐렁한 솟옷을 벗어버리고 패드 브라자와 관능적인 치마를 입고 있으며, 생머리를 염색하고 화장품을 사려고 돈을 모으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자유화라고 불렸다."
이상적 피고용자는 이전의 유대, 책무 또는 정서적 애착이 아무것도 없어여 하며, 새로운 유대, 책무, 정서적 애착을 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노동의 시장가격은 개인적 삶의 추구 대상 중 꼼꼼히 살피고, 주시하고 , 계산되어야 할 많은 시장가격 중 하나일 뿐이다.
소비자 사회에서는 먼저 상품으로 전환되지 않고는 누구도 주체가 될 수 없으며, 판매 가능한 상품에게 기대되고 요구되는 능력을 끊임없이 소생시키고, 부활시키고, 보충하지 않고는 누구도 주체성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다.
소비자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소비자를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노동력‘은 소지자와 분리해 구매되거나 팔릴 수 없기 때문에 노동이 그야말로 상품이라는 인상은 실상에 대한 지독한 왜곡일 수밖에 없다.
생산자 사회를 사로잡은 상품 물신주의와 마찬가지로 소비자 사회를 사로 잡고 있는 주체성 물신주의는 궁극적으로 환상에 기반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러한 관계의 매력은 인간의 유대를 묶고 푸는 것이 도덕적으로 ‘관용주의적인 (무관심한, 중립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하여 행위자에게 서로에 대한 책임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선언에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질문은 소비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서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욕망하고‘, ‘갈망하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원하고, 욕망하고, 갈망하는 것의 본질은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소비자 사회는 과거의 어떤 사회도 도달할 수 없었을 만큼, 도달할 꿈을 꿀 수도 없었을 만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겠다는 약속에 의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비자 사회‘는 소비주의적 생활방식과 삶의 전략의 선택을 촉진하고, 장려하거나 강요하며 모든 대안적 문화의 선택을 혐오하는 사회를 나타낸다.
동일한 이유로 (즉, ‘사회적으로 적합하다‘는 쟁점을 개인의 책임과 관심사로 전기하기 때문에) 소비자 사회에서 배제주의적 실천은 생산자 사회에서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가혹하고, 단호하다.
소비자 사회 구성원은 자체가 상품화의 생산물이다. 이 구성원이 규제 철폐와 사사화를 통해 생황정치의 상품화 영역으로 내맡겨지는 것이 소비자 사회를 다른 형태의 인간적 함께함과 구분해주는 주요한 차이점이다.
크루그먼은 "지난해 미국은 세계 시장에서 벌어들인 것보다 57%를 더 지출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인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해올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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