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 - 민주주의는 어떻게 자유주의 없이도 다양성을 지키며 번영하는가
조사이아 오버 지음, 노경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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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이아 오버는 미국내에서 저명한 고대 그리스와 관련된 역사학자이자 고전 정치 이론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미네소타 대학을 거쳐, 미시간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에 몬타나 주립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고대사를 가르치다, 현재는 스텐포드 대학의 차코풀로스-코우날라키스 교수이자, 동대학의 고전 및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고대 그리 역사와 철학을 현대 정치 이론과 연계하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그는 현대 민주주의를 아우르는 '민주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지금 소개할 책과도 관련되어 있기도 하지만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Demopolis : Democracy before Liberalism in Theory and Practice"로 지난 201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글의 제목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 저자의 이 글은 '데모폴리스'라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험을 통해,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더불어, 이러한 작업이 현재에도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분석적 논증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지금도 많은 시민들은 자유주의가 관여하지 않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을 겁니다. 또한 의도적인 신자유주의적 작업에 의해, 시민의 삶에서 정치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겠죠. 하지만 아주 표면적으로 관찰해본다 하더라도, 고대 아테네부터 시작된 민주주의의 역사는 인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정치적 유산임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저자는 대다수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번영(경제적 번영을 포함한)과 이들을 위한 안전한 삶에 대한 욕구, 더 나아가 인간 존엄과 평등 그리고 자유를 우리 민주주의가 지난 역사를 통해, 충분히 보장해 왔다는 점을 증명하는데 글 전반에서 이를 논증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과거에서 전통적인 자유주의는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분석한 바와 같이, 기본적인 도덕주의를 비롯, 공동체 인식에 대한 필요성까지도 포함했던 것으로 인식되는데요. 하지만 오늘날의 이 (변형된) 자유주의가 시민들의 삶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공공재와 이를 위한 기본적인 정부의 필요성 등을 부던히 공격해 왔던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의 자유주의가 모두를 위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자들이 민주 정치 하에 그렇지 않은 다수의 하위 계층에게 참정권이라는 명목으로 발목을 붙잡히지 않도록 최소한 반세기 동안 고도로 고안되어 왔다는 점은 이것이 '날 것'과 같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일 겁니다. 이는 지지 파파차리시가 소개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에 위배되는 본질적인 측면이라 볼 수 있을 텐데요. 이 부분에도 저자 역시, 글의 7장에서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자기 통치를 위한 제도와 그 실천'에 있어, 어떻게 하면 엘리트 독점을 방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심은, 기본적이면서 선언적인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한 헌법의 개념들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부합하고 보장될 수 있을 것인가를 심층적으로 고찰해봐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록 변질된 자유주의가 이를 기피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주된 목적과 다름없는 2장의 서두는,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정에 대한 정치 이론이 그저 유토피아적이거나 또는 다른 식으로 이상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고 현실성을 갖추려면, 반드시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점은 보수주의자들이 정말 흔하게 말하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문구에서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는 식으로 간혹 해석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사회정치적으로는 다소 별개의 관념이고, 지금처럼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에 사실상 봉사하는 형태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은데요. 물론 이 점은 엄밀히 보자면 자유주의 때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의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자유주의가 없는 민주정의 비용과 수익을 가장 쉽게 알아보는 방법은 자유주의적 가치가 헌정 질서에서 중시 되기 이전의 한 공동체의 민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시민 사회에서 시민들의 삶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점은, 바로 "안전, 풍요 그리고 비폭정"입니다. 이 필수적이면서 우선적 가치들을 자유주의와 연계해 해석해 보면, 과연 자유주의만으로 안전과 풍요 그리고 비폭정을 시민들에게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로 반문해 볼 수 있을 텐 데요. 물론 오늘날 현대 정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이론 체계들은 그저 단순히 취급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도 분명 존재할 겁니다. 더욱이 자본주의가 체제 전반에 강고하게 자리 잡고 나서는 그 양상이 더 복잡해졌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공화주의에 디소 회의적인 홉스조차도 자신이 옹호했던 군주정과 절대 권력이 과연 시민들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을 아꼈던 사실은, 상반된 시각에서 민주주의는 과연 앞선 자유주의와 어떻게 다를 것인가에 대해 내심 고민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타인을 지배하고 스스로도 지배받는 체제로 요약해 볼 수 있는 데모폴리스 실험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당위이기도 한 앞선 3가지의 사활적 가치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저자의 일관된 논증 가운데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도 이론적인 고찰을 진행합니다. 따라서, 3장은 바로 이러한 내용들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민주정의 필요조건이기도 한, "정치적 자유, 정치적 평등, 시민적 존엄"은 결국 현실적인 시민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됩니다. 전제 정치나 절대 권력에 의한 폭정을 방지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평등 임을 감안해 본다면 '모두가 모두를 지배하는' 정치적 참여를 막는 빗장을 방지하고, 이렇게 규명된 체제 전반을 시민들이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하는 '교육의 필요성'으로 4장까지 논증은 이어집니다. 물론 민주주의 체제가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정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면밀한 정치적 작업이 필요하기도 한 데요. 사회적으로 용인된 공공재에 대한 접근의 문제에 있어 어떻게 시민들을 규율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고, 정치적 공동체와 이를 기반으로 한 민주정 전반의 필요성은 시민들이 최소한의 의료와 먹거리 및 주거를 지원할 책임이 사실상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점으로 더불어 인식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보장을 위한 정부의 책임과 그 필요성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시민 모두가 노력해야만 하기 때문인데요. 결국 저자의 논법대로 민주정 자체가 모든 시민들의 건전하고 자발적 참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치하는 대전제와도 여실히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6장에서 도출되는 힘이 없는 사회적 하위 계층의 참정권이 엘리트 지배 체제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비대칭적 권력화하라는 반민주주의에 있어, 시민이 끊임없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7장 후반부에 '시민들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된 부분은 이를 달리 해석해 보면,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민주정이 기반하고 있는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인정과 보장을 우리 모두가 이를 명백히 자각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와 관계된 민주주의 체제 하에 자유와 평등의 그저 터무니 없는 긴장은 가벼운 문제만은 아닙니다. 물론 극단적 자유 지상주의와 극단적 평등주의라는 양 극단의 문제는 당연히 인지할 필요가 있겠죠. 특히나 부권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극단의 평등 그리고 자유 시장 자유 지상주의 Free Market Libertarianism 이라고 사실상 해석되는 자유 지상주의는 끝내 민주정의 좋은 점들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신자유주의자들이 거의 자유 지상주의자들과 다름없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공동체에 대한 인식, 시민들이 가져야 할 도덕률 그리고 사회 부조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들이 역시나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지극히 꺼려하는 점이라는 부분의 해석은 거의 명백한 편입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겠지만 자유 지상주의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일련의 주장들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반해 있는데요. 하지만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적 합의틀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어쩌면 대치될 수도 있겠지만 맹목적인 자유 지상주의를 여느 다원주의적 시각에 부합하는 고유한 사상으로 취급해야 될지는 어쩌면 토론이 있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종래의 데이비드 런시먼의 평가대로 민주주의가 겉으로는 불안해 보이는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내실은 안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은 민주주의의 이점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결국 우리가 인식하는 자유라는 개념이 그동안 꾸준하게 많은 화자의 발언대로 각광을 받아왔던 반면에 또다른 민주주의적 가치인 평등은 그렇지가 못했는데요. 저자가 잠깐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혁명의 기운'이라는 것에 착안해, 터무니없는 이념으로 몰아세워 평등 자체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무언가로 몰아온 작업들 자체는 다소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와 그것을 떠받치는 능력주의가 한 팔을 거들었던 것이죠. 


끝으로,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 하에 '민주정의 좋은 것들'이 상당함에도 체제의 한계가 될 수 있는 '엘리트 독점 상황 혹은 과도한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미국에서 지난 몇 년 간의 지나친 안보 위협 상황을 사회에 주입해, 엘리트들이 사법과 공권력을 틀어 쥐어 사실상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표명한 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지 오웰이 그려낸 이 디스토피아가 아주 허무맹랑한 것은 아닐텐데요. 더욱이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에 의한 파시즘의 망령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는 마찬가지로 터무니 없는 소리가 아닐 겁니다. 즉, 글의 8장을 조금 과도하게 해석한다면 그동안 민주주의 체제하에 마련된 자유주의적 제도들이 다수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 되지 않을 때, 즉 헌법과 사법 제도가 다수 시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이는 서로의 관계가 여실히 상호의존적임을 감안해 본다면 그저 망상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기도 합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 정치적 평등, 인간의 존엄은 공익과 공동체 인식에 기반한 체제 하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존 롤스의 반대 급부로 여겨질 수 있는 사적 이익 추구, 즉 공동체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사적 이익 추구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맨 처음에 제가 '지금의 자유주의는 변질되었다'고 언급한 배경에는 과거의 '전통적 자유주의는 그렇지 않았다'가 마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 국가의 지배 계급은 자신들의 배타적 자유라는 명목하에 민주주의를 그저 시녀로 부려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현실은 마찬가지로 그저 공상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6장에서 이를 대변하고 있는데, "오직 엘리트들이 미리 자신들의 지배에 무해한 의견이나 사전에 허가한 의견 몇 가지 만을 놓고 시민들에게 투표하도록 한다면, 그런 민주정은 허상이다."라고 밝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7장과 8장은 눈 여겨 볼만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8장에서 민주적 체제를 떠받치는 자유주의적 관념의토대가 누군가에게 이용 당할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한데요. 인간의 합리적 이익 추구라는 것이 과연 규명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반대로 하나의 사례로 등장하는 비폭정이면서 비자유주의적인 체제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도 의구심이 듭니다. 따라서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자유주의는 바뀌어야 하고 동시에 민주주의는 조금 더 독립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근래들어 꽤나 오랫동안 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역사적 사례들과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저자의 제언들에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제 서평이 빈약하여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저자의 명민한 분석을 담지 못했는데요. 이는 순전히 저의 얄팍한 해석에 기인한 것입니다.


-비폭정이 일종의 공공재라는 저자의 인식은 정말 놀랍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도덕적 자유주의는 원초적 민주정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원초적 민주정은 시민들이 전체적으로 치배받지 않고도 안전하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 자신에게 좋은 정체이다.

이는 (민주정에서 다른 시민의 존엄을 보호하고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 곧 타인을 모욕하거나 어린애 취급 infantalization 함으로써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려는 오만불손한 개인들의 행태를 어떻게 통제할지라는 고질적인 사회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 된다.

법의 평등이란 법, 법적 절차에 접근하고 법적 보호를 누리는 것에서의 평등을, 발언의 평등이란 숙의의 현장에 참여하는 것에서의 평등을, 즉 공적 사안에 대해 발언하고 타인의 발언을 청취할 평등한 권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민주정의 조건인 정치적 자유와 평등이 다수가 아무런 제약도 없이 휘두르는 권위에 의해 잠재적으로 훼손되었음을 깨달으면서, 시민들은 이러한 필요성을 (체제가 갖춰야 할)미덕으로 바꿔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항구적으로 안전하고 풍요로운 국가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시민들에게 체제의 정당성을 납득시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원초적 민주정에서 능력들의 발휘라는 가치가 실현된다는 것만으로는 체제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완전하지 않으며, 원초적 민주정은 안전과 풍요를 마련해 주는 그 능력에 기반하고 있다.

원초적 민주정은 시민 교육의 커리큘럼 속에서 민주정이 변화무쌍한 조건들하에서도 어떻게 안전과 풍요를 마련해 줄 있는지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력을 가진 내용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개인들이 자신의 생존 자체보다 스스로 매긴 자신의 우월성을 표현하며 타인을 모욕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면, 이런 개인들의 행태는 리바이어던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자유와 평등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 저술가들에 의해 민주저의 가치일 뿐만 아니라, 민주정의 핵심적인 관행들 practices 로서 널리 인식되었다.

시민이 공적 사안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시하면서 주장하고 있음에도 존중받지 못한다면, 또는 그가 자신의 의견을 갖기 위해 필요한 정보에 어떤 이유로든 접근이 제한된다면, 그런 민주정은 엉터리다.

국가기관이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오직 엘리트들이 미리 자신들의 지배에 무해한 의견이나 사전에 허가한 의견 몇 가지만을 놓고 시민들에게 투표하도록 한다면, 그런 민주정은 허상이다.

재분배를 위한 공공복지 정책을 통해 적정한 먹거리, 보금자리, 안전, 교육, 의료 서비스를 보장해 시민들이 의미 있는 개인적 선택을 내리고, 스스로 위험성을 평가하며,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께 하는 일은 시민적 존엄의 유지에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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