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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1982년 바레인에서 인도인 부모에서 태어나 이후 대만, 싱가포르,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예일대학에서 철학 전공으로 학사, 2007에 동대학에서 예술 학사를 취득합니다. 그 뒤에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철학 학사 그리고 옥스포드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서 영예로운 로즈 장학생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학계에서 보기 드문 인도계 여성 철학자로 그녀는 근래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는 신진 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2018년 10월에 옥스포드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철학 연구원으로 일했고, 이듬해인 2019년 9월에는 유색 인종 최초로 올 소울즈 칼리지의 치첼 사회 및 정치 이론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섹스할 권리는 논저는 그녀의 첫 저서로 원제, "The Right to Sex"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이 책의 제목에는 사실상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2014년 당시 스물두살의 엘리엇 로저 Elliot Rodger는 소위 인셀 Incel 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전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그는 여성들이 자신과 섹스를 해주지 않는다는 굴절된 인식으로 여성과 사회를 바라보며 그에 대한 분노를 쌓고 있다 여성 세 명을 비롯한 무고한 사람들을 총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입니다. 바로 이 글의 제목은 저자인 스리니바산이 엘리엇 로저가 죽기 전에 쓴 비틀린 선언서에 등장하는 '섹스할 권리'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인셀과 관련해, 엔젤라 네이글, 도나 저커버그, 케이트 만 등의 학자가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의 발전과 더불어 삐뚤어진 성 관념으로 사회성을 결여하여, 자신이 평범한 여성들과 데이트를 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성들에게 찾는 비정상적인 남성들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반페미니즘적인 현상이 아니라, 성과 섹스와 관련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남성들이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반증했고. 총기 휴대가 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권리로 인식되고 있는 미국에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굴절된 사고를 갖고 있는 인간이 사회에 어떠한 파급을 끼칠 수 있는지 아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스리니바산의 이 책을 좀 더 수월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여전히 섹스에 있어 여성들이 남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관련해, 성적인 자기 결정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가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특히 저자의 이 책을 통해, 여성들이 평소에도 얼마나 자신들의 성적 결정권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이 책을 여성 철학자의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글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가부장적인 성적 착취라는 근사한 용어를 잠시 잊고 글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성적 괴롭힘'이 학교와 직장을 비롯, 자신의 삶을 살면서 흔히 맞닥뜨리게 되는 일상적인 일임을 인식하고 나서 이 글의 내용에 접근을 하게 되면 단순히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 자체가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비롯, 현재에도 많은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닌가 깨닫게 됩니다. 특히, 인도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반 여성들에 대한 강간과 성폭력은 도저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기도 한데요. 미국도 이 부분과 별반 차이가 없게도 미국 사회 내의 흑인 여성들에 대한 성적인 편견과 백인 여성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는 법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일정 부분 동의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글의 1장 도입에서 미국 사회 내의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백인 남성 계층의 본질적인 의미는 자신들이 마땅히 '법의 보호와 스스로의 권리를 누군가로부터 침해당했을때 법이 당연하게 보호해 줄 수 있을 것'라는 믿음이라는 부분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는 법의 조력이 미국 사회에서 조차 헌법상의 규정된 권리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의미를 보여줌과 동시에,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간의 법의 조력 조차도 명백히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대다수까지는 아니겠지만 미국 사회 내에 많은 백인 남성들이 흑인 여성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마땅히 자신들에게 그런 성적 봉사가 있어야 한다는 아주 삐뚤어진 인식과 더불어, 마찬가지로 동아시아 여성들에게 갖는 성적인 기대도 '이것이 미국 사회의 적지 않은 백인 남성들의 타인종 여성에 대한 성적인 편견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페미니즘 논쟁을 넘어 매우 중요한 사회 문제라고 여겨졌는데요. 물론 법의 보호가 성별과 인종적으로 구별되어 차등적으로 규정되지는 않겠지만, 사회가 이런 식으로 계층과 성별 간에 차별적이고 왜곡된 인식을 보이고 있다면 단순히 법이 평등하다는 구호를 완벽하게 내세울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것은 심각하게 사회적 병리 현상과 다름없다고 생각되는데요. 쉽게 다룰 수 있고 언제나 손만 뻗으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섹스라고 흑인과 유색 인종 여성의 성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점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는 3장의 내용 들은 인셀과 그것을 둘러싼 일부 남성들의 '오염된 사고'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고, 특히 이들 젊은 남성들이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며 이것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드러났는지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성소수자에 대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일부 우파의 공격을 넘어, 미국 정치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건강하지 않은 상태인지 마찬가지로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차피 논쟁적인 측면에서 쉽게 이러한 문제들을 '페미니즘 논쟁'이나 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돌리고 이것을 같은 진영의 결집으로 꾸며댄다면 참으로 비참한 정치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 논의된 솔직한 진술들을 보며,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다원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고, 성소수자와 더 나아가 여성들에 대한 건전하고 포용적인 사회 인식이야 말로 정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선결적 과제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 역시, 일반적인 남성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고 남성들이 좀 더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는데요. 일반 남성과 페미니즘이라는 대결 구도로서 단순화 시키지 않고, 사회 내에서 여성과 진지한 관계를 고찰하여, 여성의 성에 대한 남성들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논점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사고 판다는 자본주의적 논리는 상품의 거래 뿐만 아니라 '성의 거래'에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삶이 자본주의에 종속된 현시점에서 자본주의 자체가 새로운 가부장 제도가 된 것은 어쩌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앞선 2장의 포르노그라피와 이후 진술된 독일과 네덜란드에서의 합법적은 성매애와도 일정 부분 인식의 궤를 같이 합니다. 특히 상업적으로 만연된 포르노그라피는 십대 남자 아이들의 그릇된 성 관념을 확대시키고, 아주 전형적인 여성성 만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데요. 이 지점에서 본질적으로 여성의 성이 남성의 종속적인 틀 안에 놓여져 있다는 종래의 페미니즘적인 발언에 동의를 할 것인가에 대해 잠시 차치하고, 일반적인 남녀 간의 연인 관계에서 조차 여성들이 연인이 요구하게 될 섹스에 있어서, 어느 수동적이면서 남자의 요구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조차 단순히 '균형적인 성교육'의 문제로서 접근하는 것도 어느 정도 모범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회에서 섹스가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어려운 문제임을 감안한다면 솔직히 실효적인 피임과 더불어, '임신 거부'에 대한 여성들의 권리를 다시금 떠올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성들의 자발적인 임신 거부에 대한 권리는 과거 영국에서 벌어진 '여성 참정권 운동'과 버금가는 1980년대를 뒤흔든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한대로, 많은 여성들이 섹스에 대한 고민을 평소에도 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가 좀 더 전향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따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섹스 자체가 일부 사회에서는 남성의 트로피이거나 전유물로 취급되고 있기도 한데요. 특히 인도와 같은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종속'은 인도가 전세계인들로부터 듣는 '거대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수식에 걸맞지 않는 전형적인 관습적 체제의 국가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끝으로, 스리니바산은 우리에게 귀중한 몇 가지 역사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과거 흑인 여성의 몸을 전시했던 노예 제도의 맥락에서 백인 남성들이 흑인 여성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과 근래에 까지 이어지는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소수 여성들의 좀 더 유능한 권리를 강조하면서도 그 권력 바깥에 있는 여성들은 소홀히 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더욱이 더 충격적인 사실은 과거 미국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초안이 만들어진 '투옥 국가'와 관련해, 당시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강간범들의 강력한 법척 처벌과 장시간의 투옥을 사실상 지지하면서 다른 사회적 대안을 만들지 못한 그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는데요. 이는 미국이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법의 심판에 따른 교정 조직 자체를 민영화 함으로써, 많은 미국 시민들 특히나 흑인 남성들을 비롯한 유색인 남성들을 과도하게 투옥시키고, 이에 따른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낭비하는 행태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많은 미국 기업인들에 의해 '신사업'으로 추앙받기까지 했는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도 진지한 교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더욱 법의 사각지대를 노출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포함한 저자의 논증들이 단순히 그녀의 말마따나 '에세이'로 그치지 않고 학계와 논단에서 이 글이 주목을 받은 이유가 될 텐데요. 그래서 이 글을 단순한 남녀 간의 대결 구도로 급진화 시키는 전형적인 페미니즘적 글로 취급하지 말고, 인내심을 갖고 봐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이 글을 통해 미국 사회가 얼마나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에 놓여 있는지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 점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트럼프주의자 식의 논법인 '우리의 귀중한 백인 여성, 우리의 아이를 낳고 기를 백인 여성의 권리는 많은 유색 인종들로부터 보호하고, 반대로 흑인 여성의 문란한 성은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왜곡되고 처참한 발언들이 일부 계층이 보이는 '파시즘의 향수'와 맞물려, 미국 사회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요. 실로 이 지점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강간의 경우, 유복한 백인 남성은 여성을 믿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짐에 따라 법의 편견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자신의 권리가 축소될까봐 우려한다.
뉴욕주 북부에 위치한 명문 인문대학 콜게이트대학교에서 2013~14학년도 전체 학생 가운데 4.2퍼센트만이 흑인 학생이었다. 그런데도 같은 기간 성폭력 고소를 당한 학생의 50퍼센트가 흑인이었다.
미국이나 다른 백인 지배사회에서 흑인 여성의 처지와 아주 흡사하게 인도에서 달리트와 ‘하류계급‘ 여성은 성적으로 문란하고, 그래서 강간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반포르노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생각은 포르노란 어쩌다 여성의 종속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여성을 종속시키는 행위라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자유주의 사회가 가치를 부여하는 (또는 요구하는) 많은 것과 관련이 있다. 개개인의 자율성, 정부의 민주적 책임, 개인의 고결한 양심, 다름과 의견 불일치에 대한 관용, 진실 추구 등등.
현편으로 이는 독실한 보수주의자와 신자유주의 경제 지지자를 결정적이고 지속적으로 결속시켰던 우파 조직의 백래시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국가의 제재가 필요한 ‘나쁜‘여성(성노동자와 ‘복지 여왕‘)과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좋은‘여성을 구분하고, 남성이란 본래 탐욕스러워서 일부일처제와 핵가족 제도로 길들여야 한다는 시각을 가진 보수 이데올로기에 딱 들어맞았다.
‘인셀‘지지 그룹은 외롭고 성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에게 지지를 보내주는 집단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용자들이 여성을 향해, 또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비인셀‘noncel 및 ‘일반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고, 강간을 지지하기까지 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었다.
다시 말해 섹스를 긍정하는 시선은 여성혐오만이 아니라 인종차별과 장애인 차별, 트랜스젠더 혐오, 그리고 언뜻 무해해 보이는 ‘개인의 선호‘메커니즘을 통해 침실로 침투하는 여타 모든 억압적 시스템을 덮어줄 위험이 있는 것이다.
섹스에 관한 한, 그러니까 진짜 욕망 내지는 이상적인 욕망을 부르짖으며 여성 및 게이 남성에 대한 강간을 오랫동안 은폐해온 역사가 있는 섹스에 관한 한 이는 대부분 진실이다.
이 부르주아적 도덕성의 이데올로기적 기능 탓에 우리가 참여하는 더 광범위하고 부정의한 시스템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 역시 분명 옳은 말이다.
이 점에서 인셀은 병리적인 두 측면의 충돌을 보여준다. 한편에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것의 병리적인 측면이 있어서, 점점 더 많은 삶의 영역을 시장의 논리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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