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2판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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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는 한때 자신의 이름보다 그의 블로그 별칭인 k-punk 로 유명세를 타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레스터에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은 대부분 러프버러에서 보냈고, 그의 부모는 노동 계급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피셔는 공립 연구 대학인 헐 대학에서 철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이후에 코벤트리 외곽에 있는 워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 기간에 피셔는 사이버 펑크에 관한 문화 이론 등에 심취하고, 나중에 kode9으로 알려진 음반 프로듀서 스티브 굿맨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렇게 그의 경력 초기에는 사회에 대두하고 있던 인터넷 대중에 대해 관심을 갖고, 소위 캔슬 컬쳐 cancel culture, 즉 콜아웃 컬쳐 callout culture 라고 불리기도 하는 급진적 운동에 대해 날카로운 비평을 시작합니다. 또한 세계적 팝 스타였던 마이클 잭슨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담은 에세이도 쓰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안겨준 논저는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그의 사후에 문단과 비평가 집단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가 남긴 폐해와 이를 추동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을 가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은 너무나 위태로워 그저 힘겹게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각한 우울증 증세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논저가 출간을 앞두고 있던 2017년 1월 13일, 피셔는 48세의 나이로 서퍽의 펠릭스스토우의 자신의 집에서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 책은 원제, "Capitalism Realism"으로 지난 2018년에 초도 출간되었고, 이번에 번역된 판본은 2022년에 나온 제2판으로, 그의 아내인 조이 피셔의 서문과 동료이자 비평가인 알렉스 니븐의 서론이, 또한 소설가이자 동업자였던 타리크 고더드의 후기가 수록되었습니다. 이에 국내도 새롭게 증보된 원서 2판을 기반으로, 2024년 1월 번역되었습니다.

이제야 밝히는 부분이지만 지난날 마크 피셔의 이 중요한 글은 그동안 제가 지속해 온 사회과학 독서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던 논저였습니다. 이후에 접하게 되는 데이빗 코츠의 중요한 논저 만큼이나 그의 이 논저는 우리가 어떠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확실히 깨닫게 해 준 귀중한 보료였습니다. 이 책의 지난 판에서도 여실히 느낀 부분이지만 마크 피셔의 글쓰기와 주제 의식은 로버트 미지크, 마크 릴라와 닮아 있는데요. 우리가 만약 자본주의에 매몰되어 스스로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마크 피셔와 같은 신랄한 사회 비평이 무엇보다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그저 신자유주의자들이 손쉽게 내뱉는, "대안은 없다"와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지젝의 디스토피아적 발상은 우리가 어떠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데요. 이에 피셔는 특히 젊은 세대들을 비롯,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자본주의의 대안'을 숙고하는데 모두가 발벗고 나서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면서,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나 이런 가여운 통제 속에 가둬 놓고 있는지 충분히 가혹할 만한 실정이기도 합니다.  

과거 에드먼드 버크 조차, 사회에 이어져 내려온 전통과 관습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과거 계몽주의적 역사가 만들어 온 사회적 토대 역시, 우리의 삶과 사회의 지속성을 위해 중요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은 아마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특히 공익과 도덕성 그리고 시민의 삶을 위한 사회적 부조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피셔는 과거 최소한이나마 공공성을 유지하고 있던 후기 자본주의적 사회가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회 정의'를 포함한, 사회적 가치들이 시장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방해물로 치부되어 왔다고 해석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각자의 시민들이 그저 냉소하고 거리 두는 것 만으로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피셔의 논증들 가운데 무엇보다 동의했던 점은 자본주의가 태생적으로 홀로 유지되거나, 체제의 확장을 지속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시장의 자유를 비롯, 모든 시민이 자발적으로 이에 동의하고, 나아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에 반쯤은 체념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개인의 책임을 일절 능사로 삼고, 여기에 전통적 자유주의를 심각하게 오용한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의 자유주의적 가치에서 파생된 개인주의가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개념화 되었고, 바로 이것은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는데 '이익화'와 함께 중요한 맥락이 되었는데요. 또한 이 개인주의는 전통적인 공공성의 논의를 과거 역사 속의 흔적 정도로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피셔는 자신의 논저를 통해, 거듭 자본주의에 대한 도덕적 견제의 몰락을 중요한 비판 논거로 삼고 있지만 저는 이와 동시에, 시민들이 공공성의 개념을 실종시키게 만든 개인주의에도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평생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외롭고 고단한 경주와도 꽤나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소위 하이브리드적인 모습으로 진화해 온 작금의 금융 자본주의는 사회를 대적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으로 말미암아, 시장의 기득권과 그 배타적이고 자유로운 확장에 어떠한 견제 수단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장 자유라는 논법은 거의 종교적 교리와도 비견될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새롭게 발견된 금융 기법과 그에 따른 확장은 2008년의 대몰락 이후에도 시장이 틀어 쥔 주도권은 변함이 없었는데요. 저자의 말대로 라면 적어도 1980년대 이전까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분명 존재했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차단 당하면서, 가히'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와 함께한 자본주의는 더욱 사회에 '경제적 불평등과 인간의 소외 문제 등' 병리적 폐해를 심화시킨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속성이 내재된 간결하고 즉각적인 소비 문화에 의해, 삶에 있어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그저 남을 의식하게 되거나,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소양을 망각하게 되고, 공적인 문제에 대한 감각을 영영 소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자는 1장의 서두에서, "탁월한 자본주의 리얼리스트인 신자유주의자들은 공적 공간의 파괴를 경축했다"는 문장으로 그 본질을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국가를 맹비난 하는 동안에도 은밀하게 국가에 의존하고 있다"는 비난 받아 마땅한 이들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4장에서 인용된 데이비드 하비 역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번성하도록 이데올리기적 분위기를 창출하는 지식인 전위 부대로 싱크 탱크를 운용한다"고 가감 없이 비판하고, 마찬가지로 이를 피셔가 도출한 분석에 대응한다면, 신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그야말로 서로 결탁했다는 것에 시의 적절하게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 두 사람이 모두 명백하게 인정하는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권력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고 이를 또한 인정하고 있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 있어 현대 자본주의가 무엇보다 개인의 능력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진출 및 부의 획득에 일견 긍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많은 부를 보유한 부자들과 이들과 자원을 공유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강고한 계급화를 차츰 강화시켜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간에, 1980년대 이후의 이 신자유주의적 작업의 실체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 기반했던 것이고, 말년에 이른 밀턴 프리드먼이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는 발언을 철회한 배경에는 어느 정도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인정한 바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물론 그에게 가했던 비판과 공격도 한 몫을 했겠지만 말입니다.

이기적 자본주의와 개인의 이익 추구를 무엇보다 긍정한 이 신자유주의가 오늘날에도 그렇게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는 점은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적인 부정적 파급을 피하고, 6장 서두에 보이는 교육 현장에서의 '시장화'와 같은 여러 부정적 이미지들과 분리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피셔는 자신의 이 글에서 자본주의가 사회에 가져다 준 수많은 젊은 청년들의 '정신적 병증' 즉, 자신도 경험한 심각한 우울증과 더불어, 단순히 쾌락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향정신성 약품들의 범람 그리고 자본주의에 있어, 무엇보다 결여된 도덕성과 공공의 이익에 대해 전자와 맞물려 고찰하게 만듭니다. 이는 마치 지난 시절의 좋은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 반대의 지평에서 맞이하게 되는 매서운 현실에 절로 몸을 떠는 것과 유사한 인식 체계라고 여겨집니다. 오로지 시장이 가져다 주는 '이익'과 그것을 통해, 저절로 사회를 덕에 이르게 한다는 그 '메시아'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새삼 깨닫게 되는데요. 이것에 대한 어떠한 논리적, 경제적 근거 없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우리에게 그저 눈을 감고 이를 믿으라고 강요했던 과거의 장면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후쿠야마가 회고했던 바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아주 '손쉽게' 처리한 사회적 안전망을 뒤로 하고, 삶의 일관성을 졸지에 시민 스스로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이런 숨겨진 본질을 규명한 피셔의 상상의 날개는 "신자유주의의 종합을 통해 자본의 인공 지능이 지구를 지배하는 미래상"과 같은 코미디 같은 미래를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경고를 담고 있는데요. 만약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붕괴 시키게 될 지독한 과두제가 아니라면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끝이 과연 무엇이 될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끝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현 사회에 억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피셔의 경고는 우리가 새겨들어야만 하는 부분일 텐데요. 그의 논증을 통해, 왜곡된 자본주의가 더 이상 다수의 이익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1980년대 이전, 시민의 다른 모습이기도 했던 다수 노동자들의 기본적 욕망을 짓밟고 나타난 '신자유주의 이행'이 과연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는가를 피셔의 서사를 통해, 우리가 다시금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날이 엄혹해져 가는 경제적 불평등의 시대에서, 그 누구보다 선구자적 입장을 취했던 그는 아마도 우리가 병들고 굶주리고 가진 힘을 박탈 당하는 '시대의 실체'를 누구보다 폭로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신랄한 이성을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한다는 서글픔은 누구보다 저에게 더해지는데요. 더욱이 7장에서 그가 도출해 내는 신자유주의의 비도덕적 합리성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거의 계급주의적 속성으로 그 자체로 표면화 되어, 결국 축적된 부와 획득한 권력 유무에 따라 사람을 규정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자본주의가 시민들에게 끼치는 정신적 악영향을 진단한 리처드 윌킨슨의 작업과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토록 자본주의의 폐해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지금도 끊임없이 고발하는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늘어나는 시점에 피셔가 바라 마지 않았던 바대로, 그 대안을 조속히 우리가 발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투영하는 세계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우리 세계를 외삽했거나 우리 세계가 악화된 모습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국가를 맹비난하는 동안에도 은밀하게 국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후쿠야마의 테제는 널리 조소받아 왔다.

슬라보예 지젝이 도발적으로 지적하듯이 어쨌거나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널리 유포되어 왔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1975년에는 (무력화된 노동 조합, 민영화 된 철도 및 공익 사업을 비롯한) 현재의 정치경제적 풍경을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

녹색 비판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정치 체계가 결코 아니며 사실상 인간의 환경 전반을 파괴할 운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공적 영역이 공격받고 ‘보모 국가 nanny state‘가 제공하던 안전망들이 분해됨에 따라 가족은 항구적인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의 압력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수사가 기세를 떨치던 그 순간에도 새로운 종류의 관료주의, 가령 ‘목표와 목적‘, ‘성과‘, ‘임무 진술‘ 등의 담론은 증가해 왔다.

명백히 비도덕적인 합리성(신자유주의)은 명백히 도덕적이고 규제적인 합리성(신보수주의)과 어떻게 교차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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