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의 사회이론 한울사회이론 4
숀 베스트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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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 학계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숀 베스트는 출판사의 소개로는 윈체스터 대학의 교육학 교수로 이력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찾아보려고 구글링을 해 본 결과, 최근 윈체스터 대학에서의 강의를 그만 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동 대학에서 강사나 방문 교수 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이런 그의 전공 분야는 사회 이론, 교육 사회학, 신자유주의하의 교육 문제와 더불어,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학문적 연구 등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외 그의 출생지나 유년 시절 부터의 교육 이력은 웹에서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Emerald Guide To Zygmunt Bauman"으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에게 지그문트 바우만은 무엇보다 '세계의 진실'을 알려준 지식인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강화한 자본주의적 체제, 그것을 기반으로 전세계가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로 구축되어왔던 과정과 엄혹한 결과를 낱낱이 폭로한 사람이 지그문트 바우만이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인데요. 여기서 낱낱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해 언제나 비판적 입장을 취한 세계인이기도 했습니다. 조금 이른 내용일 수 있지만 저자인 숀 베스트가 바라본 바우만의 고통스런 좌절과 가까운 인식을 먼저 언급하고 싶은데요. 액체 근대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1980년대에 대처와 레이건이 처음 제시한 '대안은 없다'라는 신자유주의적 슬로건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하여 고통과 배제,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바우만을 슬프게 했다는 글의 대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조금 달리 해석해 보려고 하는데요. 인간이 계몽에 의해 눈을 뜨고, 억압된 권력 관계, 계급 문제, 개인의 인권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자유, 즉 종래의 자유주의로 해결해 왔다면, 더 이상 규제가 필요 없는 시장자유적 근본주의에 왜 우리가 굴복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선, '인간의 탐욕'을 근본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어찌됐든 자본주의 체제 하에, 그 자본을 축적하고 권력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규제 없는 시장'이 공공의 선을 위해 어느 정도 규제가 필요하다는 사회 관념을 불필요한 것으로 몰아갔습니다. 이 부분 역시, 바우만이 비판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요 주장이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를 우리가 보기에도 체제의 틀을 구축한 과거 근대 및 근대주의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쁘게 변질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특히 4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바우만의 소위 '근대적 가치'에 대한 날선 비판은 그의 '근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일견 보이는 것처럼, "근대성에 동기를 부여한 바로 질서의 추구"였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권력 지향의 속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사회적 체제의 질서 구축에 몇 세대를 거쳐 노력했던 점은 바로 앞선 맥락에 기반해 있기도 합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우선적으로 자본주의를 최소한 도덕적 기반의 맥락에서 재구축을 하려는 노력을 하거나, 아니면 이 자본주의가 인간을 필요한 자와 쓸모없는 자로 분류하기 전에 우리가 힘들게 마련한 민주주의적 체제가 그 '자본의 논리'에 노예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이기심에 기반한 개인의이익추구, 즉, 교묘한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대한 현실적 대응 논리가 우리 사회를 위해 필요했습니다. 이미 바우만은 책임감이 없는 인간에 대한 비판을 탈근대 상황에서 무엇보다 강하게 목소리를 유지하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 책임감의 문제는 그저 단순한 관념이 아니어서 동질한 사회에서 같은 삶을 영위하는 수많은 타자들에 대한 서로간의 연민과 책임이 결여된 그야말로 완벽히 개인주의화된 인간들이 만든 사회를 추종했습니다. 일전에 자유주의의 시조이기도 한 존 스튜어트 밀의 공익에 근접한 자유의 목적를 말하기란 매우 생경한 시대가 되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러고 보니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과거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사회가 직면한 경제적 문제와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동일하게 연구한 학자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숀 베스트가 평하는 대로,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 누구보다 상당한 지식을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전세계 여느 학자들보다 바우만이 순수한 '교양인'에 가깝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데요. 이는 이디스 워튼이 묘사하는 것처럼 19세기 시대에도 '교양인'에 대한 평가는 꽤나 호의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를 숭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간의 사람들도 인정하는 바대로 어느 위대한 철학자가 스스로 깊은 사색을 통해 어느샌가 중요한 통찰에 이르기도 하지만 일관된 주장에 본질적인 살을 붙이는 과정인 '근거와 논리적 맥락'을 쌓는 일은 두루두루 많은 지식을 체화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우만은 평생 독서를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식인이기도 했는데요. 레비나스를 비롯, 칸트. 홉스, 그리고 그람시는 바우만에게 있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회적 분석과 근대에 있어 탈근대 논법을 언급한 것은 저자인 숀 베스트가 평한대로, 바우만이 처음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당시 학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그 논리적 설득력을 그가 인정받게 된 것은 사상적 기반이 얼마나 고유하고 독창적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 저 역시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액체 근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근대'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은 일관된 논증이 기반되어 있는데요. 근대성 자체가 스스로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으로 말미암아, 질서와 양가성을 동시에 생산한다는 언급과 특히, 사회에서 '우리의 일원'으로 분류되지 않은 타자 또는 이방인을 근대는 위와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인간 쓰레기'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근대세계 내부의 결연한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회적 구조가 이를 더욱 강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얼마나 이 근대를 '나약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겠는데요. 즉, 이 점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자세히 연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전체주의적 시스템하의 관료들이 사회 질서를 위해, 자신의 사회에서 바깥 또는 외곽에 위치한, 그 법적 지위가 모호한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내몬 것은 이런 근대적 맥락에 기반해 있다고 바우만은 다시금 강조합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저자인 숀 베스트의 첨언대로 바우만이 한나 아렌트에게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은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앞선 언급과 같이, 근대세계에서의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가 무엇보다 안전을 위해 제한 받을 수 있다는 폭로적 인식이 그저 소설 속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텐데요. 근대세계에서 과거 권력을 성장시키고 있던 노동 계급의 쇠락 및 분절과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 투쟁 자체가 경제적 불평등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이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는 자본주의의 강고한 권력화와 맞물려, 현재까지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일전에 가이 스탠딩이 비판했던 현실인 노동자들의 '프레카리아트화'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분절을 설명하는 꽤 실질적인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근대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배제된 사람들'로 분류된 많은 이들이 영구적으로 그 경계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불확실성, 빈곤, 취약성이라는 상태에 마찬가지로 영구에 가까운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민자들이거나. 빈자 혹은 권력의 그늘에서 아주 멀어진 사람들로 근대의 질서 구축이라는 미명하에, 앞서 설명한 바대로 복합적인 의미에서 배제된 상황입니다. 여기에 바우만은 이러한 '배제된 자'라는 참혹한 분류에 그 누구도 여기에 속하게 되지 않을 보장이 없으며,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돈과 권력의 유무에 따라 누구나 그렇게 처해질 수 있다는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이 병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것만으로는 완벽히 치료될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데요. 그래서 이 액체 근대세계라는 구조가 더욱 사람들을 개인화의 단계로 내몰고 어느 한 사람의 개인적 서사와 삶이 환경의 영향이라는 점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이 개인화는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삶의 고통과 가난으로 인한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하게 만듭니다.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이것의 명백한 서사는 신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개인들의 서사'와도 밀접하게 맞물려 있으며, 마찬가지로 바우만도 신자유주의의 이런 의도를 명백히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자체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매우 복합적인 - 이미 부정적으로도- 양상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본디 고도화된 자본주의적 이행과 따로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금융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른 급격한 사회 구조상의 변화 자체는 바로 신자유주의적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이런 근대 세계의 탈인간적인 괴물화가 결국엔 신자유주의적 이행 가운데서, '복지 국가 담론'을 무엇보다 시민들의 정치적 관념 밖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바우만은 '사회적 국가'라는 고유 용어로 기존의 복지 국가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정부 기구에 통합되면서 부와 소득의 공유와 분배는 일반적으로 중지된다."는 주장은 이러한 비판적 맥락에 기반하고 있는 부분인데요. 자본이 인간의 몇세대를 거치면서 노동력 착취에서 소비자 착취로 이동한 점은 자본 축적의 메커니즘 하에, 사회 구조가 이를 더욱 보장하는 상황으로 고도화 되기도 했습니다. 언제부턴가 인간이 자본의 한 요소로 기능하게 된 것은 조지 오웰 식의 비극적인 아이러니만은 아닐 겁니다. 이에 저자가 말한 것처럼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 대한 면밀한 분석 이외에도 왜 인간의 도덕적 본질이 추락했고 그것이 어떻게 윤리학과 차원이 다른 문제인지 그것에 천착하는데 평생을 기울인 이유일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제부터라도 타자에 대한 공감, 더 나아가 포함과 배제라는 도덕적 측면의 '분류'에 시민들이 더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고 조언합니다. 이렇듯 바우만의 사회적 포함 개념은 "타자와 함께 그리고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레비나스의 인식과 맞물려, "타자에 대한 책임"과 같은 바우만 고유의 철학이기도 한 데요. 우리 인간이 자신의 행복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듯,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하고, 내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을 견지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도 그들이 갖는 책임감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대화와 공감, 연대와 포함이라는 우리의 사회적 선언과 그 궤를 같이 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 근대세계를 진정으로 '탈근대'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과거 공동체 시대에서 인간의 도덕적 본질을 회복해야 하는 그 당위로써 명확히 언급할 수 있지만 현실은 바우만이 설파한 것처럼 민주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직접적으로 분리해야만 하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한데요.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분화된 몇 단계의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끝으로, 저자인 숀 베스트는 9장의 '바우만 효과에 대한 현실 평가'등을 주요 골자로 현재 전세계에서 바우만이 갖는 소위 학문적 영향력을 논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지그문트 바우만은 독자들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아니 관심 정도가 아니라 과장하면 어떤 '학문적 사조' 정도로 숭배 되기까지 했습니다. 다만, 저자의 언급대로 바우만이 어떤 조작된 출판 그룹이나 선도하는 사상적 흐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바우만 만큼 현 시대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내는 사회학자가 아마도 전무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에티엔 발리바르나 샹탈 무페가 머릿속에 떠오르긴 합니다만 전세계의 극단주의자들이 바우만을 그저 좌파 지식인으로 평가 절하 한 것은 그저 단순한 치부 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로서는 바우만이 액체 근대와 그것의 본질적 이해와 맞물려, "왜 이 세계의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공정한 사회나 공익 개념에 적대적이게 만들었는가"에 대해, 지극히 개인주의화 된 시민들이 자본이 요구하는 자아실현이라든지, 계급 상승과 같은 허울에 인식적 분별력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고민해보기도 하는데요. 이는 최근에 간행된 로버트 퍼트넘의 논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부분과 바우만의 원천적 고민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금 갖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우만이 자신의 유작 '레트로토피아'에서 했던 사활적 고민들이 바로 우리에게 향하고 있음을 여전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번역과 관련해, 일부 문장들에게서 어색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동일한 단어를 한 문장에서 반복한다든지, 문장이 마무리 되는 어미에서 마찬가지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본성을 고찰한 바우만의 인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다만, 인간의 본성을 규정하는 여러 목록들 가운데, '분별력 없는 이기심' 자체를 고유의 덕목으로 삼고 이를 원천적으로 보장한 신자유주의적 기법 내지는 그런 양태는 가히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의 사회적 진행이 이미 완료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기심을 기술적으로 구현해 내지 못한 배제된 사람들의 삶의 불안정성을 오로지 그들의 전적인 책임으로 강요한 점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실상 교활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우만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도덕적 책임은 오로지 개인에게만 그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대의와 비슷한 의미라 여겨졌는데요. 이에 저자인 숀 베스트의 바우만의 텍스트에 대한 한줄 평가를 덧붙이자면, 바우만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 독자들이 그의 텍스트를 자신의 분석으로 확장하는 그 '확장성'에 의미가 있었다고 밝힙니다. 


   




        





바우만은 또한 국가의 중앙 계획에 의해 근대세계에 창출된 사회질서가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세상으로 설계되었다는 생각을 혐오했다.

하지만 코와프스키는 또한 불평등애 대한 제한과 함께 (비록 비자본주의적인 조건에 의해 유발된 것이기든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역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바우만은 2000년 이후의 자신의 액체 근대 저술들에서 마거릿 대처가 자신의 정부의 경제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대안이 없다"는 표현을 도그마적으로 사용한 것애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권력구조는 하나의 실제적 실체이고, 그러한 권력구조가 존재하는 까닭은 역사적 실천을 수행하는 사회적 관계가 권력구조를 현실화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권력구조는 역사적 실천을 통해 작동한다.

바우만은 노동운동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적응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조절 체계라고 주장했다.

바우만은 사고 범주의 역할과 목적을 세계의 자연적 질서를 이해하고 세계에 인위적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노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람들은 개인적 이기심을 가진 ‘인식론적 실체 epistemological entity, 즉 사고하는 존재로, 자신에게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사회적 행위를 성공적으로 반복할 때 그들은 습관을 형성한다.

자기 인식은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관계의 외양과 그 사회적 관계의 본질 간의 구분을 없애고 그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도덕적 책임이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바우만이 보기에는, 유대인평의회 평의원들 사이에서 도덕성이 박약하다는 것보다는 아디아포라라는 달도덕화 과정이 미치는 영향이 더 중요하다.

바우만은 계몽주의가 사회적 삶을 법제화하고 규제하고 조직화하려는 충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배제된 사람들은 바우만이 영구적으로 경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즉 불확실성, 빈곤, 취약성이라는 상태에 영구적으로 놓인 것으로 분류된 삶을 살고 있다.

액체 근대인은 소비 행위를 통해 행복을 얻기를 기대하며, 불행을 경험하는 것은 죄 형태의 일탈 또는 범죄 같은 것으로 여겨져서 불행한 소비자는 사회의 온전하고 정당한 성원이 될 자격을 박탈당한다.

바우만은 ‘사회국가‘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왜냐하면 이 용어가 단지 배제된 사람들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하는 것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의 국가 내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공동체 내부의 동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액화를 보여주는 첫 징후가 바로 권력과 정치의 분리였고, 고체 국민국가의 권력 대부분은 그러한 국가의 통제력 또는 심지어 영향력을 넘어서는 글로벌 흐름 속으로 ‘증발‘했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비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타인 배려 충동을 받아들여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던 도덕적 중화가 일어난 것은 문명으로서의 문화가 상상력으로서의 문화를 성공적으로 제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만 프리스터에 따르면, 2011년 9월에 폴란드 주간지 <폴리티카 Polityka>와의 인터뷰에서 바우만은 이스라엘 웨스트뱅크 West Bank 장벽을 바르셔바 게토의 장벽과 비교하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으며 이스라엘 국가가 홀로코스트를 불합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요소는 바우만이 특별한 재능이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가 액체 근대세계의 공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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