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입자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길해옥 옮김 / 여백(여백미디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엘리에뜨 아베카시스는 1969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모로코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양친 가운데 그녀의 부친은 유명한 유대인 사상가였는데요. 덕분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스트라스부르 유대인 공동체의 일상적 삶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소위 말해 세파르딕 유대인들의 공동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년 시절을 보낸 아베카시스는 프랑스의 4개 고등 사범학교 가운데 한 곳인,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ENS)에 수학하고, 프랑스 공교육 시스템에서 소위 교사 자격을 부여하는 아그레가시옹 (Agrégation)을 무난히 통과합니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 캉에 위치한 캉 노르망디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게 되는데요. 1992년에는 도미하여, 하버드 대학에서 1년 간 수학하고 그즈음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로 인해, 스스로에게 명성을 안겨 준, '쿰란'의 모티브가 됩니다. 그녀는 이외에도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프랑스 록그룹인 DSLZ를 위해 곡을 만드는 등 다방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Clandestin"으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5년 2월 번역되었습니다. 현재 이 작품은 국내에서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아마도 밀항자, 불법 이민자들을 뜻하는 은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는데요. 작가인 아베카시스는 이 제목의 의미를 작품속에서 꽤나 복합적인 의미로 전개했습니다. 이를테면 여주인공인 '그녀'가 자신의 삶에 있어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흡사 수동적인 태도로 거의 위선에 이르지 못한, '이방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녀'가 프랑스에서 소위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행정 계통의 일을 통해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는 커녕, 때론 위선적이고 때론 가면을 쓰면서 이런 조직 문화에 적응해 가는 여타 인물들과는 달리, 어렸을 적의 가정 불화와 자신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사회와 본질적인 삶에 있어, 거의 이방인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측면으로, 이 작품의 제목은 이처럼 여러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조금 창백하고 어두운 계통의 피부색을 갖고 있는 남주인공인 "그"는 설정상 '짙은 푸른 눈'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의 문맥상 "그"가 프랑스의 남쪽 해안을 통해, 이 나라에 밀입국을 한 것으로 보아, 알제리를 비롯, 옛 프랑스의 식민지 출신으로 보이지만 작가 자신이 모로코 출신의 유대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앞선 푸른 눈과 "그"에게 종교적 색채가 완전히 배제된 점은 마찬가지로 의도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현재 프랑스 내부의 이민자 문제를 다루면서도, "어떠한 한 인간을 민족과 종교의 배경 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그녀 스스로의 철학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다만, 주인공인 "그"가 자신의 모국에서 숱한 여자를 관능의 측면에서 만나왔고, 남녀 관계에 있어 남자로서 어느 정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보아, 프랑스와 그의 정체불명의 모국은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작가의 서사를 통해, "그"는 자신의 형과 프랑스에 밀입국을 했지만, 자신의 모국과 완전히 상관없는 프랑스 내에서의 보장되지 않는 법적인 지위와 그로 말미암아 국적과 신분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 '국외자'로서 매번 사회의 감시로부터 쫓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설의 중후반부에서 암시되는 그의 형에 대한 불행과 이들 형제가 모국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타국에서는 그 신분이 전혀 보장 받지 못하는 상황은 법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어떠한 현실에 놓여 있는지 이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새삼 깨닫게 만듭니다. 작가에 의해서 거듭 강조되는 '자유의 나라 프랑스'는 이처럼 사람에 따라 여실히 이중적인 관념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또한 '스스로가 자유의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상실된 인간이 과연 바뀐 현실에서 사랑을 갈구할 자격이 있겠는가'라는 본질적인 측면을 작가는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여주인공인 "그녀"가 "그"에게 있어 그동안 만나왔던 관능적인 여성이 아닌, 정숙한 여성이라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이들 두 사람 사이에 놓여있는, 어느 역의 플랫폼과 서로 간의 진정한 이해를 방해하는 현실의 장막은 그만큼 복잡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거의 처음 대면하게 되는 사람의 지나온 삶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의 한 방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묵묵히 걸어온 삶이 결국은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축복일 수도 있다는 냉엄한 현실과 그것이 직면한 관념이 서로 교차되고 복잡한 심성으로 자신을 혼란으로 이끄는 와중에도 서로를 보는 시선이 묘하게 일관된 듯한, 서사 전반은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도 한두 번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순수한 호의를 갖게 되었던 신기한 경험을 해보셨을 텐데요. 물론 이 작품에서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는 어느 정도 긴밀히 연결된 맥락이 존재하지만 다른 이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에로티시즘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에 대한 터무니 없는 그녀의 호감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스스로의 삶에 수동적이고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녀에게 있어, 이 작품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만큼 복합적입니다. 누구에게나 치열한 삶 속에서 극적으로 부정되는 사회 속의 이방인과 다른 한편으로 법과 사회의 범주 밖에 있는 밀입자 혹은 (불법) 이민자의 정체성은 이처럼 이질적이게도 서로 맞닿아 있는데요. 결국 "그"와 "그녀"는 서로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들이지만 이들의 상이한 가치적 삶과 각자의 공간을 분리시키는 엄혹한 현실의 문제는 사실상 외형적 관계마저도 거의 파편에 이르게 만듭니다. 따라서 이런 모든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국한시키는 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작가는 이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끝으로 어느 정도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것처럼 보이는 비극적 결말 또한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 삶을 견지하고 지향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주인공이 힘겹게 서로에게 향하게 되는 발걸음은 그 의미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정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놓여진 현실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용기로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점은 사랑의 다른 형태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연유로 도입부의 "그"가 "그녀"를 보며, 문득 사랑이라는 감정을 읊조리는 장면은 후반부의 전개 과정을 예견한 중요한 복선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관능과 대치되는 정숙과 신중함 등으로 "그녀"를 규정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거의 명백하게도 "그"에게 있어,"그녀"가 바로 자신이 바라던 새로운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늘 변화가 따르는 법, 모든 시름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달래고 있어야 할 이 감미로운 순간마저 삶은 여지없이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바꾸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란 그저 인간이 만들어낸 늘 가식적이며, 늘 관념적인 허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버리고 마는 객(客)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시들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 직업에 종사한 이래 여러 부류의 이방인들을 보아 왔다. 그들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유를 찾으며 애썼으며, 자유를 위해서라면 전기에 감전되어 죽든 자동차에 깔려 죽든 독가스에 질식되어 죽는 상관없이 무장돼 있었다.

그녀는 단지 그를 돕기 위해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에게로 돌아왔던 것이며 그녀는 오직 그만을 위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협박과 구금, 거주지 이주 권유와 국경 추방 명령, 경찰관들의 폭력행위, 그렇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도.

사람들은 삶과 삶에 대한 의문과 그에 따른 제반 문제들을 회피하려고 하며, 특히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라는 근본 문제를 회피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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