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미디어 프리즘
크리스 베일 지음, 서미나 옮김 / 상상스퀘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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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앤드류 베일은 하버드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사회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에 소재한 듀크대 사회학 및 공공 정책 데이터 과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떠오르고 있는 컴퓨팅 사회 과학 분야의 선구자로 미디어 데이터와 봇과 같은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사회 심리학 및 극단주의와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으로 지난 202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베일의 이 논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반향실 효과와 그에 따른 오늘날 극단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인데요. 사실 개인적인 의문이기도 합니다만 저자의 희망대로 많은 개인들의 삶에 깊게 파고든 페이스 북과 같은 SNS들이 작금의 극단주의의 베드라는 오명을 불식시키고, 보다 현실 정치에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합니다. 글의 도입부인 1장과 2장의 반향실 효과에 대한 이 연구자의 실험은 오늘날 SNS가 어떻게 극단주의자들의 요람이 되었는지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일례라고 생각하는데요. 모든 개인은 자신의 이성에 따라 각자가 정치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한 판단을 자유롭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을 근본적인 양심의 존재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각각의 양심이 위르겐 하버마스로부터 기인한 귀족 사회의 '살롱 대화'가 공론장의 단초가 되었듯, 마찬가지로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시민들 간의 활발한 정치적 토론은 체제의 건전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 저 개인적으로는 과거 히틀러에게 상당한 영감을 안겨 준, 사실상 민주주의를 어리석은 정치로 깎아 내린 '우둔한 대중'에 대한 대중심리학적 이론 전반을 앵무새처럼 밝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많은 시민들이 이렇게 인터넷 기반의 기술이 과거보다 월등히 발전한 시대에서 각각의 올바른 정치적 사고를 근본적으로 방해하는 요소들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점은 '반향실 효과'를 통한 저자의 연구에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미 2장에서, "오래전부터 사회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설명할 때 전후 인과의 오류를 범하고 부정확하게 합리하화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진술 자체는 아마도 인간은 누구나 비이성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는 전제와도 맞닿아 있는 듯 여겨집니다. 더욱이 리처드 J. 번스타인은 철학적인 접근에서 인간이 종래에 견지하고 있던 주의나 학설들이 나중에 그것이 오류로 밝혀진다면 각각의 개인은 이를 복기하여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어쩌면 번스타인의 주장처럼 그것이 가능한 일반 시민은 아마도 일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4장에서 저자가 풀어내는 '비이성적인 대중'에 대한 주된 분석이 현재 우리의 한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이 시대는 시민들이 오랜 시간을 기울여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을 하기도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관되게 주지되고 있는 이 극단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사례들을 다수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 당의 정치를 단순히 극단으로 놓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개인적으로 약간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요. 또한 미국에 '극단주의적 좌파'가 과연 존재하는지도 매우 의구심이 듭니다. 다만,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정치적 진정성이 고작 한 사람으로 인해 건전성을 답보하기가 어려워졌고, 이런 일종의 반동 정치를 오로지 권력만을 위해 극우화 된 공화당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물론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을 지지하는 각각의 시민들이 정당의 기본적인 정책이나 정치적 의견 등과 관련해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5장에서 이미 이론과 다른 현실에서의 왜곡을 비판적으로 설명한 '극단주의라는 광신적 종교 집단'은 양 당의 극단주의자들이 정치적 적수를 공격하는 계획을 짜면서 유대감을 강화하는 한편, 현재의 극단주의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반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한 이들 극단주의자들의 왜곡된 프리즘은 "자기 정당의 극단주의는 정상으로 여기고 상대 정당의 극단주의는 과장하는 식"으로 작동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SNS상에서의 옹졸하고 비이성적인 언행과 행위들은 결국 무대에서 중도와 온건주의자들을 전부 퇴출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카를 슈미트는 자유주의가 소위 만연된 사회에 대해 일종의 허무감을 섞어 경멸한 인물입니다. 특히나 이를 위해 그가 어떻게 유대인 교수들을 강단에서 쫓아 냈는지 역사는 기록하고 있는데요. 트럼프의 참모라고 불렸던 스티브 배넌이 트럼프의 지지자들에게 대화가 아닌 총을 들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처럼 미국 내의 극우 포퓰리즘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슈미트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트럼프의 등장은 미국 정치를 혼돈으로 이끌고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정치적으로 온건한 시민들을 사실상 구축하게 되었는데요. 미국 역시 오래전부터 정치 불신이 심각했지만 정치적 분별력을 잃은 많은 시민들이 극단주의에 경도 되어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시민들 사이에서 극우주의자들이 자연스레 도태가 되지 않고, SNS를 기반으로 나날이 저변을 확대하고 있으니 이것을 곧이곧대로 '어리석은 정치'로 시민 사회가 함께 산화 되어 버리는 '붕괴 현상'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반쯤 농담처럼 마크 저커버그가 하루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을 프리즘에 비춰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아무리 온라인 상이라고 할지라도 내 언행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다름 없는데요. 문제는 8장에서 이미 저자가 꼬집고 있듯이, "현재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는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이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을 건설적인 방법으로 논의할 만한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지난 2차 대전에서 극단주의가 몰고 온 참혹한 전체주의의 교훈을 벌써 망각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키케로가 이미 비슷하게 언급한 '이성적이고 명민한 시민들'이 정치적 토론에 대한 무엇보다 개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하지만 현실은 다수의 온건한 시민들을 더욱 현실 정치에서 쫓아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더 이상 활개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념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최소한 대화 상대로 여기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만 극단적인 '대결주의'가 주류 정치의 핵심 사항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극우와 다름없는 인종주의와 종교적 다양성을 잃어버린 기독교 근본주의가 점차 미국 정치 무대에 우세한 세를 과시하면서 무엇보다 미국 민주주의에 위기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노엄 촘스키는 이에 대해 그나마 미국 사회가 상당히 열려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희망을 엿볼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저자의 제언대로 미국 사회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현재의 정치를 위해 전혀 시스템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대중들의 거대한 중우 정치'를 목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처럼 극단주의자들을 손 끝으로 부리는 선동가들만 남지 않은 정치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될지 두려울 따름입니다.



-7장에서 저자가 재런 러니어를 직접 대면한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러니어도 역시 작금의 소셜미디어가 양극화를 더 강화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택할 수 있기 때문에 근시안적 사고방식을 일으키는 반향실에 갇힌다고들 말한다. 우리 편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노출될수록, 우리는 우리의 신념이 공정하고 합리적이고 신뢰할 만하다고 굳게 믿게 된다.

페이스북, 구글을 비롯한 거대 기업은 유저의 구미에 마즌ㄴ 정보를 더욱 많이 노출함으로써, 기존 가치관과 일치하는 정보를 찾는 유저의 본성을 부추긴다.

소셜 미디어 프리즘은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극단주의자들을 부추기는 동시에 정치 논쟁을 해 봤자 득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도주의자의 입을 다물린다.

오래전부터 사회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보통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설명할 때 전후 인과의 오류를 범하고 부정확하게 합리화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고가 나은 사회를 낯는다는 믿음은 유구하다. 개인이 다양한 사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견을 정립할 때 사회가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이 생각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었다.

페이스 북의 CEO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 유저들이 실제로 가짜 뉴스를 분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가짜 뉴스라는 용어 자체가 정치 논쟁의 불씨인데도 말이다.

유능하지 못하고 부정직하고 비도덕적인 타인과 우리 편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과정에서 자아 존중감은 자주 얻어진다.

우리가 페이스북의 플랫폼을 조금 수정함으로써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의 무례한 논쟁을 7.5 퍼센트 줄이는 대신 광고를 클릭하는 횟수를 5퍼센트 줄이는 방법을 안다고 가정하자. 과연 기업가들과 이사회가 이 방법에 찬성할까?

소셜 미디어에서 정치적 논쟁을 벌이는 사람은 극단적인 관점을 지닌 경우가 많으므로 그들에게 노출될수록 우리는 그들이 온건한 다수라고 착각하기 쉬워진다.

5장에서 설명한 극단주의자들은 광신교 집단 같은 공동체에서 상대방을 도발함으로써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대화가 역효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플랫폼에서 얻는 지위가 고결한 목적과 연결된 소셜 미디어를 상상해 보자. 정치적 적수를 교묘하게 쓰러뜨려서 지위를 얻는 공간이 아니라, 양당 지지자 모두에게 호소력 있는 콘텐치를 만들어서 지위를 얻는 플랫폼을 상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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