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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 - 돈, 민주주의, 그리고 케인스의 삶
재커리 D. 카터 지음, 김성아 옮김, 홍춘욱 감수 / 로크미디어 / 2021년 10월
평점 :
재커리 D. 카터는 전직 기자 출신으로, 현재 휴렛 재단의 경제 및 이니셔티브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철학과 정치를 전공했습니다. 과거에 허프포스트의 선임 기자로 10여년을 재직한 그는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 당시, 투자 은행 들을 담당하는 기자로 일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경력을 갖고 있는 저자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복잡하고 난해한 금융 규제 정책이라는 본질, 모기지 사업을 통해 소비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업계의 탐욕과 전세계적으로 무분별하게 부채가 쌓이도록 사실상 허용한 연준과 기타 정부 기관의 실패 등입니다. 사실 이는 민주주의 체제에 있어 지속가능한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해 분명히 검토해야만 하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경제학과 그 범주 안에 속해 있는 지식권이 '시장'에 대해 갖는 배타적 인식을 고려해 본다면, 이 사회에 저자와 같이 사고하는 인물들의 필요성은 충분히 공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Price of Peace"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극적인 만남 만큼이나 현재 경제학계의 케인지언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의 관계는 다소 대립적이면서도 불명확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세계 경제 학계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담론이 주류임은 먼저 밝혀야겠지요.모두가 오해할 수 있겠지만 케인스 역시 '시장의 자유'를 신뢰했습니다. 다만 자신의 시대를 통해 '자유 방임주의'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아주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는데요. 초기 케임브리지에서의 다소 철학자와 같은 사고 방식과 그런 삶을 긍정적으로 지향했으면서도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던 케인스는 참으로 다사다난한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더욱이 E. H. 카와 마찬가지로 격동의 시대를 거쳐갔고 때론 중요한 정치 행위자로 참여했던 케인스 개인의 삶의 여정은 참으로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청년기에 그가 버틀란드 러셀에게 영향을 받은 것과 양성애자로서, '남성 애인'과 애정 행각을 벌이는 장면이 드러나기도 했는데요. 이는 얼마간 단호하고 타협을 모르는 경제적 개입주의자로서의 이미지와 상당히 매치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전환의 시기에 그가 대영 제국과 영국 경제계를 비롯,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으로 인식되고 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끼친 적지 않은 영향 등은 우리가 역사와 또 다른 일면의 자본주의적 역사에서 그를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젊은 시절, 그가 속한 '블룸즈버리 그룹' 혹은 '블룸즈버리 세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명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던컨 그랜트와 레너드 울프, 버지니아 울프, E.M. 포스터, 리튼 스트레이치 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케인스 자신 뿐만 아니라 당시 소위 영국의 엘리트 지식인들인 케임브리지 대학의 남성들과 킹스 칼리지의 여성들이 함께한 일종의 사적 교류 모임이었습니다. 이들은 종종 함께 모여, 예술과 철학, 영국 정치에 대해 토론과 의견을 교환했고, 특유의 엘리트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일종의 기준점을 삼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를테면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지지와 귀족주의적 태도와 비슷한 사회 인식 등을 포함해서 말이죠.
특히 카터의 이 책에서는 제가 평소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버지니아 울프의 개인적 면모 등을 접할 수 있었는데요. 더욱이 1941년 3월, 그녀가 비극적 선택을 감행하게 되는 날의 일화에 있어, "오우세 강둑에서 그녀의 모자와 지팡이가 발견되었고, 그녀의 남편 레너드는 집 안에서 그녀가 남긴 쪽지를 발견했다"면서, 그 비극적 소식을 접한 케인스의 비통함도 엿볼 수 있습니다. 케인스와 그의 아내인 리디아, 그리고 앞선 울프 부부와의 각별한 유대는 비록 이 블룸즈버리 그룹 내에서 어느 정도 부침이 있긴 했지만 사인인 측면에서 케인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적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처음으로 명성 다운 명성을 안겨준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에 관여했던 행위자로서의 주요한 의견이 담겨 있습니다. 패전한 독일 제국에게 막대한 배상을 안기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강조한 케인스는 그 이후에도 런던과 뉴욕이 경제적 호황을 통해, 부를 쌓고 있는 상황에, 유럽인으로서 어느 정도 부채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오로지 배상금 때문에 독일에 금융 혼란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재앙에 강력한 촉매제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는 문장으로 그의 고민을 가늠해 볼 수 있기도 한 데요. 이후에 벌어진 프랑스의 불법적인 루르 지대 침공과 이를 통한 독일에 대한 직접적 압박은 다수 독일인들이 프랑스와 영국에 대한 증오를 쌓게 되고, 더 나아가 독일 정치가 비이성적인 선동가의 손아귀에 포획되는, 그야말로 불행한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 점은 지난날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협상'에서의 프랑스가 보인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어, "반드시 독일을 손을 보고야 말겠다"는 압박과 더불어, 결과적으로 우유부단했던 미 윌슨 대통령의 정치적 무능까지 이어져, 전후 처리 자체가 결국 전쟁의 불씨를 남기는 파국으로 이어졌습니다 . 이 책의 3장 이후에 보여지는 우드로 윌슨의 노련하지 않은 국제 정치적 감각과 닳고 닳은 영국 정치인들의 요구에 마땅한 대처를 하지 못하는 미국의 외교의 난맥상 등은 애초에 윌슨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갖고 있던 케인스에게 이와 같은 '평화 협상'은 현실과 이상의 그 괴리를 실감하게 된 것인데요. 이후에 2차 대전 종전 후, 세계 경제 체제의 큰 변화를 초래한 화이트와 케인스의 지리멸렬한 협상도 바로 이러한 연장선 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시티 오브 런던이 주도하는 '금본위제'는 영국의 경제 뿐만 아니라 유럽과 전세계를 규정하는 경제 시스템이었습니다. 대전 시기에 급격하게 발생하는 인플레이션과 그 전쟁 수행 과정에서 필요한 채권과 자금을 융통 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도입하게 되면서 영란 은행의 금본위제는 본질적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제한적인 시기에 재무부를 총괄한 처칠이 과거의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다소 회의적으로 평가했던 케인스의 이 선견지명은 후에 옳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분명 정치적 셈법이 존재했으나 그래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로이드 조지와의 협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 케인스는 자신의 일생에서 큰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바로 이 즈음에 그의 유명한 제일 주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영국에서만 초간 5천부가 순식간에 완판되기에 이릅니다. 1차 대전의 전후 협상에서 실로 큰 실망을 맛본 케인스는 자신의 이 논저를 통해, 협상 막후에서 무능을 보인 영국 정부와 비협조적이었던 프랑스에게 다소 비판적 입장을 취하게 되는데요. 또한 윌슨의 가히 진보적인 프로젝트였던 '국제 연맹'이 미국 스스로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하지 않음으로써, 대통령의 정치력 붕괴는 물론 전 유럽의 불행한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이 케인스가 영국을 지배했던 '자유 방임주의'가 역사의 뒤안길로 쓰러져 갈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배경으로도 읽힙니다. 제국주의적 경제 체제 하에 가공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던 당시 영국이 급격했고 너무나 비참했던 대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점은 - 물론 그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 그저 '시장의 자유로운 거래'만으로는 당시의 위기를 헤쳐나가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는 케인스 스스로의 성찰과도 맞닿아 있다고 여겨집니다.
연이어 세계를 뒤흔들었던 세계 대공황은 본질적으로 당시 미국 증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자금이 뉴욕에 몰리고 있던 당시는 버블에 대한 관념이 무지했던 시기이기도 했는데요. 모건을 비롯한, 뉴욕을 좌지우지 하는 부자들이 자시들의 자금을 통해, 며칠 간의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결국 '검은 목요일'과 '검은 화요일'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케인스가 당시 후버 대통령에게 간접적으로 조언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금융시장의 변덕스러운 동요가 새롭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미국의 사태는 충격적이었다"고 저자는 이처럼 케인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어진 4년 간의 가혹할 정도의 불황은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유럽의 독일인들에게 까지 그 여파를 끼치게 되는데요. 결국 이 붕괴를 통해 케인스는 '화폐' 자체에 대한 재인식에 몰입하게 되고, 이는 다음 논저를 탄생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이 시기의 성찰을 통해 케인스는 "경제 침체가 정말 심각할 때는 정부가 자체적인 공공사업 프로젝트를 주도해 국내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는 소위 큰 정부의 개입을 기반으로 한, 최초의 시장에 대한 자구책을 도출하게 됩니다. 또한 이 이론은 케인스의 야망, 즉 고전주의 사상의 기본 교리를 재고하라는 호소까지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케인스의 화폐 이론에 대해, 밀턴 프리드먼의 반박과 이후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 등은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지없이 토론의 주제가 되고 있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지점에서 케인스가 가장 고려했던 부분은 그가 경제학자 이전에 버틀란드 러셀과 비트겐슈티인에 영향을 받은 철학자였기에, 스스로 엘리트주의자였지만 일반 노동자 계급의 처우와 이들이 기반이 된 사회 경제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부분인데요. 이는 영국의 철학적 유산이 된 데이비드 흄의 도덕 철학과 이를 바탕으로 소위 영국적 계몽주의가 번성시킨 '자유주의적 토대'가 명사 케인스에게 있어서도 사회를 해석하는 중요한 인식적 맥락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히틀러의 과도한 망상이 유럽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진 2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연합국의 전후 처리 과정은 그 자체로 루스벨트 시대의 종언을 초래하게 됩니다. 물론 그의 남은 임기를 트루먼이 승계합니다만 "세계 민주주의 보루"라고 자처했던 루스벨트의 선명성에 어느 정도 동감했던 케인스에게도 지난 시절과는 완전히 변화된 세계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국내적으로 쿠데타 위협과 반대 세력의 꾸준한 공격을 받았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실로 굳건한 의지의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스벨트와 케인스의 서신 교환을 비롯한 두 인물의 깊은 교류는 당시 정치에서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았습니다. 과거 1919년 전후에도 케인스는 무역에서의 보조금과 전쟁 부채와 배상금을 모두 없애버리고, 채무국들이 지고 있는 그 밖의 외채에 대해서도 3년 간, 국제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전체적인 시스템 개선에 일관된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케인스의 또 다른 주저라고 볼 수 있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은 명백히 "자본이 가진 희소성의 가치를 악용해온 자본가들의 누적된 압제의 안락사가 벌어진다"는 측면의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예견한 것이기도 한 데요. 이는 좀 더 폭넓은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던 케인스와 그의 반대편에 있던 시장 자유주의자들 혹은 자본가들의 공격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이는 오늘날 케인지언과 시장 자유를 긍정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그것을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의 대척점과 유사해 보입니다. 일견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전통적인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이 꾸준히 거부해 왔으나, 저 개인적으로는 2008년 이후, 앞선 인식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시 붕괴한 금융 시장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막대한 공적 자금을 수혈 받은 상황에도, 기존 신자유주의자들의 이중적인 작태인 '대마불사'는 기존 체제의 명백한 이중성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케인스의 사후, 그의 이념적 후계자로 읽히기도 했던,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그런 갤브레이스와 밀접했던 존 F.케네디의 시대를 언급하며 카터는 일종의 보론으로서, 글의 후반부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루스벨트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 매카시즘의 광풍이 일었던 과거 미국 정치의 단면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만듭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과가 최초로 개설된 이후, 케인스주의적 맥락을 기반으로 탄생한 적절한 시장 개입주의와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대표적으로 '자유 시대', '자유 시장'을 옹호했던 정치적 신자유주의는 현대사의 헤게모니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 케인스에 대해 냉소했던 하이에크 조차 막대한 돈을 가진 자본가들이 금융 시장에서의 과도한 이익 우려내기가 법의 경계를 넘나 들 정도로 매우 차별적이라는 것을 거의 예견하지 못했는데요. 더욱이 프리드먼도 민주주의를 공공연하게 적대했다는 점에서, 이들 신자유주의적 사조들이 과연 어떠한 인식의 인물들이었는지 우리는 고찰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권력의 지배적 상황에서 이미 전세계적 경제 기조는 한쪽의 우위가 극명한 상황이라, 소수의 케인지언들 만으로는 자유 시장 담론에 어떠한 개선된 조언을 건네기가 너무나 어려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상적 차원에서 이론적 변형과 변조는 너무나 쉽게 일어나는 점이어서, 학계 전반의 명실상부한 전통적인 케인지언은 꽤 찾아보기가 힘들어진 것도 분명합니다. 저는 단순하게 케인지언과 신자유주의의 대결 구도와 같은 구분만으로 현시대를 규정하는데 있어 매우 제한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보다는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구조적인 경제적 불평등이 초래하는 사회적 문제와 이렇게 폭력적으로 귀결된 사회정치적 맥락이 민주주의를 더욱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끝으로 저자인 카터는 자신의 글에서 몇 번이나 케인스가 에드먼드 버크와 장 자크 루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왔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를 달리 해석해 보자면, 케인스가 보수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시민과 민주주의를 위해 보다 유연한 사고를 견지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어법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일전에 질베르 리스트가 강조한 바대로 경제학과 그들이 추종하는 시장에 대해 우리가 경직되지 않고 좀 더 유연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데요. 더욱이 자본가들 역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어떤 누구보다 자신들이 큰 이익을 거두고 있다는 점을 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일전에 케인스가 제국주의 종언의 시기에서, 더 이상 자유 방임주의가 설 지점을 잃고 있다고 선구저적 시점으로 바라본 것처럼, 우리에게 있어서도 무분별한 시장의 합리주의 또한 거듭 시대가 요청하는 바대로 개선과 전환의 시도가 필요한 때라고 여겨집니다.
- 카터의 이 책은 전반적으로 양차 대전을 비롯, 어느 역사적 배경에서의 기본 지식과 초기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금본위제와 근대적 주식 시장, 제국주의적 경제 체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배경지식이 있어야 보다 수월하게 일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드로 윌슨 이후의 미국 국내 정치에 대한 기본적 지식도 요구됩니다. 그럼에도 번역이 잘 되었고 특히 개인으로서의 케인스의 행적과 현실 정치에서 그가 겪은 무거운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은 글의 특별한 장점으로 생각됩니다.
-본문에 하이에크가 주도한 몽펠리에 소사이어티가 몽펠르랭, 몽펠레린 등으로 용어 일치가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소설가, 화가, 철학자, 시인, 미술 비평가들로 구성된 이 사교집단은 자신들을 블룸즈버리 세트라고 불렀는데, 이는 런던 근교의 지역 이름을 딴 명칭으로 이들은 모여 살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티파티와 디나파티 자리에서 서로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개인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젊은 시절 케인스는 이런 제국주의적 상황을 도덕주의적 딜레마가 아닌 현실로 받아들였다.
윌슨은 대전의 승리자 중 유럽이 자초한 대혼란이 재발되지 않도록 국제연맹이 외교력을 발휘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비전으로 제시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의 독특한 민주주의적 이상에서 대중의 안녕은 엘리트들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편익적 요소였지만, 대중 자체는 진정시켜야만 하는 위험 요소였다.
런던의 고위층은 런던이 전쟁을 겪으면서 월가에 넘겨준 금융 파워를 되찾으려면 영국에 투자하는 것이 미국에 투자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자유방임주의로 선한 결과를 낳을 수 없다면, 다시 말해 번영을 폭넓게 공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결합한 이념적 연합은 불완정해질 것이다.
9월 14일에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은 640만 표와 107석의 의석을 확보하여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동시에 분열된 독일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정당이 됨으로써,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케인스는 당시 독일이 총 2억 파운드를 뉴욕 은행들에 빚지고 있었고 그중 맨해튼에 있는 5대 은행에 각각 갚아야 할 돈이 평균 2천만 파운드 이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스벨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와 세계평화의 향방은 저도 깊이 우려하는 바입니다. 선생도 동의하겠지만 자국의 발전은 미국이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 가장 효과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카고대학의 젊은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은 연방정부는 돈을 새로 발행해서 적자 비용을 조달하는 한편 완전 고용이 이뤄졌을 때에만 예산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미국 경제학자들은 연준이 1920년대의 통화 정책과 영국에 대한 원조 활동에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다고 믿었다.
자유당이 1924년 선거에서 전멸하자 윈스턴 처칠은 몰염치하게 당적을 바꿔 스탠리 볼드윈 총리 휘하 새 보수당 내각의 재무장관 자리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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