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봉기 사회학 고전 시리즈 6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정헌주 옮김 / 간디서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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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과거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문필가였습니다. 그는 지난 유럽의 격동의 시기라고 볼 수 있는 20세기 전반에 여러 문필 활동을 했는데요. 이 시기는 그의 모국인 스페인에게 있어 군주제와 공화제 및 독재 사이를 오가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때였습니다. 그는 특히 에드문드 후설에게 큰 영향을 받아, 그만의 독창적인 지적 원동력이 되었던 사실주의적 역사주의에 몰입했고 이는 당시 세계가 자유주의의 흐름에 놓여 있었을 때, 자유주의를 비판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지식인들이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이 역사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평생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현실 정치에 있어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스페인 제2공화국 제헌의회에서 레온 주 의원을 활동하기도 했으나 곧 정치에 대해 실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의 주요 사상은 존 스튜어트 밀의 개인의 합리적 이익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를 지지하고 그런 연유에서 '대중의 분석'에 대해 학문적 역량을 기울인 인물로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a rebelión de las masas"로 지난 193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본은 스페인어 출판본이 아니라, 영역본인 "The Revolt of The Masses, 1932"를 바탕으로 번역됩니다. 이 논저의 국내 출간은 2022년 10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논저는, 1929년부터 일간지 태양 El Sol에 기고한 글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예술가협에서 두 차례 걸쳐 행한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나오게 된 당시 유럽은 파시즘과 볼셰비즘이라는 불행한 역사적 파고 앞에 놓여 있었고, 가세트와 같은 논쟁적인 대중론은 여실히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자에게 영감이 되었던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다만, 이 대중의 봉기에서도 대중들이 '폭력'에 몰두하는 등의 군중과 다름없는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이 글의 9장에서, 전문가 그룹의 교양을 결여한 '야만적인 상태'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는 점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논의되고 있는 저자의 진술들 모두를 수긍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에 대입해 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대중 정치의 한계 혹은 민주주의적 참여 정치의 불가능성을 논법한 5장의 "보통선거 제도 하에서는 대중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집단이 결정하는 것을 후원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라는 분석은 귀담아 들을 만 했습니다. 18세기를 지나 당시 유럽을 변혁의 길로 이끈 자유주의는 귀족이 지방과 국가 전체에 큰 기여를 했던 전(前)시대와는 분명 다른 역사시대적 맥락이었습니다. 유럽의 귀족주의가 17세기와 18세기 초엽의 프랑스를 비롯한 사회적 부패의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런 귀족들이 몇세기에 걸쳐 그 시대에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기여한 점을 명백히 하고 있었는데요. 그의 이런 주장들은 앞서 언급한 전문가 집단의 몰교양과 관련하여 오로지 자신의 분야에 집착하고 그것의 큰 권위를 얻은 전문가들이 몇 시대 전의 귀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고 다시금 평가합니다.

이미 5장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현 시대의 번영과 관련해,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자유 민주주의가 최선의 유형이 아닐지라도 과거의 체제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본질의 차원에서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가 추동한 일반적인 삶의 발전은 이보다 낮은 수준의 삶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사활적인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가운데 대중의 삶 전반이 현실에 위축되지 않고 보다 자신의 삶에 대한 존중과 인정 가운데 점진적으로 나아간 것인데요. 사회 조직적인 측면에서 대중이 자신들이 처한 입장과 사회가 본질적으로 변화가 된 이유를 지식인 계층보다 더 분석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삶'에 있어 대중이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과거 프랑스 혁명의 대중의 직접적인 봉기는 자신들의 삶을 무너뜨린 구체제에 대한 분노였다면 저자가 말하는 그 이후의 대중은 그의 말마따나 여전히 야만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각자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쟁취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귀족의 시대에 대한 얼마간의 회고는 바로 이러한 인식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자유주의가 일정 부분 변화시킨 세계는 법과 규율 아래 사회가 요구하는 금도를 지키며 살아가는 대중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와 같은 지식인 계급에게는 이러한 현실이 명과 암이 교차하는 현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대중이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게 되는 폭력적 상황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가운데 사회 전반을 통제했던 귀족주의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즉, 계급적인 귀족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넘어서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과 동의어로 간주한다"는 저자의 해석은 귀족의 다의성을 짐작하게 하는데요. 우리가 전근대적인 과거 귀족 계급의 폐해를 잠시나마 뒤로 물리고 진정한 귀족이 사라진 시대에서 대중이 소위 봉기하는 상황에 존 스튜어트 밀이 긍정한 자유주의적 대중의 시대를 마냥 받아들이긴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저자가 강조하는 대중에 대한 (부정적인) 진면목은 바로 교양이 결여된 야만적인 상태라는 점일 텐데요. 교양 자체는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그런 가운데 한편으론 저자가 바라는 "적과의 공존 혹은 반대 세력과의 협치"와 같은 유연한 정치 형태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 부호를 찍고 있습니다. 이 8장의 논증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한 사람인 토머스 제퍼슨의 우려와도 맞닿아 있는데요. 자유주의적 이행의 한복판에서 소위 일반 대중들을 포함한 다수가 소수의 그룹을 무력으로 억압하거나 발언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어떻게 하면 방지할 수 있을지 그러한 고민이 여기에도 담겨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의 말대로 자유주의가 다수가 소수의 권리를 마땅히 인정하는 체계라면 모든 대중들은 이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겁니다. 결국 평생의 교육과 관련된 대중들이 더욱 교양과 가까워지는 길은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지금까지 구축해 온 사회와 국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역사와 문화를 비롯한 상식과 지혜를 갖추는데 노력해야 됨은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민주주의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덕목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대중 정치에 대한 일부 엘리트들의 숱한 경멸과 비난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자본주의조차도 해결해 주지 않는 사회 전반에 있어 자본과 정치의 결탁을 방지하는데 대중 혹은 시민의 스스로에 대한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어지는 파시즘과 볼셰비즘에 대한 저자의 비판 또한 당시에 어떤 지식인의 경고보다도 확실한 비판을 이 글에 담고 있습니다. 이 양자는 미래를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연연하고 그런 측면에서 반동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겠는데요. "볼셰비즘과 파시즘 둘다 거짓 여명이다"는 진술은 이처럼 설득적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강을 마주 보고 앞에 있는 자유주의와 그것의 이질적인 존재인 반자유주의 혹은 비자유주의는 유럽을 파괴하여 절멸에 이르게 한다는 경고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 글이 전유럽을 다시금 비참한 전쟁으로 이끈 제2차 세계대전을 목도하기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후에 카를 슈미트가 분석한 자유주의의 나약함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지언정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반자유주의가 출몰할 때 유럽이 어떠한 상황에 놓였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중과 자유주의'라는 주제로 이 글을 일독하게 되면 논증의 일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명확히 살펴볼 수는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나 작금의 소수 지배 계급이 통제되지 않는 대중에 대한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데요. 저자의 언급대로 인간이 항상 폭력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이를 대중과 부정적인 측면에 연결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런 대중을 있게 한 원천이 자유주의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면 저자의 비판적 인식이 좀 더 수정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가 그토록 두려워 하는 '야만의 상태'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전문가 그룹의 결여된 교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선출된 국민 국가의 근본적인 변혁은 당시 유럽에 있어 크나큰 혁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혁명이라면 어떠한 것이든 게거품을 물었던 당시 일각을 고려해 본다면 뒤이어 역사에 등장할 '민족주의의 폭력적 기운'과 이에 다시금 동조한 국민 국가의 몰락은 어쩌면 치명적인 교훈으로 자리매김하기에 하등 부족하지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의 대중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세계가 어떠한 변혁을 맞이하고 그로 인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가 어떻게 생존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는 어쩌면 지식인의 사명일 수도 있겠습니다. 역사에 기초했지만 시대의 불안을 초래하는 급격한 변화를 누군가는 예견해야만 한다는 절박한 심정은 '대중의 봉기'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이 책을 '봉기'보다는 '대두'로 바꾸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한데요. 원제가 '반란'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저의 이런 해석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다시금 '야만의 상태'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 논저가 읽혔으면 합니다. 특히, 극단주의의 앞머리에 노출되어 있는 현재 유럽은 가세트의 글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더욱이 카를 슈미트 식의 대결주의는 더욱더 정치적 분별력을 발휘해 해쳐 나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글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쉽게도 번역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 문장들마다 어색한 부분이 곳곳에 보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특정 조사의 반복적인 사용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왜 원서를 바로 번역하지 않고 중역(사실상)을 했는지 조금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군중이나 대중이 아닌 소수집단은 대다수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구성원들 간에 욕망이나 이념, 이상 등을 효과적으로 일치시키려 한다.

유럽에서 대중이 승리하고 그에 따라 생활수준이 엄청나게 향상된 것은 내부적인 이유, 즉 두 세기에 걸친 사회의 진보에 따른 경제 향상과 대중교육 탓이다.

대중의 봉기는 흔히 유럽의 몰락을 가져온다고 말하는데 이와 반대로 유럽에 엄청난 활력과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세기는 자신의 시대가 ‘절정‘에 달했다고 느낀 반면 어떤 세기는 수준이 높은 시대, 예컨대 아득히 먼 찬란한 황금시대보다 수준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보통선거 제도 하에서는 대중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집단이 결정하는 것을 후원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어느 시대나 ‘보통사람‘에게 ‘삶‘은 기본적으로 제약과 의무, 의존, 한마디로 압박을 수반했다.

식료품 부족으로 인한 혼란 상황에서 폭도들은 빵을 찾으러 다니면서 때때로 빵집을 부수곤 한다.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자신을 후원해주는 문명에 맞서 대대적으로 취하는 복잡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귀족이라는 말을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넘어서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과 동의어로 간주한다.

19세기는 자동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냈고 그에게 엄청난 욕구와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온갖 종류의 강력한 수단을 부여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대중은 우연하게 얻은 진부한 상식, 편견, 엉터리 관념 또는 공허한 말을 가슴속에 수북이 채워놓고서 그것들을 순진할 정도로 대담하게 아무데나 들이댄다.

즉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권위에 호소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며 그것의 규약과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하며, 따라서 최고의 상호교류 형태는 우리 사상의 근거를 가지고 논의하는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유럽과 그 주변 지대에서 태동하고 있는 볼셰비즘과 파시즘이 두 ‘새로운‘정치적 시도는 근본적인 퇴행을 보여주는 명백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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