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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너 자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평점 :
이디스 워튼은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뉴욕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는 전적으로 그녀에게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축복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녀가 4살이 되던 해에 가족을 위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고 이미 어린 소녀 때부터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런 재능을 바탕으로 그녀는 1921년에 장편인 '순수의 시대'로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가 됩니다. 워튼은 40세가 될 때까지 첫 소설을 출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봤을 때, 꽤 생산적인 이력을 쌓게 되는데요. 총 15편의 장편, 7편의 중편, 85편의 단편을 제외하고도 여행, 문학 및 문화 비평, 회고록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그녀의 대표적 중편 소설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이 작품은 1916년에 최초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9월, 초역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워튼의 이 작품을 읽기 전에,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완독 후에 들었던 감상은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우선은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인 앤 엘리자의 심리 변화, 내면의 갈등 그리고 스토리상 중요한 변곡에서의 치밀한 감정 묘사가 너무나 인상 깊었는데요. 더욱이 안온하고 평범한 일상에 어떤 전환과 변화를 바라는 사람의 기대를 일방적으로 배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행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마치 평범한 일상 자체가 누구에게나 진정한 행복일 수 있다는 일종의 분석은 '인간의 삶'이라는 본질에 대해 새삼 겸허히 숙고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앤 엘리자와 에블리나, 즉 이 버너 자매는 당시 뉴욕에서 터를 잡고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 갑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회의감을 갖고 있는 앤은 자신의 동생 만큼은 결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데요, 다만 이 두 자매 모두,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없는" 젊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언니인 앤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자포자기의 심정까지 갖고 있었는데요. 그러다 우연찮게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독일 이민자 출신의 '시계공' 허먼 래미였습니다. 독일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래미는 그녀들에 의하면 당시에 보기 힘든 소위 '교육을 받은'사람이기도 했는데요. 아무래도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그녀들의 입장에서 교육의 문턱을 넘은 이성의 존재란 그만큼 특별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당시 미국은 초기 자본주의 사회와 유럽의 계급적 문화가 뒤섞인 상태로 독일 태생의 래미는 그 존재 자체로 그녀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 겁니다.
여기에 래미는 신체가 다소 병약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좀 시원찮아 보이고 더욱이 잔병을 달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기도 한데요. (물론 이 부분은 후에 충격적인 반전으로 드러납니다.) 이 자매에게는 이렇게 홀로 지내는 가여운 남자의 모습이 어떤 모성애를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극에서 신중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고 자신의 어투에 신경을 쓰는 앤 엘리자와 약간 직선적이기도 하지만 소탈하고 마음 씀씀이가 있는 에블리나는 남자 주인공인 래미와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캐릭터인데요. 그의 어색한 독일식 억양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에게는 그것조차 색다른 인상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인물 설정이 어떻게 보면 후반부에 작가가 의도한 파국의 전조로도 읽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인간적 호감을 받는 이성에게 보다 냉정한 판단을 하기 어려운 부분도 어떻게 보면 남녀 관계의 여러 본질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예전에 먼 발치에서 어느 연애 칼럼니스트가 남자친구에게 좀 더 수월하게 결혼 고백을 받을 수 있는 소위 치밀한 방법들을 적은 문장들이 떠오르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여성에게 고백과 결혼은 감성적인 측면에서 새삼 자신의 존재를 내면에 각인시키는 일종의 열망으로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아는 남성에게 한번도 변변한 고백을 받아보지 못한 여성은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괴감이라든지 혹은 절절하게 느끼는 초라함이 의외로 문학적인 방식으로 쓰여지기도 하는데요. 물론 앤 엘리자가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고백이 제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인식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 장면에서 뜻밖의 생경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도 이렇게 고백을 받을 수 있는 여자다'는 감정적 충만감보다는 먼저 동생인 에블리나의 관계를 좀 더 이성적으로 고려했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대목에서 더욱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 같은데요. 또한 후반부에 드러나는 래미의 실체를 고려해 봤을 때, 앤이 그렇게 아끼는 자신의 동생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만들었기에 두 사람에게 가해지는 그 같은 불행이 어쩌면 보다 비극적인 차원으로 발현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됩니다.
워튼의 이 작품은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게 돈과 지위가 없는 계층의 사람들의 삶은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의 고언을 다시금 증명해 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저 평범한 삶이라도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그런 판에 박힌 교훈을 독자들에게 주려고 워튼은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겉으로 나마 관계로 인식되는 어떤 한 인간의 본질은 그만큼 불확실성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철학적인 관념과 함께 동시에 그로 인한 예기치 않은 가족의 붕괴는 그것의 구성원 모두를 직접적인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현실 자체가 얼마나 냉혹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 현인들이 "네가 너의 인생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삼으라"고 조언했던 건 바로 그런 연유일 겁니다. 제가 워튼의 이 중편을 읽으면서 비통했던 점은 사랑하는 가족의 고통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당시 인간의 사소한 결정으로 비롯될 수 있다는 경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사를 부여된 이성으로 매번 가늠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워튼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래서 워튼의 이 소설은 꽤나 오랫동안 제 기억에 자리를 잡을 것만 같습니다.
래미 씨는 세상에 자기 혼자 뿐이라고 했고, 그녀가 아는 한 외로운 남자들은 먼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여태껏 수정처럼 맑은 그녀의 영혼 안에서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계획은 한번도 구체화된 적이 없었다.
입을 벌리고 웃자 줄지은 누런 잇새로 한두 개 빈틈이 보였다. 하짐만 앤 엘리자는 그런 빈틈을 보고도 그의 미소가 무척이나 유쾌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에블리나의 사랑을 위해 심부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알기에 혈관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한방울의 젊음마저 메말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껏 스스로 만들어 온 삶이 영원히 그녀에게서 사라지고 있었다. 좀 더 심오한 내적 의미에서 보면 동생과의 유대감은 이미 사라졌고, 겉으로 보이는 친밀함, 목소리와 눈빛으로 주고받던 외적 교감도 곧 사라져 버릴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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