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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 (천줄읽기) ㅣ 지만지 천줄읽기
로버트 오언 지음, 하승우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2월
평점 :
로버트 오언은 18세기 영국 웨일스의 섬유업자로,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사업 등을 진행하여 당시에 사회개혁가로 이름을 알린 인물입니다. 그는 공장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주의적인 공동체 개발을 시도했고 자녀 양육에 대한 개혁적인 주장과 더불어 정부의 역할론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런 논의들은 실로 개혁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과 동시에 진정으로 사회의 공동선에 대한 믿음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일관되게 바란대로 노동현장에서 상호 존중과 사랑 및 도덕적 가치를 모두가 증진해 나가는 함의가 얼마나 진전되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노동자의 삶이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 공감하시는 분들이라면 그의 노력들이 후세에 의해 폄하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 new view of society"로 지난 1816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1995년 영국 솜스 출판사가 재간행한 판본을 바탕으로 이뤄졌습니다. 이에 번역 출판은 2012년 2월에 진행되었습니다.
책의 서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번역본은 사실상 완역이 아닙니다. 3번째 에세이와 4번째 에세이만이 완역이고 앞선 두 에세이는 발췌본입니다. 역자의 의도대로 저자인 로버트 오언의 선명한 논지가 굳이 완역이 아니더라도 충분한 의미 전달이 가능하다면 아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우선 오언은 인간의 본성이 원래 타고나 일절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통설에 반대하면서 충분한 교육으로 사람은 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두 번째 에세이에서 저자인 자신은 참된 것을 설명하려고 잘못된 것을 공격하지는 않겠다고 전제하고 인류가 그동안 스스로가 알고 있는 바대로 어린 세대를 교육해 왔으나 그 제도가 결함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사회적 제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이 점은 교육을 포함한 사회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해 발생한 세대의 범죄와 문맹과 같은 문제들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관습적인 교육의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하며, 바로 이런 측면에서 사람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대체적인 논증을 통해 설득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언의 이러한 관점은 국가의 재정을 위한 해법에만 골몰하는 관료들의 문제를 지적함과 동시에 정부나 관료조직이 먼저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부분은 "동포의 생명과 안전, 안락함"이라고 사실상 강조하고 있는데요. 나날이 범죄에 노출되고 있는 소위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세대에 대해 인간 본성의 개선이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안전망을 위해서라도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은 마땅히 필요하다는 점이 저자의 주된 관점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세번째 에세이에서는 주민들의 삶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던 관계로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한계가 명확했고, 이처럼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교육이 시급한 것은 "아이들이 대부분의 선과 악을 초기 단계에서 배우거나 몸에 익힌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즉, 어린 아이들이 "친구들을 다치지 않게 하게끔" 몸으로 체화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이들이 그렇게 자라나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이를 통해 '무한한 이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식의 논지를 펼칩니다. 결국 인간 본성의 측면에서 아주 보편적인 원리 등을 학습해 이것이 사실상 사회 공동체의 안전에도 이바지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날 것인데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합리적인 인간'으로 귀결되는 합목적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 문제를 오로지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사회적 관습이 더욱 이를 악화시켜 왔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 때부터 마땅한 지도가 필요하고 합리적인 정신을 배양시켜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자는 요지인데요. 제가 이러한 논지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은 어렸을 때의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러한 교육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에 대한 교육이 관습적인 겉 핥기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지도가 전제 되어야 한다는 점도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하지만 작금의 교육 제도가 이러한 당위를 뒷받침할 수 있을지는 상당히 불확실하다고 여겨집니다.
저자의 논리적 귀결대로, 합리적인 인간성을 구축하는 것이 사회 더 나아가 국가 간에도 충분히 이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전쟁을 회피한다든지 첨예한 외교적 갈등을 무마하는 등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끔 하는 그런 정신은 충분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정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정신과 생각까지도 고려하고 관찰할 수 있는 훈련과 학습이 이 시대에 과연 가능할지는 약간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결국 이 지점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 대한 교육과 관련해, 로버트 오언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거의 진보할 수 없었으며, 지금도 스스로 본성에 대한 고찰과 자신이 어떤 식으로 합리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조력이 현실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오언의 이런 생각은 일정 부분 유토피아적 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현재의 전인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시민이 일정 부분 평균 이상의 인간성을 답보해야 한다는 점은 스스로의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과제로 판단되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모든 문제를 법과 제도에 기대게 되는 현실은 모든 인간 정신의 자유에 있어 대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 지에 본질적인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하지만 오언의 적지 않은 논의들은 어떻게 하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겠는가에 맞닿아 있다고 여겨집니다. "어떻게 하면 개인과 공동체에 이득이 될 수 있는가"는 모든 시민이 숙고해 봐야 하는 문제로 지식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서 조차 '무지의 폭력'이 여전히 자행 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식 사회'에 대한 현재 사회 구성원들의 인정과 열망은 그만큼 공상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문법들은 오늘날에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곡된 인간 정신이 끝내 사회와 국가에 해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 그래서 충분히 설득적이고 이 왜곡된 인간 정신은 바로 잘못된 신념과 더불어 무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사회적 풍조를 초래했습니다. 이에 대해 오언은 "비합리적이고 비참한 존재로 길러온 체계에서 무지가 만들어 온 잘못을 드러내어 그 체계에서 확고하게 벗어난 신념을 세우는 것"이야 말로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오류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 할 수 있는 용기를 포함한 인간 정신의 개선이 담긴 체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오언이 말하는 합리성이라는 것은 설사 뼈를 깎는 노력은 아니라 할지라도 개인의 의미 있는 성찰을 전제한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성과는 그 궤가 다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글 말미에 오언이 경고하는 인간 무지의 증거들은 꽤 면밀합니다. 더욱이 글 후반부에 드러나는 국가의 잘못은 그 시대의 고찰이라고 할지라도 현재에 있어서도 부합하는 측면이 있기도 합니다. 당시 제국주의 하에 있던 영국 정부가 국민의 이익에 등한시했다는 점과 정치 권력 마찬가지로 국민의 이익에 별반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그의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데요. 다만, 오언의 토머스 멜서스에 대한 의견 합치는 저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빈민에 대한 구제 혹은 가난한 계층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우리 시대와는 큰 차이가 있고, 오늘날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의 가난이 오로지 그 개인에게만 국한된 책임은 아니라는 점은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규명된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오언의 다른 주장들 보다 가장 크게 동의하게 된 부분은 "노동 수요와 그 가치에 바람직하지 못한 벼노하를 가져오는 범죄와 고통을 막으려면, 국민의 복지를 성실하게 돌보고 희망하는 사람 모두가 즉시 일할 수 있도록 국가에 참으로 유용한 영구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모든 정부의 최우선 과제여야 한다"는 꽤 대단한 제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점에서 지배 엘리트들을 비롯 지식인들조차도 자본주의적 논리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앞으로의 삶에 있어 직업과 노동의 문제는 개인들이 알아서 풀어야 할 숙제로 더욱더 국한되지 않을까 하는 억측을 또 곱씹게 됩니다.
디킨스는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가정, 인간의 성격이 유전적으로 결정된다는 가정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봤다.
사악함이나 해로운 행동이 예방될 수 없거나 지금 성장하는 세대에게 가장 합리적인 습관을 널리 보급할 수 없다는 얘기는 이제 그만두자. 지금 죄를 짓는 사람들의 잘못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그가 자라온 제도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얘기하면 주민들을 위해 실행된 것은 여전히 아주 적었다. 사람들은 가장 가치 있는 가정 내의 습관과 사회적인 습관을, 즉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나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법, 집을 항상 깨끗하고 정돈된 상태로 유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이들을 주의 깊이 관찰해 온 사람은 아이들이 대부분의 선과 악을 이 초기 단계에 배우거나 몸에 익힌다는 점을 하나같이 알고 있다.
각 개인이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형성하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습관 모두를 책임져야 하고, 특정 행위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을 받는다는 생각과 그에 따른 실천은, 옛날부터 전해온 세상의 관례였다.
어린 정신이 그런 교육을 제대로 준비하는 시간에, 교사는 조금의 일탈도 허용하지 말고 각 개인의 이익과 행복이 다른 모든 개인의 이익이나 행복과 분명하게 분리될 수 없고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
전 세계를 가르쳐왔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는 교리들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의 정신적인 자비심을 완전하고도 영원히 제거해야만 했고 그렇게 해왔다.
지금까지 인류의 불행이 이 정도로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대다수 인류가 배워온 모든 체계의 이런 근본적인 오류들 때문이다.
국가 발전의 다음 조치는 하층민을 무지하게 방치하고 그들을 무절제하도록 길들이며, 게으름과 도박, 가난, 질병, 살인으로 이끄는 법률들을 폐지하거나 개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을 지배해 온 체계 또는 인간을 비합리적으로 비참한 존재로 길러온 체계에서 무지가 만들어온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그리고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에 옮기며 그 오류에서 벗어난 체계를 확고하게 세우는 것은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것을 인류에게 반드시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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