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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맞고 너희는 틀렸다 - 똑똑한 사람들은 왜 민주주의에 해로운가
마이클 린치 지음, 황성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6월
평점 :
미국 코네티컷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마이클 린치는 미국 상원에 출석할 정도로 학자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시라큐스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곧 강단에 서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에는 대중 담론의 비판적 분석에 뛰어난 공헌을 한 작가에게 수여하는 조지 오웰 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담론에 큰 관심을 갖고 있고, 거의 처음으로 다원론적 진리 이론을 도출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 그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차츰 쓰이고 있는 '빅 데이터 이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요. 린치가 다원론적 진리 이론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보건대,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입장이 여느 학자들에 비해 차원이 다르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리인가에 대해 무엇보다 성찰적 실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의 글을 충분히 일독할 이유가 된다고 여겨집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Know It All Society : Truth and Arrogance in Political Culture"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0년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글의 원제와도 관련되어 있는, "now-it-all"은 실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분명 이와 같은 현상은 반쯤 농담에 가까울 테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현재 미국 사회가 진실을 오도하면서 가히 오만하고 독단적인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전에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이런 현상에 대해 명백히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미 저자도 번스타인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기에 이르는데요, 무엇보다 미국 사회철학에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존 듀이의 선구자적 업적을 무색해 하는 이런 행위들은 크게는 미국 정치를 쇠락으로 이끄는 중입니다. 특히, 오만한 백인 우월주의가 어떻게 사회 내에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이를 추종하는 다수의 백인들이 전혀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이 글 6장을 통해 입증되고 있습니다. 린치는 자신의 이 글에서 언급하는 내용들이 대체적으로 애즈라 클라인의 논저와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어느 정도 설득력이 부족한 공격과 더불어, 극단주의자들의 명백한 공격성이 사회 내부에서 제어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은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또한 이를 통한 정치적 양극화가 전혀 통제가 되지 않고 있는 현실도 심각한 문제인데요. 다만, 린치는 오늘날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철학적인 접근에서 상대방을 표용하지 못하는 보다 다층적인 문제에 접근해 보려는 모양새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저는 여성 혐오와 다른 인종에 대한 명백한 배격과 혐오에 빠져 있는 일부 시민들과 이 책에서 논하는 바대로 대화가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맞붙었던 2016년 말에, 민주당과 관련한 한 가지 괴담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것은 워싱턴 DC의 어느 피자 가게에서 민주당 정치인들이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한다는 상당히 기괴한 음모론이었습니다. 보통 기본적인 상식으로 이러한 음모론이 가당치 않다는 점은 많은 분들이 인정하고 있으실 텐데요. 그런데 트럼프를 지지하는 극단주의자들과 일반적인 공화당 지지자들까지 이 음모론을 거의 기정 사실인 양 믿었습니다. 이러한 괴담은 순식간에 여러 SNS를 통해 퍼져나가게 되었는데요. 이미 저자인 린치를 비롯, 많은 사회학자들이 오늘날 SNS가 거짓 뉴스와 선동의 장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인 소셜미디어가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적 논리에 맞게 오로지 개인의 사익을 위해 편파적이고 황당한 소문들을 확대 재생산하는 매개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물론 현실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존 듀이가 설파한대로 우리가 정치적 분별력을 갖고 있었다면 거대 인터넷 기업의 이런 SNS에서의 괴담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문제는 저자가 6장에서 논의하는 바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거짓들을 규명하기 위한 시간이 거의 주어지지 않고 있으며, 저자가 강조하는 성찰적 실천이 필요한 각각의 개인들이 오로지 작은 핸드폰 화면에만 몰두해 있는 상황은 시민들 간의 '격의 없는 대화'가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을 자본주의에 의한 개인의 소외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만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대안을 내놓기가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대체적인 정치 권력자를 포함한 다수의 시민들까지 앞서 희화화한 'know it all' 현상은 그저 멀리 있는 현상은 아닐 겁니다. 이에 저자는 4장에서 이 오만함이라는 문제가 크게 민주주의를 어떻게 붕괴 시킬 수 있는지 논증을 더하고 있는데요.. 과거 나치 독일에서 권력자가 시민의 이익에 대해 무지했고 마찬가지로 시민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에 관심이 없었던 점은 일차적으로 선동가의 의지에 따라 체제가 왜곡되어 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순수한 게르만인에 의한 독일이라는 인종적 구호에 따라 수많은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내몬 것은 자신들의 입장과 태도가 지극히 선(善)과 다름없다는 오만함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토대로 지금 유럽에 불고 있는 네오 나치와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대략 추정해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일전에 트럼프가 "미국에 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이 항상 선량한 것 만은 아니다"라는 주장과 맞물려 지극히 오만한 인종주의와 다름 없는 헛소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다수의 미국 백인들이 지금의 미국에서 흑백 갈등과 흑인과 백인 간의 불평등이 과연 존재하느냐고 반문하는 행태와 더불어 소수 인종이나 여성이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노골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백인 남성을 포함한 일부 계층의 잘못된 신념은 작금의 미국을 극단적인 분열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글 초반에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과연 건실한 대화가 가능할 것인가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런 이유 떄문인데요. 물론 저자는 진실에 대한 개방성과 개인의 성찰을 바탕으로 이를 어느 정도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듯 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연상되는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미국 교회의 끝모를 오만함 또한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기존의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상당히 오만했고, 이 글 5장 말미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태도로 말미암아 보수 우파는 한술 더 떠 자유주의와 진보주의를 경멸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일침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진보와 보수 혹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양쪽이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식의 책임론으로 규정되기도 하는데요. 근데 다만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비롯 냉전시기에서 진보주의가 거의 유명무실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인 린치의 해석이 현실적으로 합당한지는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 자체를 나약한 것으로 이해했던 카를 슈미트는 과거 자신이 벌인 짓거리를 전혀 반성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늘날 피아 식별의 극단적인 정치의 명백한 시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 과거 유럽에서 잉태되어 끝내 인간을 해방시킨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회의와는 별개로 자유 자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자유가 더욱 변질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의 언급대로 민주주의가 이성의 논리로 기반해야 하지만 3장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논증한 거의 종교적 믿음과 다름없는 비합리적인 확신에 사로잡힌 개개인들이 이성적인 측면의 정상적인 타협과 대화의 기본 인식을 뿌리 채 뽑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자유와 자유주의에 있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는 거의 명약관화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릇된 믿음이 기반이 된 자기 확신 또한 민주주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분명한데요. 사회진화론에 부정적인 기여를 한 토머스 멜서스와 마찬가지로 "남부의 백인 남성이 유전적, 도덕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강화"한 일부 학자들의 논법은 시민들에게 부정적인 여파를 끼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의 개방성과 사회과학의 여러 진리들을 언급하며 일반적인 개인이 학문과 진실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만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이론에 상대방이나 다른 사람이 반론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보다 진지한 태도를 견지할 의무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무오류성'이라는 이론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단순히 지지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자기 확신을 더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과연 이러한 자기 확신적 태도를 전혀 바꿀 가능성이 없는 계층과 사람들을 어떻게 개방적인 공론장의 무대로 이끌어 낼 수 있을지는 대략 요원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 차원을 넘어 극단주의에 대한 다수 시민들의 일관되고 공통된 의견이 먼저 수립되어야만 한다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이는 오늘날 정치 현실을 명확히 설명한 이안 브레머의 기존 주장과 함께 기존의 정치 무대에 들어선 극우 포퓰리즘 혹은 우파의 극단주의에 대해 시민들이 얼마나 정치적 분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에 따라 앞으로 다음 몇 세대의 민주주의 건전성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은 전반적으로 오늘날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 행태와 이를 더욱 조장하는 인터넷을 비롯한 정치적 발언의 획기적인 변화가 철학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이런 상황에 주도적으로 발언을 드러내는 다수 시민들의 행태가 우리의 정치에게 있어 어떤 영향이 될 것인지에 대해 전망과 대안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실과 겸손함을 바탕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이에 따라 정치가 시민들의 정치적 태도 변화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는데요. 과거 불행한 나치 시대를 잉태한 전간기의 민주주의를 경멸한 괴벨스의 이런 비아냥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뼈아픈 고통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비화할 필요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이런 글들에서 교훈을 찾는 것이 시민들에게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다수의 시민들은 제2의 전체주의를 몸소 겪어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존 듀이의 선명한 주장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욱 교육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3장과 4장은 오늘날 현실 정치의 근본적인 원인을 독자들에게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따로 단행본으로 추려도 될 만큼 논증이 훌륭했는데요. 이에 많은 분들이 읽어 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게 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실‘로 여길지 합의가 없을 때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실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진실과 확신에 대한 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좌파에서든 우파에서든 오만함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와 그들‘을 넘어 ‘그들 위에 있는 우리‘라는 문화적 서사를 선전함으로써 우리의 공포와 욕구를 이용한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더 큰 사회적 맥락에 스며 있는 여타 차별적인 연상들이 서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너무 심하게 증오한 나머지 급기야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실제보다 더 많이 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는 노력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단지 정보 문화가 너무 부패해서 진실과 증거에 대한 자기기만적인 태도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백인 남성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경제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미국의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이에 해당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듯 그렇게 까지 노골적인 인종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는 아니라고 정당하게 지적한다.
정치가 오로지 권력과 파벌 싸움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은 서글플 정도로 흔하다. 그리고 이는 정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전쟁이라는 마키아벨리의 관점을 공유하는, 어두운 시각이기도 하다. 20세기에 이 사고를 철학적 관점에서 지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악명 높은 나치 정치 이론가 카를 슈미트였다.
특히 2016년 봄에 진보주의자들의 저녁 만찬 파티에서는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를 선출할 정도로 ‘멍청하지/인종주의적이지/성차별적이지‘않다는 일반적인 통념이 지배적이었다.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진지하게 여길 리 없었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나치의 선동을 책임졌던 괴벨스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훌륭한 농담은 민주주의가 자신의 적들에게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수단을 주었다는 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모든 것 알지 못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편견과 추정에 입각한 것일 수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듀이와 아렌트 모두 민주주의는 일종의 공동 공간, 폭력이나 억업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의견차를 탐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민주주의는 이성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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