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이 온다
더글라스 러시코프 지음, 이지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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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러시코프는 근래에 미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미디어 이론가입니다. 그는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소위 인터넷 세대인 '디지털 네이티브'에 주목하면서 앞으로 디지털 미디어가 만들어 나갈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현재 그는 뉴욕 시립 대학교 퀸즈 칼리지의 미디어 이론 및 디지털 경제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요. 과거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해, 캘리포니아 예술 학교와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러시코프는 미디어 업계나 이를 대변하는 지식인 계층에서 '미디어 생태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요. 이런 그의 집필 활동은 꽤나 독보적인 부분이었고 전체적으로 그의 논저들은 미래의 미디어 현실에 대해 더욱 인간적인 측면을 상실하여 사람들의 삶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일관되게 경고하고 있는데요. 이는 현재의 기술 만능주의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수많은 개인 정보를 자신들의 상업 이익에 활용하고 있는 점에서 가까운 미래의 소위 미디어 세대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성 세대를 포함한 소수 지식인 그룹의 우려를 대변한다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eam Human"으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의 원제는 '팀 휴먼'으로 저자인 러시코프가 우려하는 미디어의 탐욕스런 자본주의적 d이행에 대해 많은 시민들이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지켜내야 한다는 대의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공성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앞으로 있을 미디어 통제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목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역된 책의 제목은 저자가 논지를 펴고 있는 주제의 맥락과는 다소 관련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이 책을 번역한 출판사가 확언하는 "대전환'과 저자인 러시코프가 독자들에게 경고하는 "현시대의 이행"은 꽤나 의미 차이가 존재하기에, 어느 정도는 부적절한 제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러시코프는 팀 휴먼이라는 가치 언어를 통해, 앞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넷 미디어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켜나가는 데 있어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서사적 근거와 더불어, 그에 따른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20세기를 지나 자본주의는 보다 넓은 세계와 범접할 수 없는 유일 체제가 되었습니다. 과거 냉전의 시기에서 최종적인 승리자가 된 것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이미 자본주의가 인간을 도구화하고 있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는 내용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깊게 관여한 고도화 된 디지털 미디어가 결국 인간을 도구로 격하시킬 가능성에 대해 저자인 러시코프의 우려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글의 4장에서 잘 서술되고 있는데요. 이런 변화된 디지털 환경이 핸드폰을 제조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꾼 것과 노동 현장에서의 노동자들에게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다는 원칙이 스스로 변질되어 현장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의 원칙은 이 시스템에 근거해, 더 수월하고 손쉬운 상품 제조에 기여해야 힌다는 사실상의 부정적 개변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러시코프는 교육과 민주주의의 뗄레야 뗄 수 없는 상관 관계를 먼저 언급하면서, 교육조차도 그저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우회로 경고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발전된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삶을 바꾼 것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그 변화 자체는 사실이며, 마찬가지로 민주적 인간으로서의 개인들 역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에 어느 정도는 진보적 관념을 내포하고 있던 시장 경제는 더할 나위 없는 자본의 속성과 만나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시장 경제가 주장하는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점 역시, 모든 인간이 이에 봉사하도록 강요 되기에 이르는데요. 사실 이 부분도 구글과 같은 거대 인터넷 기업이 '개인의 많은 선호들'을 수집하여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에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고 이것은 앞서 언급한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념과 상당히 맞닿아 있습니다. 러시코프는 글의 이후 진술 과정을 통해 이런 개인의 이익을 강조하는 사회 관념 내지는 경제적 기조가 사실상 모든 사회의 공공성을 해쳤고, 그저 자본주의가 알량하게 숨만 쉬게 만들었던 윤리의 존재 역시, 예상대로 사회에서 무력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이 마땅히 인간일 수 있는 가치, 즉 도덕과 양심 그리고 공공성과 같은 계몽주의적 맥락이 유명무실해졌기에 그만큼 러시코프가 우려하는 AI 산업에 있어, 이 흉물스런 AI가 인간을 그저 불합리하고 다각도의 개선이 필요한 생물체로 여기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고도화 컴퓨터 산업으로 탄생한 AI가 아무리 관련 데이터를 축적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사고하는 것처럼, 혹은 '인간의 영혼'과 같은 단계에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며, 이러한 양자의 서로 간의 몰이해는 결국 비극을 낳게 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디스토피아적 감성를 곁들이게 됩니다.

여러 전문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날이 (상업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인터넷 세계는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무력화 시키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에 책과 글이 많은 평민들에게 금기시되었던 것처럼 넷 상에서 돌아다니는 '조악한 정보들'이 개인의 면밀한 선택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현실 정치를 오염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대편에 있는 많은 넷 미디어 전문가들은 '넷 월드'의 발전은 이제부터가 초기 단계 과정이고 가짜 뉴스의 범람과 자본주의를 더 강고한 소비 지상주의로 내모는 넷 환경은 그저 기우에 불과하다고 강조합니다. 첨단 기술이 과거의 전통을 우습게 보는 것처럼 이제는 주와 객이 전도되어 인간이 첨단 자본주의와 시장 지배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 인간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지금의 '디지털 질서'에 개인들이 실효적으로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러시코프의 분석은 이처럼 설득력이 높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군다나 넷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특정 인종과 종교에 대한 혐오와 증오는 마찬가지로 우려할 만한 상황이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오도된 엘리트들의 손아귀에 강제로 포획될 가능성이 있으니,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정치마저도 먼 미래에는 쉽게 긍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끝으로 러시코프는 대략 중요한 두 가지 관점의 대안을 글의 끝부분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줄곧 서로를 향해 관심을 갖고 있던 상호 관련성과 옛 것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모든 개인의 도약을 위해 타인과 더욱 교감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등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와 그에 따른 집단주의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러시코프는 글 중간에서 "자신과 비슷한 관심과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저 개인에게 있어 이 북플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사회와 정치에 대한 비슷한 생각과 그것을 바탕으로 서로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것이라고 여겨졌는데요. 또한 많은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토론과 자신의 생각이 차별적으로 고착화되지 않고 시야가 좁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것도 중요해 보입니다. 이는 전체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직접 대면하면서 인간 사이의 건전한 불편함을 무릅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공동의 관심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좀 더 인간 답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이 확대될 수 있도록 모두가 자신의 책임처럼 가진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다소 허황된 생각일지라도 말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구축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있을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가져다 놓았다.

미국의 공중 보건에서는 인간이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이 비만보다 더 큰 문젯거리다.

그러나 군주들은 인쇄기를 엄격히 통제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잘 알고 있었다.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밈이 득실거리고 소셜 미디어에 의해 고립된 환경에서 인간은 더욱 더 자기 위치만을 지키려고 하고 자신의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휘둘린다.

새로운 미디어 혁명은 언제나 소수 엘리트가 쥐고 있는 미디어 장악력을 뺏어서 사람들에게 주고, 그동안 훼손된 사회 유대를 재정립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를 어떻게 조종해야 할지 측정하는 방법은 알고리즘이 수집하고 편집하고 비교하는, 아무 의미 없는 메타데이터 metadata와 더 관련이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이 이용하는 인터넷 플랫폼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과 기업과 봇이 거주하는 환경 그 자체다.

텔레비전은 지구를 하나의 큰 유기체처럼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었지만, 소비지상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촉진하기도 했다.

기술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일부 디지털 기술이 그 자체로 반인간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성향을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을 가능성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일부 국민을 굶주리게 하고, 그들의 땅을 파괴하고, 일부 나라의 젊은 흑인 남성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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