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Philos 시리즈 23
네이딘 스트로슨 지음, 홍성수.유민석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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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딘 스트로슨은 미국 뉴저지주 저지시티에서 이민자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독일 태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대인인이었는데요. 특히, 그녀의 모친은 히틀러의 인종법에 따라 반 유대인 (Halbjude - 지독한 인종혐오적 단어지만 당시 나치의 실상을 밝히는 측면에서 굳이 삽입하게 되었습니다.) 으로 지명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1972년 하버드 대학에서 예술학사와 1975년에는 동 대학 로스쿨에서 우등의 성적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졸업 후 스트로슨은 9년 동안 미니애폴리스와 뉴욕에서 변호사로 일한 뒤, 1988년 사립 로스쿨인 뉴욕 로스쿨의 법학 교수로 2019년까지 재직하게 됩니다. 또한 그녀는 1991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시민 운동의 풀뿌리 단체인 '미국 시민 자유 연합 (ACLU)'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요. 이는 ACLU를 이끈 최초의 여성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이 책은 원제, "Hate"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번역 작업은 두 명의 학자가 공저자로 참여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는 일전에 읽은 제임스 Q. 위트먼의 '히틀러의 모델, 미국"을 기반으로 '인종 혐오, 이민자 혐오 등'을 비롯한 법적인 차원에서의 '혐오금지'에 대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출간된 스트로슨의 이 논저를 일독하고 나서, 앞선 제 생각을 상당히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르포르타주가 가미된 현실적인 논고이기도 한 데요. 더욱이 저자는 분명한 법조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독자들과 사회에 설득시키기 위해, 캐나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의 혐오금지 사례를 수차례 인용하면서, 국가와 사법 당국이 시민들의 혐오표현을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현실을 일관된 논법으로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런 저자의 주장에 대한 논리적 결론은 9장 후반부에 "혐오금지법은 그러한 해악들을 실제로 줄인다는 것을 차치하고서도 혐오표현금지법을 거부해야 하는 몇 가지 독립적인 이유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중요한 맥락은 극우 단체나 인종혐오적 편견에 빠져있는 일부 인사들의 소위 '입을 막는 행위'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반대로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고하기에 이릅니다.

1977년 미국 일리노이 주, 스코키(Skokie)에는 총 7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거주민들 중 3만 명이 유대인이기도 했는데요. 바로 이 곳에 네오 나치들이 집회를 열고자 했는데 스코키가 이를 사실상 불허하자, 네오 나치들이 스코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이 네오 나치들을 대리한 집단이 바로 ACLU 였습니다. 미국은 건국 이후, 신성시하는 자신들의 헌법을 통해, '시민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철칙을 갖고 있는 국가입니다. 이를테면 집회, 결사의 자유는 물론 이를 아우르는 표현의 자유와 더 나아가 '총기 소유의 자유'까지 미국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의지'는 그야말로 남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저자인 스트로슨은 자신의 논저에 이 '스코키 사례'를 몇 번이나 인용하면서 이들 인종차별주의자들이자, 극단주의자들인 네오 나치들의 입을 법으로 막으려 든다면, 역으로 권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시민들이 정치나 정치인들을 마땅히 비판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중요하게 여기는 평등의 가치가 가시적으로 무력화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4장에서는 외형상 발전되고 견고한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에서조차 무분별한 '혐오금지법'이 대다수 시민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는 우려스런 사례들을 상당수 인용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5장 후반부에서 저자는 "미국연방대법원이 표현의 자유는 사람들을 화나게 할 때 그 높은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밝히고 있었는데요. 어쩌면 이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미 연방대법원의 평범하지 않은 수사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저도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속으로 음미해 볼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견고한 법조인이자 법학자인 저자가 일부 계층의 '인종 혐오','이슬람 혐오' 표현 등을 그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치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대항 표현'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고, 8장에서 이것의 사례로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등에서 보였던 유머 전략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백인 권력 (white power)라는 피켓을 들고 행진하는 소위 인종적 극우주의자들에 맞서, 반대 시위대들이 "아내 권력 (wife power)", "흰 밀가루 (white flour)" 등으로 유머러스하게 대응했던 사례였습니다. 바로 이런 '유머 시위'가 앞선 극우 집단의 인종적 특권 시위의 효과를 둔화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또한 이와 같은 편견에 대한 집단 간 대화가 지금보다 더 많이 행해져야하며, 교육의 결핍이나 상식의 전무로 무비판적으로 '인종 혐오'에 나서는 시민들을 스스로 '개심'할 수 있도록 사회와 대학이 나서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논점은 7장에서 혐오 표현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요. "혐오표현은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차별과 혐오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사회정의 운동에 참여하도록 활력을 불어넣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사실상 긍정적으로 평가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혐오 표현 금지라는 문제에 대해, 스트로슨은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상을 인용하며, 이 혐오표현금지법이 과연 유럽에서 극우의 등장과 인종적 편견을 감소시키는 데 어떠한 실효적 역할을 하고 있느냐 반문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혐오표현금지법이 차별 및 폭력의 감소와 무관하다는 것은 놀라운 아니다."라고 인정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데요. 나치에 대한 찬양을 엄격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프랑스조차 폭력적 극우 세력의 등장을 이 혐오표현금지법이 제지하지 못했으며, 독일의 경우는 네오 나치들이 유대인과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아주 직접적인 폭력을 유발하고 있지만, 앞선 혐오표현금지가 이러한 무자비한 폭력에 거의 무능했다고 보는 편이 아마도 합리적일 텐데요. 또한 캐나다에서 벌어진 혐오 표현을 한 자와 그것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의 소송이 법적으로 지지부진했고, 그것에 대한 피해자들의 만족할 만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저자는 그 과정을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이 부분도 혐오 금지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고찰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기존의 혐오 표현을 반대하는 시민 단체들의 근본적인 문제 제기 중 하나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 자신의 행동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 자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믿는 자와 같은 부류들이 인종 혐오와 여성 혐오 혹은 이민자들에 대한 집단적 반발심 등"이 폭력으로 나아가기 전에 이를 방지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그 해결 방안이 미지수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아마도 저자의 생각은 그와 같은 폭력에 대해선 국가가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정석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 다음 세기까지 극도의 편견으로 인한 차별과 혐오를 각 사회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정치 분열 수준의 정도가 아니라 정치 전반이 아예 붕괴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더욱이 자본주의가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극명한 불평등 문제를 최근 프랑스에서 보였던, 굴절되고 비틀린 행동으로 그것의 화살을 전적으로 이민자들에게 돌리는 행위는 사회를 파국으로 이끌 가능성이 높은데요. 이런 양 측이 적대하는 시위에서 일방적으로 이민자들이 집단 린치를 당하고 더 나아가 인명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유럽에서 폭력적 민족주의가 다시금 나타나거나, 경제 권력을 손에 쥔 파시즘이 또 그곳을 휩쓸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과거 나치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이들이 너무나 쉽게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방해 없이 해왔던 점이 유럽에 큰 파국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는 일찍이 조지 오웰이 경고했던 것처럼 혐오 문제를 들어 정부와 기득권이 다수 시민들의 입을 막고, 민주주의 헌법 하의 '정치적 신념과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점을 마찬가지로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나 시민들이 자기 검열에 빠져 하고 싶은 발언을 할 수 없는 처지로 이르는 것을 사실상 민주주의의 후퇴로 보는 듯했습니다. 더욱이 법적 조력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권력층과 정치인들 및 부유층의 권리는 자신들의 자원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지만,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은 기본적인 양심을 법과 사회로부터 충분히 보호 받지 못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은 어쩌면 끔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 아무 가치도 없는 '혐오 표현' 자체를 법이 규제하기에 이를 때, 시민들의 비판을 달가워 하지 않는 일부 정치인들이 숨겨진 의도로 소송을 통해 이를 막을 수도 있다고 보는 논리적 전개는 충분히 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저는 이러한 아이디어에서 사법부의 판사들을 입법 자체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처럼 민주주의는 철저하게 권력을 분리하고 견제하는 것 자체가 다수 시민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기 위한 전제라고 다시 한 번 유념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2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책 값이 저렴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편집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은 큰 실망이었습니다. 

-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와 역자의 대담이 실려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현안 문제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질문을 역자가 스트로슨 교수에게 건네고 그에 대한 상세한 답변을 일독할 수가 있었는데요. 확실히 미국의 법학자는 근본적으로 법에 대한 인식이 시민의 권리와 비교해 봤을 때, 차이가 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귀한 읽을 거리였습니다.   

-저자가 글 초반에서 밝히는 '사상의 시장'이라는 언급은 충분히 신선했는데요. 저자는 법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사회학적인 측면에서도 이 형모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논지의 설득력 측면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포용성은 인기 없는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하며,특히 생각을 가장 자유롭게 방송하고, 토론하고, 논쟁해야 하는 대학에서 확대되어야 한다.

미국연방대법원은 2011년 사건에서 앞의 수정헌법 제1조 원칙을 강하게 재확인하였는데, 여기서 미국연방대법원은 개인에게 극도로 상처를 주거나 모욕적인 표현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했다.

정부는 표현이 구체적이고 즉각적이며 심각한 해악을 직접적으로 끼칠 때에만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극우" 및 유사 단체의 시위에 직면하여 고무적으로 분명해졌다. 우리는 혐오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규탄하고 평등, 포용성, 집단 간 화합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헌신을 축하하는 놀랍고 초딩적인 표현과 평화 집회가 쏟아지는 것을 목격했다.

혐오표현금지법들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기 때문에, 고소인과 집행 당국의 주관적 기준에 따른 집행이 필연적이다.

탐탁지 않거나, 불온하거나, 두려움을 주는 생각을 잠재우고자 정부가 힘을 행사하면 자유와 민주주의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혐오표현금지법에 생명을 불어넣는 평등이라는 목표를 전복시킨다.

그러나 혐오표현금지법은 종종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급한 공공정책 이슈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것, 심지어 정치 후보자들과 관료들의 표현을 조사하고, 기소하고, 처벌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은, 탐탁지 않고, 불온하고, 두려움을 준다는 혐오표현금지법의 대상 자체가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검열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한 법ㅂ적 개념이 예상대로 여성의 평등이나 안전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권한이 없는 집단을 대리하는 표현을 억압하는 데 사용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경고해 왔다.

그것은 국가가 자신의 집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떤 책을 읽어야 하거나 어떤 영화를 하는지 명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별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여성이 미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또한 많은 대학의 학생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남성이 우리 사회의 많은 중요한 영역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소설미디어는 혐오표현에 의해 폄하된 사람들이 건설적인 목적을 위해서 혐오 메시지를 공유하는 것조차도 금지했다.

부활하는 나치즘에 대한 독일 대응의 주요한 문제점은 나치가 너무 많은 표현의 자유를 향유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치가 그야말로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을을 했다는 것이었다.

정부 및 민간 부문 기관은 모든 사회집단 간의 찿별 철폐, 다양성 및 상호작용을 촉진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과소 대표되어 온 집단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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