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잊힌 퇴조의 출발점 - 자유주의적 전환의 실패와 촛불의 오해
백승욱 지음 / 북콤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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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욱 교수는 1966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동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미국 뉴욕 주의 공립대학인 빙엄튼 대학의 방문 연구원, 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 등을 거쳐, 현재는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진보연대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는 이매뉴얼 월러스틴, 페르낭 브로델, 조반니 아리기 등을 활용하여, 신자유주의가 이식된 세계 체제에 대한 분석을 지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백승욱 교수의 사상적 단초들을 살펴봤을 때, 어느 정도 진보 쪽에 가까운 지식인으로 읽히는데요. 이번에 일독한 그의 논저도 그렇지만, 진보 진영에 뼈아픈 소리를 할 줄 아는 학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난 2022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번 글은 지난 글의 서평을 포함하면 두번째 일독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출간된 '연결된 위기'는 사회학자가 보는 현실주의적 국제 정치라고 볼 수 있었다면 이 글은 1987년 이후의 한국 정치를 비판적으로 조망해보는 일종의 시론과 같은 성격으로 읽힙니다. 특히, 백낙청 교수 등과 같은 기존의 사회학자들이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변곡점으로 여기는 1987년이 아니라, 1991년 즉,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주도한 '3당 합당'과 그 이전의 공안정국을 통한 체제와 이어진 사회 급변을 자유주의적 맥락으로 다뤄 보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우리 사회에 크게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법적 자유주의의 두 가지 이식과 그러한 변용이 과연 서구 자유주의 국가들의 유산인 '전통적 자유주의'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요목조목 따져보고 있는데요.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 나라는 김영삼 정부를 지나 1997년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가 경제 구조로서 거의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착근했던 국가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착근이라는 표현을 착근을 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강한 요인으로 거의 당했다고 풀어보고 싶은데요. 물론 1980년대 이전의 개발 독재 세력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강화를 위해, 이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러한 맥락의 광범위한 사회 개조가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철저히 수행되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런 연유로 일전에 강준만 교수 역시, 우리나라를 "철저한 신자유주의 국가"라고 규정한 바가 있습니다.

일전에 샹탈 무페는 레이건과 대처가 보수 정치의 기득권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이행에 대대적으로 나서면서 이에 대응해야만 했던 진보 좌파의 무능을 신랄하게 꼬집은 바가 있습니다. 물론 무페의 저런 의견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당시의 정치와 사회에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경제와 정치 세력의 '국가 개조'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휩쓸리고, 빌 클린턴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리버럴과 같은 소위 아류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되면서 진보는 거의 몰락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아마도 노조의 무력화로부터 시작된 시민 계층의 전반적인 고용 불안은 이 지점에서 진보가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는데요. 이는 베트남 전쟁 시기의 미국 지식인 계급과 프랑스에서의 진보 계층이 경험한 사회 대안으로서의 점진적 역할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만, 한국은 비록 외부의 요인으로 신자유주의를 국가에 이식하게 된 것이지만 너무 이상하게도 시민들 모두 이 신자유주의적 맥락을 아주 철저히 받아들인 국가였습니다. 이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지배 헤게모니를 인정하고, 능력주의에 기반한 사회 체제의 변질에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인데요. 더욱이 나날이 심각해졌던 고용 문제와 자신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든 불평등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해 받아들였던 점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소위 '먹고사니즘'이 이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000년대까지는 본질적으로 제도적 정치와 시민들 자신의 삶이 현저하게 유리된 상태였다고 진단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 자유주의란 일반적인 인식과는 매우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가 초반에 지속적으로 서술하고 있듯, 시대가 흐를수록 공권력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이것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과 같이 - 이를테면 검찰 - 이러한 맥락의 (제도적) 변화가 어떻게 자유주의와 맞닿아 있는지는 저로서도 의문이 듭니다. 더욱이 저자의 입을 빌어, 과거 박근혜 정권이 탄핵을 당하기 전까지,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완벽한 무능이 4년간 이어진 시기에, 과연 진보 야당이 제대로 일을 해왔는지에 대해선 누구나 진지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무능이 초래한 파급은 문재인 정부 시절의 '검찰총장'이 다음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는 당시 보수 야당이 소위 차도살인 (借刀殺人)에서의 차도 즉, 대상이 된 권력의 칼을 자신의 칼로 삼아, 결국 전무후무한 '차도 정권'이 탄생한 비극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의 명과 암은 바로 이 지점을 먼저 짚어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직 검찰 총장이 이끄는 이번 보수 정부는 거의 민주당이 만들어 준 셈이라는 인과론적 도출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이 글에는 몇 가지 놀라운 부분이 있는데요. 1990년 1월의 삼당합당이 연계된 이후, 박철언과 김종인의 중요한 정치적 역할, 특히 노태우의 오른팔이라고 여겨졌던 박철언의 놀라운 행보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김종인을 오이켄류의 신자유주의자로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기존 언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꽤나 신선한 평가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는 달리, 박철언이 관여하여 소위 '통합 정권'에 대한 공감대를 그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다른 서사는 진위 여부를 떠나 꽤나 놀라운 점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민자당의 탄생에는 여러 정치적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보수 독점적 엘리트 카르텔'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은 이들이 성공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편승해 온 것으로, 권력의 향배나 권력의 이동의 논법들이 본질이 제거된, 그저 언론 지면상에 오르내리는 기사에 불과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상상 밖의 이야기들처럼 말입니다.

끝으로 한국 정치에서 병리적으로 작동하는 '적과 아'의 첨예한 대치 상황은 저자의 분석대로 카를 슈미트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는데요. 이건 약간 첨언이지만, 슈미트가 자유주의에 대해 가졌던 개인적 반감을 고려해 본다면 이렇게 만연된 대결의 정치가 결국 자유주의적 정치 질서를 파괴하는 데 일조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는 법에 의존하지 않는 공익에 대한 공감대를 망각한 시민들에게도 그 원인이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자체가 너무나 무분별하게 정치 기득권 세력에게 오용되었고 자신들 스스로 권력의 의지에 대한 시민 다수의 이해 요구를 넘어서는 무리한 차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자는 자신의 글에서 일관되게 '의지의 정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정치 철학적인 입장에서 이 의지의 정치가 무분별하게 권력을 위해 남용되었고 현실의 산적한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편에 대해 갖는 '정치적 우위'만을 위해 노력한 결과가 정치 체제 전반의 무능을 모두가 일조해서 증명해 낸 것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더욱이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에 있어 정치 전반이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는 부분은 앞으로도 당면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글 중후반부에 '1991년 연표'라는 색다른 기준의 분류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시기의 진보와 통치계급이라는 구분으로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해 놓고 있는데요. 이는 1991년을 경험해 보지 못한 독자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는 요약본이라 여겨집니다.   




현실에서 이런 시도는 성공하기 쉽지 않아 보이며, 그랬을 때 자유주의 헤게모니 수립의 취약성은 ‘영남당‘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은 집권 세력과 ‘포퓰리스트‘에 장악된 민주당 간의 적대적 공생으로, 결국 비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의 득세라는 위기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자유주의(신자유주의를 포함해)에 대한 비난이 일상 언어적 습관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분석을 동반한 자유주의 ‘비판‘으로 나아가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협력을 바탕으로 수립된 자유주의의 전화된 질서로서 새로운 국제 질서, 즉 유엔 안보리를 중심으로 한 전쟁 억제 체제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고 보인다.

논의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이전으로 퇴행하게 되면서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주의 논쟁 자체가 불가능해지며, 즉 그것을 차단하게 된다.

책을 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지식인은 과도할 정도의 이론적 비관주의를 유지해야 하고 그것이 지식인의 사유의 건강함을 유지시킨다.

문재인-민주당 집권 세력이 정권을 상실하게 된 것은 언론과 공안 권력 두 세력을 완전히 자기 통제하에 두지 않으면 몰락한다는 심각한 강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김종인은 김재익 사단의 긴축, 안정화 정책이 결국 인플레이션 압력을 지연했을 뿐이고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10년간 방기해 낙후시켰으며 재벌 개혁의 시기도 놓쳤다고 비판한다.

87년 체제의 핵심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제기됐던 사회적 요구와 갈등이 대표되고 통합된 것이 아니라 배제됐다는 점, 따라서 기성 정당이 중심이 된 보수 독점적 엘리뜨 카르텔의 구조가 복원됐다는 점이다.

긴 시간을 지나고 나서 1991년의 질문을 제대로 짚고 가지 않는다면, 한국에서 정치 관념으로 추방과 검거, 시해 셋 말고는 어떤 담론도 등장할 수 있는 지금, 벗어나기 힘든 미로에 갇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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