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제1차 세계대전 - 유럽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 지도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대전 1
A. J. 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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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P. 테일러는 1906년 영국 사우스포트의 버크데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대대로 부유한 가문의 일원이었고, 특히 양친 모두 당시 영국에서 좌파에 가까운 식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곧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에 그의 모친인 콘스턴스는 코민테른의 일원이었고, 그의 삼촌 가운데 한 사람은 영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였습니다. 특히 모친인 콘스턴스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그의 조모는 오랜 퀘이커 교도였습니다. 1927년 테일러는 옥스포드 대학을 일등으로 졸업하고, 잠시 법률 회사의 서기를 거쳐, 1848년 혁명에 대한 현실 분석을 위해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향하게 됩니다. 또한, 2년에 걸쳐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시 유럽 외교에서 이탈리아 문제는 여러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관심사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家)와 이탈리아와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했고 이와 관련해, "1848~1918년, 유럽의 지배권 투쟁'이라는 중요한 논저를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The Origin of the Second World War)를 출판했고, 이 논저와 관련해 세인들은 그를 '역사수정주의자"로 평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은 테일러에게 통상 종이로 대변되는 '신문 저널리즘'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라디오로, 나중에는 텔레비전의 진출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는 1942년 3월, BBC에 출연한 이후로,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텔레비전 역사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대중 지식인'의 한 형태로 그는 당시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친 대중 역사가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First World War : An Illlustrated History"로 지난 196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0월 번역되었으며, 제가 구입한 판본은 제 10쇄본입니다.

테일러의 이 특별한 논저는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여타 글들과는 달리, 전쟁 시기 해당 국가들의 사회 및 군사적인 중요 사진들을 첨부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언급에 의하면, 한 주제와 관련된 대략 10장의 사진들 가운데 그가 고심하여 오로지 1장을 고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이는 1차 대전과 같은 중요 사건을 체험해 보지 못한 다른 세대에 있어, 수집된 흑백 사진들은 무엇보다 상당한 사료적 의미를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전쟁 기간 동안 사진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혼란과 전선에 동원된 수많은 병사들의 비참한 현실은 우리가 왜 지난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백한 답변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저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은 무엇보다 히틀러의 출현과 그에 따른 독일인들의 인간성 상실의 참혹한 몰락이 예견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저마다 역사의 해석이라는 논쟁에서 '역사가'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도 주관적인 평가를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는데요. 이에 저자인 테일러는 "역사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왜 기회를 살리지 못했는지에 대해 넌지시 의견을 제시하는 것 뿐이다."는 다소 대답을 회피하는 듯한 언급이 보였지만 글을 전부 일독해 보니 저의 짐작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테일러는 당시 연합국 군부들과 그 반대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참모부, 그리고 이들과 관계된 민간 권력의 민낯을 주저 없이 드러내는데 상당한 지면을 투입합니다. 그가 직접 설명하는 전쟁 수행의 핵심인 민간 권력과 장성들의 직간접적인 주도권 투쟁과 대립, 그리고 그에 대한 감당하기 힘든 결과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교훈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동시에 역사가 본인의 흔들리지 않는 양심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1914년의 복잡한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어 유럽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내몬 대전은 소위 민주주의 진영과 전제 정권의 대결 구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 역시, 유사한 해석을 글에서 언급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에게 있어 다소 복잡한 의미이기도 했던 독일 제국과의 연대를 영토 야욕이라는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더욱이 평범한 게르만인들이 인접한 슬라브 민족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으로 인한, 노골적인 전쟁 시도가 심각한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고 보는 해석이 이 논저의 주된 핵심입니다. 다시 말해, 이 테일러의 이 글은 패권을 지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 즉 세르비아에 대한 야욕과 세르비아인들의 후방에 있는 강대한 동토 제국인 러시아라는 존재, 바로 이들과 동맹 관계인 프랑스, 그리고 유럽의 관리자로서 정체성을 견지하고 있던 세력 균형의 감시자인 영국이 각자 서로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그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잘못된 판단이 결국 전화(戰火)를 전유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첫 번째 세계 대전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떤 숭고한 이상이나 인간 해방, 혹은 자유에 대한 투쟁 같은 것이 아니라, 유구한 제국주의 국가가 그저 좀 더 많은 땅을 위해 손쉬운 군사력을 투영한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역사의 함정이라는 측면에서 각 행위자들의 침략 행위는 결국 전 유럽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곳곳에서 보이는 수많은 병사들의 주검은 실로 가슴 아픈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이렌 네미롭스키는 수차례 1870년의 보불 전쟁을 언급하며, 그 결과 베르사유에서 탄생한 '독일 제국'이 어떻게 프랑스인들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를 민족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테일러도 이 글 6장에서, 전후 프랑스인들은 연합군에 패한 독일이 보불 전쟁 이전과 같이, 그저 자신들의 변방으로 국한되기를 바랐다는 분석은 실로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유럽에서 강대한 육군을 지닌 프랑스와 효율성과 단순함으로 무장한 독일식의 군사주의는 이처럼 군사적 충돌을 예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데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는 갑작스런 대전을 맞이했으며, 과거 보불 전쟁의 영향으로 말미암아(그런 신중함이 배경이 되어) 자신들의 배후에 있던 영국에게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영국은 자신들의 국익과 아주 밀접한 저지대 국가들에 독일이 진격하고, 그에 따른 첨예한 전선이 프랑스 북서부에 완성되어 파리 점령이라는 양국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가시화 되자, 군대를 파병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당시 영국의 중요한 관료였던 로이드 조지는 마지막까지 참전을 반대했습니다. 또 당시에는 군사적으로 민감한 인접국의 '국가 총동원령' 자체를 사실상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기도 했는데요. 발칸 반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숨길 수 없는 야욕을 확인하자 마자 러시아가 '국가 총동원령'을 발동했을 때, 독일이 이를 철회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한 점은 단순한 내정 개입 이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발발한 1914년이 차츰 저물어 가자, 당시 정치권을 비롯한 시민들은 이 '대전'이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을 어느 정도 예측하기에 이르는데요. 제1차 세계 대전은 어떤 면에서 다음 세계 대전보다 군수품을 훨씬 더 소모하는 전쟁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바로 이 막대한 군수품의 국가적 생산과 예비병의 전선 투입이 매번 가능하지 않았던 독일은 국내에서 혁명의 기운이 일어났고, 이를 민감하게 반응한 군부에 의해, 빌헬름 2세는 퇴위하기에 이릅니다. 독일의 항복과 황제의 퇴위는 그 시기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는데요. 대서양을 건너 유럽 배후에 있던 미국이 막대한 군수품을 지원하고 자국의 해상이 대전 내내 봉쇄되지 않은 영국은 막대한 인명 피해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초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독일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병력 피해를 입은 프랑스가 장성들의 고압적이고 전술적인 무능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런 영국과 미국의 막대한 물자 공급에 있었던 것인데요. 물론 학자들에 따라 1차 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을 해상 봉쇄한 것이 맞느냐, 아니냐의 치열한 논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917년 이후,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모든 전선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테일러는 원래 독일이 대전 중에도 식량을 수입하지 않는 국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프로이센의 효율적인 군사 제도의 이력을 고려해 보더라도 초전부터 독일의 한계는 명확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1915년에는 서부 전선의 지지부진한 국지전으로 인해, 상파뉴 지역에서만 5만 명의 프랑스인이 희생되고, 생 미엘에서는 6만 명이, 마찬가지로 아라스 근처에서는 12만 명이 희생되기에 이르는데요. 이처럼 1차 대전 당시, 연합국에만 한정해 봐도 막대한 인명 피해를 매번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인 테일러는 당시 군을 이끄는 장성들이 어떤 전략적인 측면이나 이를 수행하는 전술적인 이해도 없이 그저 '승리 만을 위해' 틀에 박힌 연설로 병사들을 전쟁으로 내몰았으며, 이런 무분별한 전투 행위가 곳곳에서 수많은 피해를 양산했던 것은 그 증거를 봐도 분명해 보입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전쟁을 지원하고 자원을 분출하는 소위 선출 권력인 정치인들 역시, 알량한 군사적 업적을 위해 장성들과 심지어 권력 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테일러는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는 그저 참모부에 기웃거리는 것으로 끝났지만, 영국의 총리와 프랑스의 수상은 경우에 따라서 사사건건 장성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일관되지 않은 지휘부를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저도 이런 테일러의 평가에 일견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군 장성들이 과거 나폴레옹 전쟁을 수행한 장군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무능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며, 이러한 군인들의 존재와 이들이 어설픈 군사적 식견으로 이들에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는지 저로서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특히, 솜(또는 솜므)강 전투나 베르됭 전역에서의 양쪽 모두 치명적인 전술적 오판과 이로 인해 발생된 만 단위의 사상자들은 수뇌부에 일원화된 지휘 체계 이상의 그 무엇을 요구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 참혹한 희생으로 말입니다.   

해가 바뀌어 1916년이 되자, 많은 민간인들은 정말로 전쟁이 자신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낍니다. 같은 해, 5월에 들어서자마자 마침내 영국에서 무차별적인 병력 자원 징집이 이뤄지게 되는데요. 이는 예비 병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것에 당시 유구한 자유주의 전통을 갖고 있던 영국 정치권 조차 이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국내 물가와 환율이 요동치게 되자,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발생한 매점매석과 부족한 생필품 상황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야말로 인간의 사악함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자원을 독점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양산되는 가운데, 이자들은 그 책임을 노동조합의 탐욕으로 화살을 돌리게 하는데요. 실로 인간의 추악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 대목에서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견되는 측면에서 당시 영국 정부는 서서히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던 아일랜드를 무력 진압하게 됩니다. 소위 고귀한 이들이 숭앙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그야말로 배신하는 행태를 보인 '대영 제국의 민낯'은 '식민지를 거느린 의회 민주주의 국가'라는 그 본질로써, 저로 하여금 다시금 고심하게 만들었는데요. 이러한 비극적 과정에 대해서도 저자인 테일러는 영국 정부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천명의 아일랜드인들이 재판도 없이 영국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고 일침하기에 이르는데요. 이 때의 아일랜드인들은 독립이라는 가치 뿐만 아니라, '공화국 아일랜드'에 대한 진심까지 드러내며 스스로 운명을 걸었지만 끝내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참혹한 군사적 진압 뿐이었습니다.

1916년 이후, 클레망소와 로이드 조지의 투톱으로 행정과 정치적 안정을 찾은 연합군과는 반대로 독일의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의 노골적인 정치 군인화와 이들이 속한 참모부의 연이은 무능과 실책으로 전선에서 쉬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더 이상 승리와 가깝지 않게 되었다고 이를 인정하게 됩니다. 다만, 두 개의 전선 가운데, 한 곳인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동부 전선에서 다소 숨이 트일 수 있게 되었는데요. 당시 독일 정치권은 레닌을 일부러 러시아로 탈출시켜, 정치적 혼란을 획책합니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일부 성공해 전쟁을 불신 하는 '혁명 세력의 러시아'는 전쟁에서 점차 발을 빼게 됩니다. 이러한 사태를 연합군 지휘부가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위기는 미국의 참전으로 고통스럽게 상쇄되기에 이릅니다. 이에 저자는 '막강한 힘을 가진 이상주의자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과연 유럽은 이를 호재로만 여길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셰익스피어식의 논법으로 대응하기도 했는데요.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식민지를 분할하고 여기에 겁 없이 참전한 오스만 투르크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분할하여, 석유가 나오는 중동을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려는 영국의 의도는 겨우 절반 정도 성공하기에 이릅니다.  

1918년이 되자, 전쟁을 지휘하던 독일의 루덴도르프는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속에서 떨치지 못하게 됩니다. 이미 국내에 다소 간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어떤 식으로든 종전을 대비해야만 한다고 고심하게 됩니다. 전황은 이런 그와 상관없이, 미국의 참전의 영향으로 독일제국의 배후였던 오스만 투르크가 연합군이 상륙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굴복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전황은 급격하게 독일에 불리하게 진행되는데요. 앞서 언급했듯, 독일의 군사 엘리트들은 두 개의 첨예한 전선을 자신들이 장시간 유지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됨으로써,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큰 기회가 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루덴도르프의 군사적 무능으로 인해 그것은 악몽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당시 트로츠키의 예견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심각한 파업이 일어났고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의 굴욕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적대적인 주변국들이 목줄을 쥐어 오자, 이들은 독일이 모르게 연합국에 강화를 요청하기에 이르는데요. 물론 연합군은 이런 강화에 초반부터 응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측면에서, 1918년 당시 독일 제국은 어느 때 보다 더 전진해 많은 영토를 획득하는데요. 하지만 내부에서 휘청이는 독일 제국은 곧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같은 해 3월, 루덴도르프는 스스로 흥분해 공세를 서부인 아라스로 집중하지만 예비 병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독일은 그 귀중한 병력을 연합국의 입으로 들이미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됩니다. 루덴도르프는 전술적 고려 없이, 그저 직감으로 이를 결정한 것인데요. 더욱이 독일 병사들이 영국의 풍부한 보급품을 보고 저절로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다는 분석은 독일인들이 스스로의 전쟁 수행 능력을 불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뒤이어 연합군 진영인 조프르와 헤이그, 니벨은 독일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지만 마찬가지로 루덴도르프 역시 이에 산발적으로 대응한 결과로, 자국의 군사적 수단이 최종적으로 봉쇄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체코인들이 전쟁에 개입하여 시운을 만나 자신들의 민족이 중부 유럽에서 독립의 깃발을 꽂게 됩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출현은 바로 이런 배경에 있었습니다.

결국 1918년 8월 이후, 전선에서의 연합군의 공세는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나타나고 이들은 결국 베르됭 남쪽 생 미엘 돌출부를 격파합니다. 테일러에 의하면 이 장면은 서부 전선의 중요한 전환점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에 루덴도르프는 8월 8일을 "독일군의 비극적인 날"로 회상하고 이 심리적인 결과로 말미암아 다수의 독일 병사들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란 매우 요원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다 9월 29일, 루덴도르프는 즉각적으로 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빌헬름 2세의 네덜란드 망명 이후, 독일의 정세는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대내외적으로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바덴의 막스 공이 재상에 임명되자 독일 정치권은 연합국과의 본격적인 강화에 나서게 됩니다. 10월이 되자 독일은 노선을 바꿔, 직접적으로 미국과 접촉하게 되는데요. 이들은 그 당시 윌슨이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던 그 유명한 '14개 조항'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것이 독일과 자신들의 몰락을 회피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 할지라도 이 부분에 대한 결과는 명백했는데요. 그것은 소위 '윌슨의 승리' 내지는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사실상 꺾인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내심 라인란트를 원했고, 영국인들은 독일의 기존 식민지를 얻기를 원했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윌슨에 의해 무산된 것인데요. 이것은 마치 처칠이 전후, 영국의 제국주의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숨겨진 의도를 스탈린과 함께, 이를 획책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에 의해 사실상 분쇄된 것과 유사한 장면으로 느껴졌습니다. 

끝으로, 저자인 테일러를 통해, 전후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점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미국이 영국의 방해 없이 사심없는 방향으로 독일과 협상에 나섰고, 이 협상 과정이 그간 알려진 바대로 독일에 심각하게 가혹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그의 분석은 과연 독일인들에 굴욕적인 협상 조건과 타협 없는 배상금으로 말미암아 후에 독일인들이 '그 문제의 인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존의 전형적인 분석과도 배치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민족적 자긍심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오늘날 수준에 맞춰 이해한다면 당시 독일인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겠는데요. 다만, 이 부분을 역사수정주의로 판단해야 될지는 아마도 독자들의 몫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자는 더할 나위 없이 케인즈의 우려와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분명한 사실은 독일의 민주주의가 역설적으로 당시 독일 군부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어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종말 역시,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전 시대의 복합적인 결과의 산물로 이상주의자 윌슨이 의회에 동의조차 받지 못한 채, "불구가 된 평화안'으로 밀어부쳤지만 결국 민족주의라는 불씨를 유럽에 살포하게 됩니다. 그것도 유럽인들만의 민족주의로 말입니다. 이러한 파국을 준비한 세계의 일각에서 우리는 히틀러의 출현을 목도 했고, 평화를 입으로만 외친 강대한 이상주의자가 스스로 실효적인 행동에 이르지 못한 채,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참혹한 두번째 세계 대전이었습니다.    


-본문 216 페이지에 오탈자 한 곳이 있었고, 341페이지에는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전후 과정에서, 옛 동프로이센 지역의 단치히를 끝내 자유시로 만든 것은 독일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시킨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인 테일러는 6장 후반부에서 쉽게 시선을 거둘 수 없는 어떤 서사를 새겨놓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따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사라지자, 쪼그라든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민족이 통일하겠다는 데 이보다 더 분명한 이유는 없었다. (중략) 그러나 독일인들은 누구의 동의도 없이 적어도 한 명의 오스트리아인을 얻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였다.

     

         

 

    




7월 25일 세르비아인들이 간신히 체면만 차릴 정도의 유보를 붙여서 통첩을 받아들였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즉시 세르비아와 관계를 단절했고, 다음 날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영국 대함대가 안전하게 지켜주기에 침략당할 위험이 없었고, 명분을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그 명분이란 "약소국 벨기에"의 중립과 독립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어떤 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보다 군수품을 훨씬 더 소모하는 전쟁이었는데, 이는 기계, 전차, 항공기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총포와 포탄에 있어서 그랬다.

키치너는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심은 했지만 영국이 기여하는 바가 적어 난처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극도의 충실함으로 이를 극복해보려 했다.

어느 나라에서든 민간인 각료들은 감히 장군들을 비판하거나 그들에게 도전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각료들이 독립적인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영국인들은 5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독일인들은 2만 명이었다. 프랑스인들은 19만 명을 잃었다. 독일인들은 12만 명이었다. 그럼에도 조르프는 여전히 기가 살아 있었다.

10월 5일 영국 사단 하나와 프랑스 사단 하나가 중립국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 상륙했다. 독일의 벨기에 침공과 마찬가지로 실행된 방식이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베르됭 방어로 페탱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대령이었는데 베르됭 전투 후에 프랑스의 원수가 되었고, 마침내 프랑스의 국가수반이 된 것도 오로지 베르됭 덕이었다.

연합국은 전쟁 전의 국경을 시작점으로 여겼고, 독일인들은 현재의 참호선을 시작점으로 생각했다.

로이드 조지가 최고 권력을 쥐게 됨으로써 런던에서 타협을 통한 강화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시끄러운 이야기가 은연중에 멎었다.

연합국에 따르면 오로지 도덕 원칙들을 확립함으로써만 앞날이 안전해질 수 있었는데, 독일의 시각에서 이 원칙들은 독일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취리히에 망명해 있는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이었다. 그는 독일인들을 패배시키거나 세계를 안전하게 만들어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현존하는 모든 정부를 전복하고 국제 사회주의를 세우기를 원했다.

이때부터 전쟁이 "윗사람들의 전쟁","경쟁하는 제국주의 간의 전쟁"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국민들은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전쟁이었다.

독일인들과 오스트리아인들은 러시아 점령지에서 밀을 들여왔고, 볼셰비키들과 강화 협정을 조인한 후에는 훨씬 더 많이 가져왔다.

독일은 정복한 곳들, 특히 벨기에 점령지를 보유하겠다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새롭게 밝혔다.

독일 국민은 놀랍게도 독일이 최고 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민주적인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로이드 조지와 클레망소는 또한 독일이 연합국 민간인들과 그들의 재산에 끼친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이 요구로 시작된 배상 문제를 놓고 지루한 다툼이 벌어지리라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라인란트에 주둔한 영국군이 지휘관으로부터 하위 계급까지 봉쇄에 항의했고, 굶주린 어린이들과 여성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강화 조약이 조인되기 전에 봉쇄가 종료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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