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칼 포퍼 지음, 허형은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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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과학 철학자 중 한 명인 칼 포퍼는 190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중상류층 계급의 부모에게서 태어납니다. 포퍼의 가문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루터교로 개종했고, 그도 루터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부친은 보헤미아 출신의 변호사이자 비엔나 대학의 법학 박사였고, 모친은 실레지아와 헝가리 출신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특히 포퍼의 부친은 12,000권에서 14,000권으로 추정되는 책을 소장한 애서가였으며 그런 집의 분위기로 말미암아 포퍼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19세가 되던 해인 1919년, 당시 포퍼는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되어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당원이 되었는데요.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심각한 오류를 깨닫고 이 이데올로기에서 스스로 벗어나게 됩니다. 이후 그는 객원 학생으로 비엔나 대학에서 수학하고 그외에는 캐비넷 제작자로 견습 생활을 시작해 곧 숙련공으로 이 과정을 마쳤습니다. 1928년에 포퍼는 칼 뷸러의 지도 하에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듬해인 1929년에 중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칠 수 잇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교편을 잡고 있는 와중에 그는 1935년과 1936에 연구 방문을 위해 영국을 오가기도 합니다. 마침내 1937년이 되어 그는 뉴질랜드로 이민할 수 있는 자리를 얻었고, 크라이스트처이에 있는 뉴질랜드 대학에서 철학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논저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을 쓴 곳이 바로 뉴질랜드에서였습니다. 그런 명성을 안고 1946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제안을 받아 영국 런던의 런던정경대학 LSE에서 논리학 및 과학적 방법론의 교수로 임명됩니다. 이후 1969년에 최종적으로 학계에서 은퇴한 포퍼는 1985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서리의 켄리에 정착합니다. 그렇게 사색과 집필활동을 하던 그는 1994년 9월 17일 암과 폐렴 및 신부전의 합병증을 세상을 떠나게 되고, 화장 후, 그의 유골은 비엔나로 옮겨지게 됩니다. 평생에 걸쳐, 포퍼는 합리주의 철학과 정치적 자유 및 민주주의에서의 사회 비판의 원칙에 학문적 노력을 기울이고, 특히 1945년 이후 독일의 나치즘에 반하여,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던 인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lles Leben ist Problemlosen : Uber Erkenntnis, Geschichte und Politik"으로 지난 199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06년 초도 번역 이후, 2023년 3월 재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여기 칼 포퍼 역시, 인류사의 비극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치열한 냉전의 시기도 학자로서 분투했다고 볼 수 있으니 그의 전반적인 삶 자체가 내적으로 그저 편안하거나 안온했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특히 포퍼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칸트의 지고한 탐구에 대한 찬탄과 함께 서두에 자신이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는 점을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포퍼는 "내가 지지하는 것은 민주주적으로 선출되고 헌법에 의거해 통치하는 정부"라는 것을 전제하고 이로써 그가 7장 이후의 '법치주의 국가'에 대한 본질이 어떻게 자유 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는지 깨닫게 되는데요. 여기에 그의 주저였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민주주의에 터무니 없는 공격을 해 체제를 붕괴시킨 전체주의와 그 추종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좀 시간이 지난 뒤,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그의 주저가 당혹스럽게도 부분적인 오독이 되기도 했는데요. 이 책의 출판 연도를 감안하더라도 소위 열린 사회에 대적하는 자들의 존재란 아주 명확했지만 어떤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오독이 된 정황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서, 포퍼의 이 논저는 일종의 에세이이자 강연 원고 모음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글의 제목인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는 9장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1부가 과학 철학에 대한 포퍼의 인식과 그런 과정에서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위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는 과학 철학의 중요한 전제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어지는 3장에서 그는 지식의 한계, 즉 대부분의 지식이 가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이에 소위 지식을 항유한다는 지식인들을 대범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지식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작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에둘러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그것이 인생의 기본 진리라고 추측합니다."라고 포퍼는 첨언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과학이 대답하고 창의적인 여러 가설을 통해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지요. 가설의 거의 대부분은 틀렸거나 검증이 불가능합니다."라고 그 한계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포퍼의 생각은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기본적인 태도는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만 한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그가 겸허한 인간이기도 했던 케플러를 긍정하고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겠는데요. 케플러는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가설을 '경험'이라는 엄중한 시험대에 올려, 우리가 실수를 통해 배우게 할 수 있는 과학적 가설이 될 수 있게 노력했습니다. 케플러도 본인도 그것을 잘 알기에 실수를 제거하고, 그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고 포퍼는 그리 평가하기에 이르는데요. 포퍼가 앞선 진화와 관련된 논증에서 수많은 종이 자연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이 세대의 실수가 제거 되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앞선 주장과 연계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즉, 이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과학계가 보이는 자신의 어떤 가설의 진위 여부를 가리게 되는 반증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이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그들은 결코 그런 실수로부터 배우려 들지 않는다는 학계의 세태를 비판하는 것인데요. 앞선 장에서 논증되고 있던 진화인식론에 대한 그의 비판적 분석 역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비롯한 소위 지식의 경험적 요소로서, "우리는 오직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학습한다"는 큰 전제를 다시금 강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부는 소위 '역사와 정치에 대한 고찰'로 포퍼가 몸소 겪었던 그 혼란의 세계를 기준 삼아, 철학과 정치 그리고 사회에 대해 가감없는 자신의 의견을 펼쳐내고 있습니다. 일단 과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본질을 파악한 포퍼는 마르크스가 경고한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그런 이데올로기가 구축되어 나타난 미소 간의 첨예한 냉전시기에서 당시 거대한 공산 국가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즉, 유럽의 역사에서 한동안 배제되었던 스위스의 시민들이 자유에 대한 결속된 태도를 갖고 있었듯이, 인간의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원초적이고 중요한 의미인지 포퍼는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자유의 좀 더 확장된 의미라고 볼 수 있는 '정치적 자유'에 대해, 8장 이후 이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포퍼는 이 정치적 자유를 전제주의 정치로부터의 자유로 먼저 해석하고 있지만 이 정치적 자유가 있어야만 정부가 어떠한 유혈없이 교체될 수 있고 그런 민주적 체제가 보장되어야만 동시에 정치적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민주주의와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시장 경제와 자유시장에 대한 관념이 포퍼의 입을 통해 "나는 오직 국가가 법적 질서를 세우고 보장하는 상태에서만 자유시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논리적 근거를 들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라고 두 체제의 명료한 관계성과 이것을 존재케 한 정부의 본질을 명확히 합니다. 즉, 이는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이 애써 왜곡한 부분으로 시장을 위해, 국가와 정부가 과정의 합목적성과 합리적 결론을 방해하고 무조건적인 당위만을 이들이 강요한 이행의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왜곡된 주장을 에둘러 이해할 필요가 없이, 그저 자신들과 기업 그리고 자본에 이득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 체제 전반을 시장에 봉사하는 식으로 개조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끝으로 저는 10장에서 포퍼가 보이는 '정치적 자유'에 대한 인식에 적잖은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정치적 가치들 중에 이 정치적 자유는 무엇보다 중요하며, "우리는 언제든 정치적 자유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는 힘 있는 목소리에 이어, "정치적 자유는 언제라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만히 앉아서 이대로 자유가 보장될 거라고 믿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는 선명성을 문장의 연계를 통해, 우리에게 거듭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가 역사의 분절을 몸소 체험한 오스트리아인으로서, 전체주의가 어떻게 국가와 유럽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런 결과가 인류에게 어떠한 참혹함을 안겨주었는지 뼈아프게 경험해 봤기에, 이 정치적 자유라는 소명을 우리와 같은 다음 세대의 시민들에게 부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고언으로 읽히는데요. 또한 지식의 강요된 형태가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최소한 인정한다면 선동과 폭력이 아니라, 지식 자체는 시민들의 안정과 더 나아가 평화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포퍼의 마지막 조언은 많은 독자들을 숙연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됩니다. 포퍼는 일생동안 스스로를 낙관주의자이자, 칸트에 동화된 합리주의자이자 그리고 계몽주의자로 밝혔는데요. 핵무기 경쟁으로 점철된 시대를 살다간 한 지식인의 남다른 고백은 냉소주의와 역사의 예언적 의미에만 몰입하는 일부 세대에게는 한낱 공허한 울림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너무 과신하지 말라는 점과 스스로를 성찰하고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우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새로운 지식의 디딤돌로 삼아야만 그런 적지 않은 과정 속에 삶과 정치를 아우르는 진정한 평화가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글 말미에 생각해 봅니다.


-이 글에서 버틀란드 러셀과 카를 슈미트의 짦은 일화가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특히 포퍼가 경험한 카를 슈미트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놀랍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버틀란드 러셀에 대해 느끼는 그의 안타까움은 뭔가 아이러니한 감상이 들기도 했는데요. 러셀에 대해 그와 같은 평가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는 저로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듭니다.



과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만드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비판적 접근이며, 이는 과학 이론의 객관적, 공개적, 언어적 공식화를 통해 이루어 집니다.

우리는 항상 반증을 통해 전혀 새로운 사실들을 배웁니다. 어떤 가설이 잘못됐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도 배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더욱 예리하게 조준된 새로운 문제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고유한 인간 언어의 발명이 과거에 일어난 일을 보고하거나 혹은 상세히 묘사하는 능력과 관련 있다고 봅니다. 그 결과, 사건의 보고에는 종종 화자가 바라는 바가 섞여 있습니다.

케플러도 자신의 실수에서 배울 줄 아는 한명의 형이상학자였습니다. 실수에서 배운다는 건 그에게는 매우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가 그것을 간과하는 것과 사뭇 대조되지요.

내가 이성이나 합리주의를 논할 때는 오직 우리가 자신의 실수와 오류에 대한 비판, 특히 타인의 비판을 통해, 그리고 나아가 자기비판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정치적 자유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는 사실도 간략히 설명했고요.

사실 국가 통치의 형태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피를 흘리지 않고 현 정부를 교체할 수 있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그럴 수 없는 형태이지요.

이미 46년 전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초판본에서 나는 오직 국가가 법적 질서를 세우고 보장하는 상태에서만 자유시장이 존재할 수 있음을 논리적 근거를 들어 설명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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