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세미나 - 체제 이행기의 사유와 성찰
김규항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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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김규항 씨는 1962년생으로1980년대 초 한신대 재학 시절, 나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후 1998년부터 영화 주간지 '씨네 21'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칼럼을 쓰면서 본격적인 집필 활동에 나서게 되는데요. 2000년에는 홍세화, 진중권 등과 함께 사회문화 비평지 '아웃사이더'를 만들고 편집주간을 맡습니다. 그는 한국의 진보주의 운동에서 드물게도 실천적인 사회 정치 이론가로 적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글쓰기는 군더더기 없는 명료한 논증을 통해 규명된 비판적 주장들로 큰 설득력을 얻고 있고, 예전에 인터뷰에서 접한 그의 솔직한 태도도 인상 깊어 지금도 간혹 그의 이미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더욱이 저에게는 1999년 경에 시작된 의약 분업 사태와 관련된 그의 글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한신대 김성구 명예교수가 마르크스 자본주의와 관련해 감수를 맡았고, 2023년 5월 글의 초판 발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현재의 경제학과 관련해, 인류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이 채 몇 세기가 되지 않는데 지금까지 인류는 자본주의를 거의 불멸의 체제로 인식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과거 봉건시대에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농노들도 영주에 반해 들고 일어날 권리가 있었던 역사에서 우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미명하에 이상하게도 인간이 체제에 순응하고 종속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저자의 이 책은 우리가 숭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본질을 독자들과 시민들에게 면밀히 알리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여기에서 논증되는 주제들은 대부분 현실적이고 이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6장에서 거듭 강조하는 대로, "우리가 자본주의적 병리 현상에 저항하고 비판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경제학자라는 수식은 어쩌면 많은 경제학자들이 비판적 이성 없이 그저 경제학에 순화된 상태로 그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비판대로 지금 경제학의 본질은 그저 일어난 일에 대한 통계적 분석과 결과물에 대한 일차적인 입장 정도 뿐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러한 일이 발생되었는가"는 경제학자들의 관심 범위가 아니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제학 자체를 진리로 받아들이며 학문의 비판적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점은 이미 질베르 리스트가 강하게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그런 연유로 학계의 분위기는 일차적으로 기존의 자본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학을 실질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렇듯 체제 전반이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유일신 종교와도 같은 상황을 유지해 왔는데요.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핵 발전소와 관련한 현재의 원자 공학과 산업의 카르텔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하에 가격으로 매겨진 가치와 그에 따른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통해 '부의 축적'이라는 메커니즘이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중요한 토대일 겁니다. 특히나 저자의 언급대로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쉴 새 없이 상품의 교환을 경험하게 될 텐데요. 하물며 여성의 성 상품화를 통해 그것이 문화적인 행태일지라도 인간의 상품화까지 이뤄지고 있는 시점에서 거의 단적으로 말해, 인간 대부분이 이 체제에 종속된 상황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런 수많은 상품들을 판매하여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 역시, 자신들조차 체제를 굴러가게 하는 하나의 톱니바퀴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예전 포드주의 시대와 같이, 자본가와 노동자 계층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은 다소 복잡한 형태로 계급 분화가 되었고, 상품이 거의 물신으로 숭배되는 이 시대에서 자본주의가 인간을 계급적으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기존의 믿음이 회의적으로 현실에 안착된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이처럼 모두가 어떤 상품의 생산 과정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판매와 이익 회수에 있어 어떠한 권리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이 체제의 진정한 본질이 아닌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상품과 관련해, 떼려야 뗄 수 없는 '노동력 제공 시장'에 대해, 이 글 7장인 '평등을 삼킨 공정'에서 저자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그런 사회적 여파에 대해 아주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평등은 자유와 함께, 민주주의에 있어 중요한 가치입니다. 불행하게도 과거 냉전 시기에 있어 첨예한 대립의 역사 때문에 평등 자체를 색깔론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일 텐데요. 이 장에서 저자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 정부의 공정과 상식이라는 대체적인 주장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상품 교환의 원칙과 룰을 벗어난 모든 것" 즉, 최소한의 인간 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 부조와 사회적 제도에 대한 불신과 공격,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은 스스로가 찾으라는 소위 제한된 공정의 개념은 사실상 평등을 집어 삼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개인의 이익 추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능력과 능력주의에 있어 이 공정이라는 개념은 무엇보다 중요한 단어이며, 법을 내세우며 공정을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평등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이처럼 설득력이 높다고 생각힙니다. "공정은 그렇게 평등을 삼킨다. 사람들은 불공정한 상황에 분노하고 항의하지만, 그럴수록 평등은 더 멀어진다."

한국 사회 만큼 능력주의가 철저하게 이식된 사회는 전세계에 드물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능력주의는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달리 말해, 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거의 한 몸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꽤 중립적으로 여겨졌던 경제학자 홍기빈 씨조차도 일전의 인터뷰에서 신자유주의가 무조건 나쁜 것 만은 아니라고 그런 취지로 발언한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저자는 앞선 그와는 다르게 신자유주의에 대해 아주 명확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우리 나라의 수많은 자본가 계급은 엄밀히 따지자면,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50년대 전후 적지 않은 유산을 바탕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계급으로 일전에 장 피에르 뒤피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자본가 계급이 윤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그런 부류의 사람들도 아니거니와 그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고 좀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우리가 이것을 좀 더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사회적 이행에 필수불가결한 사회 체제와 어떤 동일한 인식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클로드 르포르가 바로 이 점에서 시민들의 분별력을 원했던 것이고, 이는 한편으로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의견을 낼 수 없는 본질적인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에 규제 없이 이행하게 된다면 시장이 좀 더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지난 2008년의 대붕괴로 만천하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데이빗 코츠는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의 반복적인 구호가 사실상 이를 통해 붕괴된 것으로 봤는데요. 명목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자유로운 경쟁 혹은 시장의 관대함 등을 역설하지만, 일찍이 슘페터가 언급한 독점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그저 허튼 소리가 아님을 이 글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진국들의 기업들이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우세를 거두고 있다는 점과 이들의 이익을 위해 제3세계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임금 노동력에 따른 이익 창출의 체계가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의 폐해를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긍정한 '개인의 탐욕, 사적 이익의 추구'라는 관념들이 명백한 법의 지배 하에서도 시장이 논외로 여겨질만큼 마치 무소불휘의 권력을 갖게 된 것은 정치와 경제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기존의 입장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지 않는 정치와 마찬가지로 자유 시장이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처럼 말하는 허황된 미사여구처럼 여겨지기 때문인데요. 인간의 욕망이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아야만 하는 인식의 범주가 분명 존재하고, 오로지 경제학을 이런 인식의 논외로 취급하는 것은 그만큼 이성의 측면에서 위험하다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일전에 대니 로드릭은 자본주의(아마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이겠지만)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로드릭은 소위 주류 경제학에서 사실상 소외된 학자라 그 '주류'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 의견을 피력한 것인데요. 우리는 스스로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존엄을 갖는 인간이지만, 그러한 인간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원과 지원에 있어 저자가 강조한 바와 같이, 현실에서는 이러한 생각들이 철저하게 거부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반 노동자들이 언제까지 기업의 이익 창출에 맞지 않는 희생을 감내하면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팔아가며 삶을 영위해야 할지는 거의 불확실합니다. 아예 적나라하게 자본주의가 과연 민주주의의가 요구하는 가치들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지금도 극도의 회의를 느끼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본질을 이미 여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 눈을 감고 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매번 저는 이러한 글을 읽을 때마다 과연 "인간 다운 삶은 무엇인가. 존엄한 인간의 삶은 그저 이상으로 끝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매번 고민하게 되는데요. 제가 즐겨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백대로 우리가 서로 손을 붙잡고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기 만을 오직 바랄 뿐입니다.


- 개인적으로 이 글 6장의 결론이라 볼 수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요.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혹은 나쁜 상태로 이해하는데, 실상은 신자유주의야 말로 자본주의 본연의 상태, 즉 억지 요소들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상품 물신성이 만개한 순정 자본주의, 자체라고 말한 부분이었습니다.  


-저자가 따로 언급한 소위 '제 세상을 맞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이 자리에 따로 기록해 두고 싶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유시장에 의해 자연스럽게 규율된다.
국가 개입을 배제하고 규제를 완화하라.
국공유기업을 사유화(민영화)하라.
노동조합은 자유경쟁을 막는 독점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상품 교환 행위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선 노동 배분의 공동체 질서가 있었고, 개별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노동이었습니다.

주류 경제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역사 속의 여러 경제체제 중 하나로 보는 게 아니라, 인류 최후의 경제체제로 전제합니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데는 타인에 대한 지배 욕구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품 가치가 인간의 사회적 관계임을 보지 못하고 상품체의 속성이라 보는 일은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착시도 아닌, 오히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일입니다.

비인간화, 소외,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따위 이른바 자본주의적 병리 현상이라 일컫는 것들은 대체로 상품 물신성 현상을 이르죠.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사악하고 나쁜 상태로 이해되곤 합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건 정상적 자본주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신자유주의야말로 자본주의 본연의 상태, 억지 요소들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상품 물신성이 만개한 순정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의 기만은 자본주의적 정의, 즉 공정의 어떤 막장을 보여줍니다. 자본주의의 사상적 틀로서 자유주의는 시장 경쟁이야말로 자본주의가 평등한 사회라는 근거라 말합니다.

선진국 자본주의는 자유경쟁 시대를 끝내고 독점자본주의 상태에 접어듭니다. 독점화한 산업자본과 독점화한 은행자본이 융합하여 거대 금융자본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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