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플로야 을유세계문학전집 91
샬럿 대커 지음, 박재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샬럿 데커는 1771년 혹은 1772년에 유대인 출신의 출신의 부친인 존 킹의 세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고 추정됩니다. 그녀에게는 소피아와 찰스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샬럿 데커는 영국 고딕 소설의 작가였고 보통 로사 마틸다라는 가명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는 비평가들을 혼동시키기 위해 두 번째 가명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815년 니콜라스 번과 결혼하면서 살럿 번이 되었습니다. 데커는 네 편에 이르는 주요 소설을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했는데요. 그중 1806년에 출간한 '조플로야'는 꽤 높은 판매고를 올렸고, 동시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까지 했습니다. 앞선 조플로야를 국내 초역한 을유문화사는 이 소설을 '고딕 로맨스 소설'로 홍보했습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섬뜩한 소재의 교훈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세기 동안 그가 무명의 작가로 남아있던 것은 이런 복잡한 상황이 기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Zofloya"로 앞서 언급한대로 1806년에 초도 출간이 되었고, 국내에는 후에 다시 번역된 1997년 판을 번역 원본으로 이외에 모호한 부분은 1806년 원본을 참고했다고 출판사는 밝히고 있습니다. 국내 번역본은 지난 2017년 9월에 출판 되었습니다.

약간의 비통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 이 소설의 완독은 저에게 실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요. 일단 여성의 정욕이라는 관념이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그 시대에 있어 금기시되었다는 걸 충분히 알게 되었는데요. 정숙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반감은 당시의 주된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 국가 베네치아를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점은 꽤 신선했습니다. 추측하건대 당시 유럽은 거의 모든 여인들에게 가톨릭적 정숙함을 요구하는 문화적 보수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바로 대척점에 있는 장소로 베네치아는 여기서 묘사되는 귀족 간 사교 문화가 같은 시대를 다룬 다른 작품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작품의 여주인공이라 봐도 무방한 빅토리아의 비틀리고 충격적인 욕망은 그녀의 모친이었던 후작 부인이 잉태한 비극의 산물이었습니다. 물론 음험한 분위기를 있는 대로 드러내는 고딕 소설의 고유성을 감안해 본다면, 데커의 이 작품도 그런 범주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 소설을 그저 단순한 로맨스 소설로 규정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는데요. 소설 초반에 작가가 우리에게 직접 말하는 것과 같은, '어느 한 사람의 불행한 환경은 교육과 스스로의 겸허한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이 소설을 통해 쉽게 반박 되는데요. 이를테면 로레다니 부인과 빅토리아 그리고 또 다른 조연 급 인물인 메갈리나의 허영, 독심, 교만, 증오의 감정들을 독자들이 간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 과연 인간의 품성이 그저 후천적인 교육으로 개선될 수 있겠는가란 이 오래된 주제를 불신 하는 자신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럼에도 앞선 메갈리나는 빅토리아와는 같으면서도 좀 더 다른 성형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녀 역시 비틀린 욕망을 갖고 있지만 빅토리아와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변 인물들을 이용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이 작품의 대부분 여성 인물들이 대체로 극단적이고 왜곡된 인물로 그려지고 있기에 어느 정도는 인물상 자체에 간혹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극 전개가 독자들이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도덕적 선과 악에 대한 통념이 부숴져 나가기 때문에 인물들을 단편적인 감상이 아닌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 볼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가 큰 틀에서 규정하는 '도의를 잃어버린 군상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의란, "사람이라면 마땅히 지키고 행하여야 할 도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에 대해 지켜야 할 의무라든지, 마찬가지로 부모 자식 간에도 인정되는 도의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물론 데커의 이 소설이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알리고자 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중후반부에 비로소 전개되는 여주인공인 빅토리아의 급격한 감정적 전개는 실로 소름끼치는 수준이 아니라, 굴절된 인간에 대한 비통함을 절로 느끼게 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쉽게 악에 기우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도의와 양심을 벗어나는 맹목적인 이성에 대한 애정이 아무리 스스로의 불행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더라도 매번 용인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는 빅토리아의 이런 비참한 인간성의 표본인 도덕적 탈선의 원인을 극적인 서술과 더불어 화자들 간의 대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로레다니 부인과 그녀를 파멸에 이르게 한 아돌프 백작의 비도덕적이면서 주변의 신뢰를 잃게 한 두 사람의 행동에 그 화살을 돌리고 있었는데요. 특히나 이 작품에서 이 나약한 인물들이 스스로를 절망의 길로 내몰지 않을 충분한 선택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들 모두는 비극적 운명의 안배를 여실히 '인간적'이라는 명목 하에 무참히 스스로를 배신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로레다니 부인이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 그와 죽어가는 넘편을 향한 그 고결한 신의와 맹세를 끝까지 지켜냈다면 그리고 그녀의 딸 빅토리아가 몇 년 간에 이르는 스스로의 삶이 성숙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오판으로 뿌리치지 않았다면, 작가의 평가대로 '신의 보답은 아마도 공평하고 관대했을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쉽게 악마가 판 함정에 쉽게 빠지게 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행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들의 이런 방만한 행위가 결국 주변 사람들과 지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스스로도 마땅히 절망의 지옥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중세 소설의 원칙과는 다름없는 전형적인 서사이자, 인과응보와 유사한 비틀린 인간들의 허망한 말로라는 비참한 최후를 통해, 과연 우리가 무엇을 교훈으로 얻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합니다. 

당시 완고한 가톨릭 사회가 철학에 대한 원론적인 적대를 차치하더라도 스스로 자신만만했던 베렌차 백작의 비극적인 결말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단순히 음모로 보기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초반에는 꽤 양식적이고 신중한 인물로 그려지는 베렌차 백작은 후에 '신분 계급의 남성들'이 갖는 개인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사실상 유희거리로 취급한 메갈리나의 적개심과 증오를 불러일으키게 된 일련의 서사들이 흔히 '현명하고 사려 깊은 철학적 인간'의 틀에 결국은 맞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 스스로는 빅토리아의 그런 전인미답의 증오를 깨닫지 못하고 후에 그녀가 "정말 비열한 계산적인 철학자"라는 혐오를 뒤로 하고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비극적인 결혼, 충격적인 결말이라 볼 수 있는 베렌차의 몰락은 전반의 자신만만하고 신중함으로 무장한 꽤 인상적인 모습과 대비되어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그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저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악의 씨앗을 잉태한 필연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정상적인 인물이 없습니다. 다만 뒤에 언급하는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베렌차 백작의 동생인 엔리케와 그의 연인 릴라는 서로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경애를 받을 만큼 훌륭한데, 특히 엔리케는 거의 유일하게 '도의'를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스포가 될 것 같아서 이 작품의 제목과 동시에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무어인 "조플로야"는 그의 범상치 않은 정체를 드러내는 사건 하나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꽤 뜬금없는 소설적 장치라고 생각되었는데요. 비로소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이 사건의 복잡한 의미를 확연히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어인 조플로야를 현대에 맞게 대입해 본다면 이와 같은 인물들이 사회에 적잖이 많이 존재한다는 점을, 데커의 작품을 통해 새삼 경청하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극도의 회의감으로 다루면서, 모든 인간들이 자신과 같은 비틀리고 삐뚤어진 인간이라고 취급하는 태도, 타락은 누구에게나 아무런 죄 의식 없이 쉽게 다가올 수 있고, 그것을 초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인간성의 한 단편이며, 그것을 통해 도의가 무너지는 것은 오로지 인간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대변하는 '조플로야'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앞으로 삶을 영위하며 쭉 경계의 마음을 유지하게 될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부 독자들은 어쩌면 어느 정도 작위적인 고딕 소설의 전개를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요. 저는 빅토리아라는 한 여인의 파멸을 통해, 우리의 현대적 삶이 표면적인 풍요 상황에서 내면으로는 전혀 녹록하지 않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증오와 혐오를 그저 쉽게 취급한다면 무고한 다른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진정 깨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데커의 이 소설에서 제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던 부분은 조플로야의 충격적인 인물 조형이었습니다. 인간의 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여자를 속여 마음과 절조를 유린한 남자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승전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따라서 그녀를 법적인 아내로 들이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를 알았다면, 연인을 향한 모든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분명 분연히 퇴짜를 놓았을 것이다.

또 빅토리아가 헌신적인 모친에게 고통을 준 것에 대해 사과했다는 사실에 그는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가장 천박한 외모를 지닌 오만과 위선의 인간이 고결한 척하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수치스러웠다.

아돌프는 마음이 이렇게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거나 파멸시키는 짜릿한 묘미가 아니면 쾌락을 얻지 못했다.

아돌프는 그녀의 망가진 영혼을 이렇게 농락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녀는 세상에 오직 그만 존재한다고 착각할 때도 있었다.

"육체뿐 아니라 마음에도 기품이 넘쳐야 하고, 멋 없이 몸매만 가지고 덤비는 건, 난 그런 여자는 별로야. 그런 건 완전 촌놈도 즐길 수 있는 거니까."

타락의 깊이야 별 차이 없지만, 그럼에도 메갈리나는 가슴에서 요동치는 욕망들을 어떻게 거짓 세심과 절제로 포장해야 하는지 더 잘 알고 있었다.

메갈리나는 자기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그랬다. 젊은이의 높은 기상에 잔인한 상처를 주고, 그녀를 향한 사랑을 산산조각 내며 완전히 부숴 버린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다.

레오나르도는 가문의 자부심이나 긍지에 관한 것이라면 신중히 여기고 전율이 흐르도록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사랑의 정절을 버리는 건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