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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새 번역) - 불평등과 능력주의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수현 옮김 / 책갈피 / 2022년 9월
평점 :
남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 남부 솔즈베리 출신의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 내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정치 경제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불평등으로 심화된 현재의 자본주의에 있어, 경제학에 대한 그의 철학적 접근도 큰 설득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짐바브웨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에는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통해 본격적으로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비롯, 그것의 산파가 되어버린 민주주의 전반의 사회비판적인 논저들을 왕성하게 출판합니다. 참고로 그는 영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문 사회 참여적인 지식인으로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Equaility"로 지난 200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초도 번역이 2006년에 있었으나 최근에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간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자유'와 '평등'이 서로 대립하고 상충하는 가치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 두 가치에 대한 표면적이 이해일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진실에 근접한 설명이라면 자유 못지 않게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가치가 평등이며, 현재로서는 평등의 실현이 매우 요원한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적인 내면화에 원인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 노엄 촘스키는 "경제의 합리주의가 체계화되어 강요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가 있다고 강조했고, 버틀란드 러셀 역시, "시민들이 자본주의를 영속적인 체제로 여기는 것을 다소간 지양해야 한다"고 언급했는데요. 이 부분과는 약간 상이할 수 있지만 캘리니코스의 이 '평등'이라는 소책자는 정의와 밀접히 관련된 평등에 대한 질문으로, 3장에서 존 롤스, 로널드 드워킨, 아르마티아 센, G. A. 코헨, 데이비드 밀러 등의 이론과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면서 이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 길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도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글의 초도 번역인 2006 번역판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이번에 새로 번역해 출간한 책을 구해 읽어보니, 새삼 역자의 노력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존 롤스의 '정의론'과 관련된 캘리니코스의 날카로운 분석이 담긴 3장 전체는 저같이 평범한 독자가 보기에도 일독이 대체로 수월했는데요. 아마도 이점은 역자의 온전한 노고라고 여겨집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의 원인은 앞서 언급했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내면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사회 체제 전반을 그러한 (모든) 거래에 아주 딱 들어맞게끔 소위 사회 개조가 진행되었다는 점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인데요. 여기에는 사회에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막대한 자본가들에 의해 현재의 착취와 다름없는 시민의 파편화를 오랫동안 유인해 왔습니다. 이는 2장 후반부에서 저자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 요구를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 정말이지 사회적, 정치적 투쟁들로 분열된 사회에서 제기된다"고 강조하는 데서 오늘날의 현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오랫동안 사회를 좀먹었던 18세기 이전의 계급사회를 타파하기 위해 등장한 자유주의가 '돈과 권력, 사회적 지위'등으로 계급화 되어 현재의 자본주의적 계급주의 시대로 왜 변질될 수밖에 없는지, 그에 대한 추론도 이 논저가 제공하고 있기도 한데요. 그런 연유로 더이상 시민들의 진정한 자유에 화답하지 않는 소위 분절된 신자유주의는 오로지 시장 자유만을 강조하며, 그것을 통한 일종의 거의 근거 없는 유토피아를 시민들에게 세뇌시켜 왔습니다. 즉, 심각한 불평등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시장에서의 개인과 개인간의 상품 거래가 서로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만든다는 그들만의 사회경제적 맥락을 끊임없이 사회에 주입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 4장에서도 전 영국 총리인 고든 브라운과 같은 자유주의 좌파들이 "신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서로 화해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다"는 불가능한 문제를 놓고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 자체는 당면한 문제 해결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민들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기 위한 경제적 수입의 문제는 어느 정도 사활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단순한 소득 향상을 통한 부의 축적 뿐만 아니라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사회에서 남들과 구별되는 부의 존재는 사회적 지위의 향상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많은 부를 보유한 사람을 그저 돈이 많다는 이유 만으로 숭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터무니 없게도) 인격적으로 혹은 내면적으로 갖춰진 인물로 사회는 그리 이해한다는 것인데요. 결국 이러한 사회 인식적 메커니즘은 더욱더 개인과 개인을 경쟁하게 만들고 최후의 승자가 더 많은 돈을 따게 만드는 일종의 약육강식과 같은 체제의 견고화로 이어진다는 부분입니다. 이는 무덤에 있는 허버트 스펜서가 이와 같은 현실을 '과학의 치밀한 입증' 정도로 인식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겠지요. 바로 이러한 현실 가운데 전반적인 평등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전방위적으로 중요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있어야 되는 부분은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대로 많은 시민들은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고 싶어하고, 그런 측면에서 캘리니코스가 인용한 리처드 헨리 토니의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의 금전적 소득이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잉여 자원을 아껴 써서, 사람들의 소득 차이가 하찮은 문제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상의 사회 변혁과 맞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평등을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좌파라고 말하는 자들의 모순과 오로지 시장이 전부라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해는 양자가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리는 것에 동의하거나 혹은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양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적 이행을 비롯해, 평등에 이데올로기적 색깔을 입혀, 사회에서 마땅히 터부시 하게 만드는 것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이는 결국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는 밀턴 프리드먼과 난잡하면서도 매우 순진한 생각을 가졌던 존 롤스와 같은 낭만적인 이론가가 서로 공존하게 된 연유이기도 할 텐데요. 뿐만 아니라 샹탈 무페가 비판했던 1980년대 이후, 진보주의 좌파가 몰락할 수밖에 없던 이유와 그로인한 파급이 시민들에게 어떠한 파국을 초래했는지 이젠 모두가 잘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찰스 프리드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완벽한 시장 관념에 비해, 인간은 너무나 비합리적인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의 합리성이라는 것이 사회학적으로 거의 증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인데요. 과거 공리주의를 포함한 많은 학설들은 "개인은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전제를 거의 의구심없이 맹신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능력주의 meritocracy 역시 이러한 맥락 가운데에 있는 것인데요. 앞서 언급한대로 평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배격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캘리니코스가 분석하는 롤스의 근본적인 사상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보다 '기회의 평등"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더불어 사회적 복리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행이 선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3장에서 기여와 시장의 보상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인 기업 실적이 악화되는 경우에도 오히려 경영인의 봉급과 스톡 옵션이 올라가는 상황은 단순히 '시장의 배신'이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사회적 정의와 실질적 평등에 대한 자본주의의 거부를 넘어, 이것은 체제 전반을 흔드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개인의 욕망이 그저 선하고 순수하다는 앵무새 같은 발언을 이제는 무슨 사조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시장 전반을 포함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자들 전반이 무엇보다 시민의 감시하에 있어야 한다는 점은 민주주의의 대의와도 연결됩니다. 이는 확실히 2008의 대위기를 초래한 수많은 경제 엘리트들이 공적 자금으로 은퇴 자금 잔치를 벌였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장이 더욱 규제를 받아야만 하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하는데요. 초반 캘리니코스의 논증대로 많은 자유주의 이론가들도 이러한 부분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에 대한 담론을 그저 단순한 구호로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진정한 평등을 위한 사회적 담론과 그에 따른 여러 실천 방안들이 종래의 신자유주의의 광범위한 양보를 이끌어내야 하고, 신자유주의가 더이상 민주주의를 좌지우지 하지 않는 방향으로 사회와 시민들이 그러한 공감대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평등에 대해 온건하고 점진적인 사고를 보이고 있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의 약점이 자본주의 시정경제 틀 안에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과신하는 점일 겁니다.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 캘리니코스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비판적으로 다룬 것은 많은 사회가 시민의 실질적인 평등을 위해 좀 더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현 시점에서 노동자들의 잉여 노동을 통한 이익 전반을 손에 쥐고 있는 자본가들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정상화로서, 이들에게 정당한 세금을 부여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헌법적 정당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편도 민주주의가 스스로 평등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겁니다. 저는 여기에서 분석되고 있는 캘리니코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비판과 역간 별개로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자신들이 신봉하는 이념에 밑에 두고 그저 민주주의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그저 '베드'로 여기는 등의 오랫동안 수단으로만 삼아온 점에 더 많은 비판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콜린 크라우치나 데이빗 코츠를 통해 접해온 자유주의(엄밀히 말하자면 신자유주의겠지만)에 의한 민주주의를 옭아맨 종속적 이행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평등을 함께 공유하고 강조하는 민주주의를 좀 더 시장 자유주의로부터 독립시키고, 더 나아가 시장이 민주주의적 통제에 놓이게 하여, 이것이 더 이상 구호에 그치지 않게 하는 데 있겠습니다. 그래서 지지 파파차리시가 자신의 논저를 통해 도출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개념이 이처럼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오로지 자유 만을 위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바로 잡을 수 있는가에 있어 앞으로 그러한 이행 과정이 다음 세대, 그리고 더 다음 세대의 삶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접한 자칭 보수 우파 이론가인 변희재씨가 유튜브 모 정치 대담 영상에서 이언주 전 의원을 사실상 '자유주의 우파'로 통칭한 것에 대한 일정 부분의 맥락을 캘리니코스의 이 책을 통해 다소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변씨의 본래의 여러 주장들을 다 같이 수용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은 귀담아 들을 만 했는데요. 전통적인 자유주의가 본래 의미에서 상당히 왜곡된 점은 아마도 사회에 내면화 된 자본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마스 네이글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난한 사람이 더는 다수가 아닌 곳에서 민주주의는 포괄적 평등의 적이다."
즉, 부유층의 소득이 빈곤층보다 훨씬 빨리 증가한 나라에서는 다수의 상대적 가치가 반드시 향상되지 않더라도 평균 소득은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적어도 선진국에서 발견되는 불평등은 대체로 개인들이 자신의 재능과 자원을 시장경제에서 어떻게 사용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보비오는 근본적으로 옳다. 만약 좌파가 평등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도 좌파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도 사회정의를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고 시장을 규제하는 것을 지지한다(그러나 시장을 폐지하는 것은 지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 요구를 체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 정말이지 사회적, 정치적 투쟁들로 분열된 사회에서 제기된다.
즉 도덕적 담론은 지배적 생산양식의 필요조건을 반영할 뿐이라는 견해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함의는 모든 사회형태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윤리 원칙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계급 분열이 초래한 주된 해악은 부와 소득에 따라 개인을 평가하는 경향을 낳은 것이다.
즉, 모든 사회적 [기본] 가치(자유, 기회, 소득, 재산, 자존감의 기반)는 이 가치들의 전부나 일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최소 수혜자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돼야 한다.
불평등과 빈곤이 극심한 상황에서 최소 수혜자들의 선호를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은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성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요구는 저마다 소유한 자원이나 기본적 재화를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고,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기준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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