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과 밀의 공리주의 시민 교양 신서 1
제러미 벤담.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홍섭 옮김 / 좁쌀한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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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와 판옵티콘으로 잘 알려진 제레미 벤담은 현대 공리주의의 창시자로 당시 사회의 통념을 깨는 진보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유주의의 첫 단추를 꿰맸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스승으로도 유명합니다. 벤담은 부유하지만 보수당을 지지했던 가정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부터 신동으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지금 나이로 갓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에 그는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해, 이후 영국의 유구한 공립학교인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들어가는데요. 1760년, 12세가 되던 해에, 옥스포드의 퀸스 칼리지에 들어갔고, 1764년에 학사 학위를, 1767년에 석사를 마치게 됩니다. 바로 학업을 마치고 1769년에 부친과 마찬가지로 변호사로서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요. 변호사 생활과 당시 영국 법에 크게 실망한 벤담은 1776년부터 논쟁적인 글쓰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날까지 공리주의와 관련해, 그로부터 수많은 '벤담주의자'들을 양성했고 '판옵티콘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후에 미셸 푸코에 큰 영감을 안기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으로 1879년 출간되었고, 여기에 '런던 앤 웨스트민스터 리뷰'에 실린 존 스튜어트 밀의 1838년 '벤담론'이 함께 수록되어 있고, 뒤이어 옮긴이의 해제가 담긴 마지막 장(章)으로 책의 구성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국내 번역은 2018년 2월에 이뤄졌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의 근간을 이루는 헌법들이 어느 정도는 공리주의의 영향을 받은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공리주의에 대한 복잡한 단상을 차치하더라도 이제 흔들리지 않는 체제로서 자리매김한 자본주의 때문인지 아니면 인간이 무엇보다 이기적 존재이기에 '권력을 가지지 못한 다수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사회가 실패한 것은 거의 운명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벤담을 제법 분석한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자면, 사실상 벤담이 반쪽 정도의 진실 만을 수용하여, 온전한 철학적 추론이 아닌 상태에서 공리성을 도출한 것은 사뭇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는 고통과 쾌락이 인간 본성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주인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고통과 쾌락이 인간의 행복에 대한 욕구를 추동하기에 이른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리성에서 개인의 행복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다수의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 일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밀의 벤담론에서 도출된 벤담의 도덕성과 도덕론이 자신이 제시한 도덕 감정 moral sense에 비추어 본다면 그 한계가 명확하지 않나 싶은데요. 인간에게 존재하는 도덕 감정에 대한 벤담의 빈약한 설명은 밀의 말마따나 아쉬운 점이기도 합니다. 이는 벤담이 '금욕주의'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를 고려해 봤을 때, 소위 도덕주의자 그룹에 대한 일종의 벤담의 분류가 공리성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추론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밀의 근거있는 주장처럼 인간에게 있어 도덕이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이것은 제가 많이 언급했던 존 듀이의 입장과도 동일합니다. 반대로 벤담의 논증에 따르면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지식을 넓히지 못하여 편협하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 어쩌면 통렬한 평가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후천적인 교육 자체가 어느 정도 개인에 따라 능사가 아님을 강조하는 점도 한편으론 근거가 부족한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참고로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밀의 '벤담론'은 영국 사법 제도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기존 제도에 대한 그의 개혁적인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그가 당시 사회 각 분야와 더불어 학계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먼저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전반적으로 벤담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밀의 가감 없는 평론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제가 벤담에 대한 밀의 신랄한 비판 중 가장 눈에 들었던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벤담이 어느 정도 인간 관계가 협소한 소위 우물 안의 지식인으로 다양한 인간의 삶과 희노애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채, 공리성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행복'을 언급한 것이고, 두번째로는 벤담론에서 수차례나 언급되고 있는 '인간 본성의 부족한 이해였다"는 평가입니다. 따라서 밀이 벤담에 대해 말하는, "그가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의 위대한 개혁자였다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고백하는 부분에서 일견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이를 간단히 요약해 보면 벤담은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사상가였지만, 그의 독특하고 현실 비판의 여러 중요한 주장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상반된 생각을 갖고 철학자들 혹은 사상가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자신의 주장에서 보다 오류를 줄이는 과정이 벤담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그가 구조적으로 모순이 있는 사회 체제에서 개혁가의 입장으로 자신의 철학적 사고에서 추론한 인간 문제들을 그런 식으로 주장을 펼쳤던 점은 어느 정도는 센세이셔널한 평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밀의 이런 직접적인 평가는 아마도 지근거리에서 벤담을 지켜봤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데요. 어떤 주장에 대한 의견 차이는 서로 간의 토론을 통해서, 나와 상대방의 말이 그저 빈말이 아닌 것을 규명하는 것은 단순히 말의 오고 감이 아니면서 그저 상대방을 구슬리기 위한 방편도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이런 벤담의 철학적 추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 행위의 철학에 세부 분석의 방법, 즉 부분으로 분해하고 나서 전체를 추론하고 실제 사실들로 해석하고 나서 추상적인 것으로 추론하는 방법"은 벤담의 소위 학문적 탐구 방법의 요체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쾌락과 고통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과 상당한 분류법은 그만큼 벤담의 주제를 탐구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독착정이라는 점을 다분히 반증하다고 여겨집니다. 

밀이 자신의 비평을 통해 벤담의 "인간의 본성"과 관련한 인식적 한계를 비판한 부분에서, "다양한 인간 성격을 인식하지 못했던" 벤담이 과연 공리성을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본성의 차원에서, 오로지 '행복 추구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논증을 강화한 것은 개인에 따라 너무 단순한 논리적 전개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밀의 약간의 도발적인 언급대로 공리성이 일전에 키케로에게서 언급된 개념임을 차치하더라도 공리성에 근거한 벤담의 세계관이 "세속의 이해타산과 겉으로 드러나는 정식성과 선행 가운데 더욱 명백한 몇몇 규칙을 규정하는 것 이상으로는 개인 행위에 아는 바가 없다"는 비판 역시 밀의 통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벤담이 강하게 주장하는 공리성이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한 충분한 사례가 분석되어 기록되어야 했지만 독자들이 보기에도 그런 과정이 사뭇 부족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밀은 바로 이런 한계점에서 공리성에 기반한 벤담의 사상의 대부분의 맥락이 당시 법의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소위 '개혁가'로서의 체제의 비판자라는 날선 평가가 어쩌면 그에 대한 분석의 전부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벤담의 공리를 있게 한 '도덕성의 토대'와 그것의 근거들이 어느 정도는 철학의 역사, 일반적 문학 등에 기반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행복과 공리성이라는 자신의 논증에서 종교적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 노력한 점은 상당히 높이 살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밀은 "벤담에게서 도덕적 올바름 moral rectitude나 도덕적 의무 moral duty 등의 부족한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우리 자신이나 타인들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찬성 또는 반대라는 감정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는 듯하다"고 판단합니다. 더욱이 인간 본성의 도덕적 측면이 다른 어떤 이상이나 그 자체를 목적 삼아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인간 본성의 하나의 사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벤담은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이끌어 내는 이러한 깊은 감정들을 또한 애써 무시했거나 취급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이를테면 명예와 개인의 위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행동에 대한 사랑, 편안함에 대한 사랑과 같은 우습지만 인간 내면에 침잠해 있는 본질적 욕망 같은 감정들을 말합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철학적 진실에서 반쯤은 결여되어 있는 벤담의 사상들이 후세에 그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의 결핍을 반면 교사로 삼을 수 있다는 점과 "과연 벤담 정치철학의 이 근본 원리가 법에 대한 이해를 제외한다면 과연 보편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뭔가 고민을 해볼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인간이 다수파의 절대적 권위 아래 있는 것이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그것이 좋은 걸까?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고민해 볼 수 있는 주제가 된다고 여겨지는데요. 인간은 마땅히 도덕적 본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두의 이익과 행복으로 귀결되는 공리성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성을 답보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금과 같은 시대에도 과연 통하는 질문인가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벤담이 추동한 이 특별한 공리주의는 시민들이 기반이 되는 법의 지배와 어느 정도는 민주주의의 정당성에도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을 접한 고상한 사람들의 인식과 반대로 일반 대중이 쉽게 지식을 접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기에 지성이 편협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전반적인 금욕주의의 원천에 대한 분석은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 일반 대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소위 다양한 지식을 접해 본 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마땅히 나서서 통치할 수 있다는 벤담의 근거 역시, 단순히 일개 개인이 바라보는 일종의 계급적 인식 따위에 국한된 감정은 아닐겁니다. 어쩌면 뒤에 출현할 대다수 평균적인 자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득권 계층의 당연한 화답일수도 있겠는데요. 이것은 다소 불쾌하지만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의 원천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만일 그 당사자가 일반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의 행복이 될 것이고, 그 당사자가 특정 개인이라면 그 개인의 행복이 될 것이다.

이 지구상에 사는 존재 중 10분의 1만이라도 금욕주의 원칙을 일관되게 따르게 해보라. 그러면 그들은 하루 만에 지구를 지옥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너무 사소하고 전혀 해가 없는 것이어서 이 원칙으로도 처벌할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은 상상해 볼 수가 없다. 어떤 취향의 차이이든, 아무리 사소한 불일치라 할지라도 인내를 힘들게 하고 언쟁을 심각하게 만든다.

사실 우리는 옳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신의 의지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철저히 확신할 수 있다.

만일 반감과 같은 감정을 무조건 따르면, 그것이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실제로 아주 자주 그런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아마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행위의 유일하게 올바른 근거는 결국 공리성에 대한 고려일 것이다.

어떤 경우가 됐든 인류가 자기 자신의 이익에 관해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이 모든 이론에는 인류의 관행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만이 들어 있다.

위법행위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이런 쾌락 가운데 어떤 것을 틀림없이 파괴하거나 이런 고통 가운데 어떤 것을 틀림없이 낳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헤롭기도 하고 처벌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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