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보수의 역사
로저 스크러턴 지음, 이재학 옮김 / 돌밭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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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 버톤 스크러튼은 영국 링컨셔의 작은 도시인 버슬링소프에서 태어나, 위컴에서 두 자매와 함께 자라났습니다. 그는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로열 그래머스쿨에서 수학했고, 이 시기에 응용 수학, 물리학 및 화학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런 결과로 케임브리지에 합격하게 됩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 과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도덕 철학을 비롯한 서양 근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요. 이후 그의 이력은 철학과 사회사상, 정치철학 등으로 채우게 됩니다. 특히 1982년부터 대처리즘에 반대하는 전통적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전문 저널인 솔즈베리 리뷰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게 되는데요. 그의 보수주의적 사상은 이곳 솔즈베리 리뷰를 통해, 핵 군축 캠페인, 평등주의, 페미니즘, 대외 원조, 다문화주의, 모더니즘 등에 매우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Conservatism : An Invitation to the Great Tradition"으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작년인, 2022년 12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먼저 이 책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데요. 일단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에 논하는 글들 중 수위를 다툴만한 평이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더욱이 이렇게 접하기 쉬운 글들은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에 대해 개념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분들께는 분명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실 있을 것 같은데요. 다만,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분들이 무엇보다 '건전한 보수'를 원한고 있다는 측면에서, 예전의 '전통주의적인 보수가 과연 오늘날과 같은 현대 사회에 유용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외에도 이 글에 대해 안타까운 점은, 보수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여파 때문인지 아직도 '평등'에 대해 단순히 부정적 입장 만을 피력한 채, 현재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가 초래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 사실상 눈을 감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들 틈 속에서 평등을 외치는 것은 소위 이념적 일관성에 위배되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배타적 민족주의에 대해 별반 의견을 내지 않는 자칭 보수주의자가 태반인 걸 감안한다면 극단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구분이 요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저자기 이 글 5장, '사회주의에서 맞서다'에서 이를 항변하고 있긴 한데요. 이는 거의 자유주의 세력권에 의한 사실상의 사회주의 봉쇄라는 역사적 사실인데, 여기에 굳이 보수주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같은 맥락으로 현재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어느 정도는 구분이 힘들다는 점에서 스크러튼의 이 글이 그 만큼의 통찰이 될지도 꽤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특히 스크러튼의 논증을 통해 평등과 관련된 보수주의의 입장을 예측해 본다면 이들 보수주의가 일정 부분 민주주의를 탐탁치 않게 바라보는 전제라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개인적 자유주의의 시대가 도래된 시점에서 이 자유주의 맥락의 개인주의를 경계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보수주의의 책임이라고 저자는 평가하면서도 후반부에 갑자기 자유주의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부분은, 계획된 책의 분량으로 인한 근거의 미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도 아쉬운 논증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3장에서 이미 스크러튼이 인용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진정한 자유라는 함의는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이러한 자율성이라는 의식은 어느 정도는 계몽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를 다른 말로 풀어보자면 인간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계몽주의 시기에 크게 변화를 맞이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주제도 이 시기에 잉태되었다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인간이 과연 합리적일 수 있겠느냐에 대해 큰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장 자크 루소가 견지한 공화주의적 계약론에 대해 일정 부분 인정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상가 마다 루소를 비판할 수도 있지만 루소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여타 사회계약론과 공화주의에 대한 인식적 거부로 이어질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저자 역시 일관되게 극단적인 자유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펼치고 있긴 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전체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거부하는 논증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 정도의 당연한 발언들이 건전한 보수주의의 기준이라면 기준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데이빗 코츠에 의견대로 신자유주의와 한 몸이 된 보수주의가 과연 '시장 근본주의에 준하는 이런 상황`를 공동체를 위해, 실제적으로 거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상당한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체주의가 극렬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로 불타올라, 전세계에 엄청난 파국을 초래했다면, "보수주의는 이 민족주의를 과연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보수주의는 이 민족이라는 관념을 '자유' 이상으로 심도 있게 다뤄야만 한다고 판단됩니다. 민족과 공동체, 전통적인 가족제도, 종교적 경건주의 같은 것이 보수주의가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 민족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이죠. 더욱이 이 글에서 숱하게 언급되는 자유에 대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와 스크러튼이 말하는 전통적 보수주의가 서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친절한 설명과는 앞선 민족에 대한 태도가 영 부실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스크러튼은 서두에서 아마도 보수주의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고려해서인지, 아주 명확하게 보수는 반동과는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강조는 글 말미에서 어느 한 인물(카를 슈미트)을 애매하게 평가하면서부터 그의 진정성은 훼손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그저 위선적 논법이라고 단순히 폄하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에드먼드 버크가 오래전부터 사회에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이 '사회적 지식의 형태들'로서, 이것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입장과 보수주의의 생각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카를 슈미트가 일전에 독일 사회에 보인 일관된 관점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죠. 이것과는 별개로 전반적인 논증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공리주의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보수주의의 중요한 사상적인 틀이 되었던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연유로 보수주의는 공동체를 위한 이익이나 전통적인 토대, 구성원들이 인정하는 사회 규범 등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한낱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무라는 단어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선 맥락을 이해한다면 스크러튼이 왜 1980년대에 맹위를 떨친 '대처리즘'에 반대했는지 어느 정도 수긍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극대화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이 어쩌면 사회 건전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스크러튼 자신이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사상인 이 보수주의를 여러 논증을 통해, 지금은 퇴색된 전통적 보수주의에 대해 독자들에게 쉽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목적일 겁니다. 제가 일부 논증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은 애덤 스미스에 대한 인용이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다른 중요한 저작인 도덕감정론을 감안한다면 보수주의와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 대한 기계적 설득을 위해 너무 남용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손'도 그렇고 보수주의가 사실상 용인하고 인식하는 사회적 연대의 그 사상적 기반이 '사유 재산'에 있다는 부분도 그 근거가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스크러튼이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집단 문제에 대한 쉬운 해결책'이라고 여겼던 모양인데요. 이 부분에 대한 확장된 근거가 보이지 않는 손 내지는 사유 재산을 통한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긍정적 기대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고인이 된 스크러튼에게 묻고 싶은 것은, 2008년에 전세계를 휩쓴 경제 위기에서, 이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금융 자본주의를 자기들 손에 넣고 쥐락펴락한 경제 엘리트들의 부패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과연 인간의 탐욕에 대한 문제를 개인의 합리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소수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반문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저자는 글 말미에 레오 스트라우스와 카를 슈미트를 언급하며, 마치 현재의 보수주의적 맥락에 사상적 기여를 한 인물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언급했지만 특히 카를 슈미트를 여기에 우겨 놓은 것은 몹시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가치와 보수주의가 이를 긍정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하지만, 억지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연대를 논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의 승자 독식 자본주의를 나날이 강화시킨 신자유주의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보수주의 자체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입장에서 객관적일 수 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시민 공동체의 파편화와 고립을 만들어 내고, 평범한 시민의 삶을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내몬 것으로도 모자라, "이것은 모두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온전히 너희의 몫이다"라고 편의적으로 사회에 강요해 왔습니다. 본문에서 논증 되는 것처럼, 어느 정도 법과 제도는 유한성을 갖고 있는 반면, 보수주의가 추동하는 중요한 가치들은 본질적으로 전세계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면에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사실상 결탁했다는 그레이스 블레이클리와 같은 학자들의 주장에 보수주의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더욱더 (전통적) 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 분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러한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식대로 민주주의를 분석해 보는 행위 자체도 꽤나 편협하고 낡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비웃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글의 마무리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이지만 저 역시 건전한 보수는 사회에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실상 보수주의는 애초에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만 그들이 기대하는 보수주의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특유의 보수주의자답게 토머스 페인이 과대평가 되었으며, 다소간 재평가를 받아야한다고 논증을 펼치고 있는데요. 물론 저는 이에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글 6장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분도 인간의 사상의 자유, 생각할 자유, 발언할 자유가 극도의 혐오에 이르고, 끊없이 누군가를 도태시키고 증오하고 혐오하는 권리가 과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지금도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최근 서평을 쓴 에즈라 클라인의 글이 다시 생각날 정도였는데요. 최근 대안 우파와 트럼프주의자들이 앵무새처럼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난과는 조금 다른 건설적인 의견 개진이 가능할 줄 알았지만 이 부분도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보수주의는 계몽운동의 시기에 지나친 자유주의적 새인주의를 견제할 필요성 때문에 등장했다.

우선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지상론자들이 서로 대립했다.

보수주의자들도 인간의 이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공유한다. 정치적 삶의 한 가지 목적은 이성의 행사를 가다듬고, 그 이성의 집단적 행사에 필요한 미덕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는데 있다는 것 그들도 인정한다.

우리가 의무를 계약에 따른 책임이라고 해석한다면, 모든 합리적 존재는 반드시 계약을 수용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그 의무를 정당화하게 된다.

칸트는 비록 언제나 권리나 해방보다는 의무와 법을 강조했지만 대체로 당시 부상하던 자유주의적 정론들과 일치하는 일종의 급진적인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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