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에서 극우로 - 공화당의 추락과 미국 정치의 위기
김평호 지음 / 삼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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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언론 기사에서 '싸움꾼'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어울릴 것 같다는 김평호 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는 현재 저술 활동과 활발한 언론 기고를 통해 대중을 만나고 있는 늦깎이 학자입니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MBC PD로 10년 넘게 재직했는데요. 특히나 김평호 교수는 언론 노조의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이후 1994년, 영국 사우스햄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6년 8월에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정보통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4년 반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는데요. 김평호 교수를 뭔가 만학도라고 언급하기는 그렇지만 언론계에 있다가 늦은 학업을 시작하여 끝내 대학 교단에서 학자로 자리매김한 이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엄연히 언론계에 몸담았던 인물이니 만큼 앞으로도 우리 언론에 대한 쓴소리들을 가감 없이 해줬으면 합니다. 그의 이 책은 같은 제목으로 2022년 8월 출간되었습니다.

2021년 1월 6일에 있었던 '무장한 괴한들의 의회 난입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의 묵인과 지원하에 그의 지지자들이 불법적으로 의사당에 난입한 사실상의 친위 쿠데타였습니다. 이들의 명분은 '미국 대선의 부정 선거'였는데요. 만약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면 아마도 미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미국 연방 정부가 직접적인 테러에 노출되어 양자 사이에 총격전을 비롯,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났을 겁니다. 이처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많은 미국 백인 남성들 내면의 저열한 본성을 자극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삼은 극단주의자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대해 저자는 "미국인들이 품고 있는 심성의 가장 사악한 면"에 호소했다는 식으로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 문구를 보자니 전에 서평을 썼던 벤저민 카터 헷의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의 한 인용문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나치의 선동은 인간 내면의 저열한 부분에 끊임없이 호소한다"는 문장이었습니다. 실로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은 이처럼 인간의 추악한 면을 자극해 어떠한 정치적 양심 없이 다수 시민들의 폭력적인 본성에 기반한 자신들의 권력 탈취에 이용한다는 점에서 극히 파멸적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인간의 극단주의적 본성이 원래 타고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끝없이 자극하여 사회를 분단시키고 시민들이 진실과 더욱 멀어지는 이런 상황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김평호 교수의 이 글은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의 극단주의 정치가 단순히 공화당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이와 같은 정치인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이미 1980년대부터 왜곡된 싹이 미국 정치 무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약간의 개론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조금이라도 미국 정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저자가 논증하는 내용들 자체가 크게 새로울 것이 없겠는데요. 다만 신자유주의와 관련해, 기존의 판에 박힌 주장인 "신자유주의는 실체도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는 점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분들께는 이 책의 내용이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미국의 정치, 그러니까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역사와 토대로 봤을 때, 그러한 정치적 건전성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있는 분들께도 적잖이 반감을 살 수 있는 내용들일 텐데요. 그럼에도 저에게는 사회에 역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이행과 관련해, (어쩌면 당연한 내용이지만)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걸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하는 현실 자체도 다소 웃기는 일이긴 합니다만.

저자는 오늘날 미국 정치 경제적 사회 담론을 아우르며, 주도적으로 이행되어 소위 권력을 갖고 있는 체제를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의 맥락이 글의 주된 출간 목적이라 여겨집니다. 더불어, 섣부른 제 추측일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미국 정치를 통해 우리의 보수 정치를 가늠해 보려는 시도로도 읽혔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저자의 이 글은 우리에게 충분히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이건 행정부 이후로 미국의 국익과 세계 패권을 위해 좀 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규정했던 신보수와 "신자유주의적 탈규제가 초래한 미국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이 결국은 기존 기득권들에게 이익으로 돌아갔으며, 과거에도 지금에도 제대로 된 정치적 진보 세력을 가져본 적이 없는 미국 정치가 어떻게 평범한 시민들의 삶과 다인종 사회 상황에서 극단적인 인종주의를 강화시켜 왔는지 저자는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데요. 단순히 아메리칸 드림을 떠나서, 종래의 이민 정책에 대한 저학력의 백인 남성들의 극단적인 인종적 혐오는 현재 삶의 어려움을 그 주범인 신자유주의 때문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 탓으로 돌리며 사실상 사회를 분열 시키게 됩니다. 이것을 아주 극적으로 조장하고 자신의 이익으로 삼은 정치인은 다름 아닌 도널드 트럼프였습니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만들어 놓은 정부와 사회의 협력 체제인 소위 '뉴 딜 체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공화당과 그들을 추종하는 인사들에 의해 무력화 되었습니다. 정부가 시민들 삶의 안전망을 위해 각종 제안을 숙고하는 것이 미국인들이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자유'라는 가치에 어떠한 불법적인 양태가 존재하는 지는 모르겠으나, 신보수와 신자유주자들의 결합 자체는 '작은 정부론'에 입각해, 중요한 사회 부조를 사회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여기에 데이빗 코츠의 요약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장 큰 모순은 작은 정부를 표방하며 정부의 지출을 저어하면서도 군사비 지출에 있어서는 방산 업체를 위해 지속적인 정부 지출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가증스런) 논리를 강화한 것인데요. 여전히 정부의 보호가 필요한 적지 않은 시민들에게서 정부 지원을 끊어내고, 이와는 반대로 방산 업체에게는 막대한 정부 자금을 투입하게 하는 이런 모순적인 입장에 대해 후에 자신들은 잘 모른다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1980년대 이후 도정된 이런 신보수-신자유주의의 양대 체제가 결국에는 미국인들의 민주주의에는 하등 이득이 되지 않았는데요. 작금의 공화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 극우에 경도 되었고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 만큼에 비례해 다수 시민들의 삶에 사실상 '자유 지상주의'를 강요하여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아주 단적으로 말해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란, 모두에게 균등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회적 자원을 보유한 기득권과 엘리트 계층의 더 많은 자유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미국 정치 자체는 현재의 유럽 정치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 여기에는 많은 로비스트들을 고용하여 교육계에 '기독교적 창조론'에 막대한 로비자금을 투하하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지금의 사태에 적지 않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저자는 전혀 시들지 않고 있는 '티파티 운동'을 적잖이 소급해서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티파티 운동 자체가 기독교 근본주의에서 비롯된 점을 감안한다면 미국과 같은 정교 분리 사회에서 기독교가 정치권에 끊임없이 손을 흔들고 더 나아가 정치 자체에 편입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를 백번 양보해서 이들의 양심이나 선명성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본질상 사회 매커니즘에는 좋은 영향이 될 수 없을 겁니다. 신앙의 자유 자체는 어느 국가에서든 스스로의 양심에 맡겨야 하며, 이를 사회적 영향력을 재고하고자 코크 형제와 같은 막대한 부를 가진 자본가들과 결합해서 직접적인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만약 이것이 미국과 같은 대규모 로비국가와 만났을 때, 건전한 공론장이 아니라 사회적 쟁점이 되는 부분에서 여론 몰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하하는 것은 그것이 어찌됐든 종교의 견실한 역할은 아닐 겁니다. 더욱이 종교가 평범한 시민들의 삶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연방 정부와 사법부에 영향력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로비를 벌이고 있는 것도 실로 금권 정치의 어두운 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에는 앞선 신보수-신자유주의 체제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무런 성찰 없이 결합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민주주의를 서서히 말라 죽이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를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신보수-신자유주의-기독교 근본주의'로 그려지는 소위 삼각 체제는 미국에 있어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일전에 코리 로빈의 글에서도 현재 미국 사회에 있어 중요한 단초를 얻기도 했는데요. 2008년 이후 미국 중산층들 대부분이 기성 정치에 눈과 귀를 닫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리스 헤지스의 미국 정치의 정치 경제적 양극화라는 측면의 언급은 미국 정치가 더 이상 건전하지 않다는 증거일 텐데요. 그런 측면에서 오래된 공리주의적 전통이 미국 정치에서는 사실상 실종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미국의 연방주의는 표면적일지라도 견고하고 동시에 얼마간의 분권주의적 관념 역시 많은 계층에서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미국에 의한 '자유주의적 패권'이 전세계에 불협화음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고, 현재 중국의 대두로 미국의 패권이 위협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 자유주의적 개입이 과연 전쟁을 방지할 수 있을지는 대체로 불명확해 보입니다. 앞선 부분에서 저자가 약간 의구심을 갖고 있던 신보수-신자유주의의 결합은 이미 미국 정치가 리버럴을 포함한 우파 대부분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감안해 보면 양자 간의 결합은 의심할 바가 없어 보입니다. 2008년 이후에도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세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시장의 자유가 자유로운 사회의 핵심이다." 혹은 "인간들 사이에 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국가가 간여해서 평등하게 만듦련 안된다."는 식의 자유 지상주의가 미국 사회에서 불식되기란 아마도 어려울 것 같아 보입니다.


-1933년에 시도되었다고 알려진 '월가의 반란'에 대해 이 책에서 상세히 서술된 점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뉴 딜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 또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화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자유 지상주의자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더 줄여 말하면 극우 행동대원들은 현장에서 소란을 벌이고, 부통령과 의원들은 그사이 2020년 선거를 뒤집어 트럼프의 집권 연장을 꾀했던 것이다.

전체 271명의 공화당 상하 의원 중 과반이 넘는 무려 145명이 2020 대선은 부정 선거라며 추인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쿠데타의 주범임에도 전혀 부끄럼 없이 여전히 선거 부정을 외치는 트럼프, 그를 따라 ‘도둑맞은 선거‘라는 거짓말을 소리 높여 합창하는 공화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의 행태는 미국의 정치, 미국이 상징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만천하에 드러낸다.

그러나 트럼프가 중요한 이유는 무자격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백인들의 분노가 상징하는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흐름 때문이다.

그(트럼프)는 주류 보수주의가 감추고 싶어 했던 권위주의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태도 그리고 백인종주의를 오히려 공개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아들 중 활동의 성격이나 내용, 조직의 규모, 실질적 영향력 등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단체들은 흔히 ‘우익 삼두마차 (Right Troika)‘라고 불리는 ‘미국 입법연대(ALEN : American Lesgislative Exchange Network)‘,‘주청책연대(SPN : State Policy Network)‘그리고 ‘미국번영재단(APF : American For Prosperity)‘이다.

안보 강경론의 핵심은, 미국이 제국적 지위를 갖는 것이 자신은 물론 세계 질서에도 긍정적이기 때문에 미국의 헤게모니는 유지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강경한 대외 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는 모순의 집약체이고, 따라서 미국 보수주의는 수미일관한 이론적 틀을 갖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보수를 표방하는 여러 사회,정치 운동의 모자이크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가 자유로운 사회의 핵심이다‘,‘인간들 사이에 천부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국가가 간여해서 평등하게 만들면 안 된다‘,‘뉴딜은 사회주의 정책이다‘,‘공산 제국을 확대하려는 소련을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된다‘등등의 주장을 내세웠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쟁의 명분도 거짓이었고, 참혹한 전쟁의 실상과 추악한 미군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미국이 취해 온 반공주의의 정당성, 나아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도덕적 정당성도 훼손되었다.

골드워터는 이후 미국 보수의 정책 노선이자 공화당이 취한 선거 전략의 첫선을 보였다. 그는 흑백 차별 문제는 각 주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연방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민주당이 추진한 1964년 흑인 민권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본래 공화당은 북부의 개신교, 노동자, 화이트칼라 전문가, 기업, 농민, 흑인들까지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2차 산업혁명 이후 점차 상층부 지배 엘리트와 자본가들의 정당으로 변하게 된다.

이들이 보기에 여성 운동, 동성애자, 낙태, 포르노 등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거의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죄악으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극우 미디어, 백인종주의, 기독교 국가주의, 극우 테러 등은 차별과 배제를 기본으로 하는 매우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즉, 자유는 상호 지향적이며 개인의 차원을 넘는 공동의 가치인 것이다. 그러나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 구조 속에서 자유는 강자의 것이 되고 사회는 억압의 틀로 기능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이 요구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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