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공상 혹은 환상 - 기본소득을 넘어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기
김공회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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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영국으로 건너가 속칭 런던 대학교의 동양 아프리카학 분야로 특화된 SOAS :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합니다. 그가 학위를 마친 SOAS는 전문 대학으로 특화된 곳으로 전세계에서 학문적 명성이 높은데요. 특이하게도 나무 위키에서 한국인 중에 이 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사람으로 저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현재는 그는 국립 경상대의 경제학과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 그 전에는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치기도 했고, 홍대 앞 LP 바에서 DJ를 한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그의 이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든 생각은 일반적인 경제학자와는 사뭇 다른 입장을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안정적인 자본주의적 이행을 위해 무엇보다 복지국가 담론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논증은 꽤 신선한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은 가장 최근이라 볼 수 있는 2022년 7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언뜻 이 글의 제목만 놓고 본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신명을 다 바친 어느 노회한 경제학자의 글로 여길 수 같은데요. 그런데 그동안의 출판사의 행보를 고려해 본다면 거의 터무니없는 추측일 수도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 책은 그동안 국내에 무분별하게 퍼진 '기본 소득 담론'에 대한 이론적 정리이자,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복지 국가의 필요성'이 철지난 소리가 아님을 증명하며, 이 복지 국가 담론으로 인해 자본주의적 항상성을 답보할 수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담고 있는 글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의견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주장들도 여럿 있었는데요. 그것은 뒤에서 차차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결말을 포함한 총 9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에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기본 소득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2부는 다소 터무니 없이 주장되는 기본 소득과 기본 자산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분석과 3부에서는 사회적 안전을 답보하는 체제 전반의 경제적 안전에 대한 요구 및 복지 국가로의 다시금 의미 분석을 시도하고 결론에 이르러 '민주적 통제'와 더 강화된 민주주의에 의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근래 기본 소득과 관련해 이름을 알리고 있는 런던 대학의 SOAS 교수이자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BIEN의 가이 스탠딩이 주장한 '공화주의적 자유'를 개인적으로는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 공화주의적 자유는 "힘 있는 자들의 선택이 다른 이들의 선택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정부가 나설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는 민주주의의 아주 기본적인 가치인 평등의 개념을 원칙으로 자본주의가 알아서 스스로의 폐해를 시정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이 상황에서 일정 부분 정부가 필요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논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과거였던 1980년대 이후, 프랜시스 후쿠야마에 의해 소위 '손쉬운 해결책'으로 묘사되었던 복지 국가의 전면적인 철회가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단행되었는데요. 여기에는 대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 자유'를 기본으로 증명되지 않은 시장의 합리성을 국가와 사회에 광범위하게 주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에 저자는 7장에서 오늘날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는 '불평등'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불평등이라는 단어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을 저해하는 요소로도 일견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근데 사실 이런 이면에는 민주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민주주의의 평등을 자연계와 인간 세계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불평등과 적자 생존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 여기는 배타적 인식을 시민들이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 이유에도 그 책임이 있다고 보는데요. 이미 로버트 달은 이런 불평등에 대한 여러 계층의 재인식과 관련된 움직임에 우려를 표한 바가 있습니다. 이 점은 분명하게도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시장 자유를 위해 제약한 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불평등에 대한 과잉된 인식을 비판하기에 앞서 앞선 자유 시장 담론에 대한 면밀하고도 비판적인 논증이 우선해야만 했습니다. 이 점은 저에게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2장에서 기본 소득 담론과 관련해, 실질적인 임노동과 자본가의 건전한 순환체계를 강조하면서 저자가 논하고 있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부려 이익을 취하고, 이들 자본가가 제공한 임금은 노동자의 삶을 꾸려나가는데 중요한 원천이면서 마찬가지로 이들이 생산한 상품이 판매하는 보편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태계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순환과 상호 의존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는데요. 오늘날의 자본주의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의 상호 관계를 통해 유지 혹은 발전되기도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가 금융 자본주의와 지대에 따른 시세 차익을 노린 부동산 경기로 왜곡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에 있어 자산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가 더욱더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가히 경기를 일으킬 수도 있는 체계적인 민주적 통제와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주도권 쟁취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해결책은 민주주의의 국가일 수록 더욱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데요. 그런 측면에서 7장과 8장에서 저자는 다소 조심스럽게 부자들에 대한 확고한 누진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부자들을 걱정하는 다수 소시민들의 이해되지 않는 의견들과 어느 국가나 정치권과 의회 세력이 한 목소리로 부자들에 대한 좀 더 점진적인 과세에 대해 저항을 하고 있는 실정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을 다수에 의한 소수의 탄압의 가능성을 우려했던 사람 중에 하나인 제임스 메디슨의 정치적 유산인지는 모르겠으나 전반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압도적인 부유층이 저항이 거센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과연 저자가 요구하는 국가의 점진적인 복지 국가화가 과연 제 기능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반대편에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토론해서 그들을 설득시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평범한 소시민들에 대한 설득 또한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를테면 민주주의에서 본격적인 여론의 함의 혹은 시민들의 공감대를 확대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일찍이 허버트 스펜서는 빈곤층의 존재 유무가 일반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위해 경제적 노력을 기울이는데 아주 현실적인 반면 교사가 될 수 있으니, 한편으론 저들을 무분별하게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마냥 실용적이지 않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최소한의 생활 유지를 위해 '사회 안전망'이 절실한 계층에게 실제로 그들이 빈곤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서류 과정이 '인간 이하의 굴욕감'을 맛보게 하는 등 이것이 현 시대 복지 정책의 단면인지도 모르겠으나 수급 문제를 비롯한 복지 전반이 아직도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서 그런 과정이 있었느냐고 되물어 볼 정도로 신자유주의에 의한 복지 담론의 궤멸은 이처럼 현실에서 쉽게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아직도 서유럽에서 경제상의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존재와 시장 자유에 따른 시민들의 경제적 차별과 빈곤의 상황은 여전히 '개인의 문제'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본 소득'에 대한 담론 자체가 사회적 인식 차원에서 아주 소모적인 것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민주주의에서 어떤 시급한 문제나 과제에 대해 시민 모두의 의견들을 통해 여론을 형성시켜, 이를 사회적 압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우리 정치의 건전성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시장과 경제에 있어서 일절 누구도 간섭하지 말라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더욱 비판을 가해야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기도 하고 자본주의를 오로지 유일한 수단으로 삼아 스스로가 초래한 문제를 자본주의가 해결할 수 있게 끔 하는 '합리주의'가 역사적 효력을 다했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아야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3장에서 "자본주의는 문제이자 해결책이었고, 스스로가 제기한 문제를 (불완전하게) 해결하면서 자본주의는 변모해왔다"고 언급하면서 하지만 자본주의가 '기본'에 대해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다고 분석하고 있는데요. 초기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임노동제의 정착과 더불어, 혹여 자본주의 체제가 어긋나 사회 전반을 뒤흔들지도 모르는 일련의 우려에 대해 논의를 하고자 했던 전반적인 노동자 계층의 단결권이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공중분해되면서 그 '기본'이 이미 유명무실해진 원인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막강한 재력과 사회적 자원으로 무장한 자본가들과 소수의 부유층에 비해서, 일부의 열성적인 법조인들의 지원을 제외한다면 그저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일반 노동자들의 상황은 지금에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계급주의적 상황을 용인하지 않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러한 상황으로 변질되었는지는 사회적 분석 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겠지요. 일전에 데이빗 코츠의 주장대로 오늘의 자본주의가 그저 단순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이자 금융 자본주의로의 이행했고 저들이 사조로 일컫는 애덤 스미스조차 경멸해 마지 않았던 소위 '지대 경제'에 따른 시세 차익의 추구가 사적 이익화의 한계는 없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앞 전에 저자가 모든 시민들과 시민 사회가 현재의 자본주의적 체제에 순응하고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과연 이런 차별이 극명하게 일어나는 자본주의적 체제를 우리가 스스로 원했을까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 비판은 그저 무기력하고 '기계에 인간의 노동력이 부속품처럼 따르는'상황을 아무런 불평 없이 따라야만 합리적인 시민이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서사가 지금 이 순간 떠오릅니다.

아마도 사회적 분배에 대한 일차적인 의미에 모두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불평등의 근본적인 해결은 이런 분배에 달려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요. 로버트 달은 물론 최근의 여러 지식인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사회적 분배를 위해 세율에 대한 보다 실효적인 누진세 채택은 중요하고 이를 위해 보다 많은 민주주의가 요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적 통제 자체에 과도한 고통을 느끼는 경제인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고 어느 정도까지 선출 권력이 이들 시장 지배 세력을 제어할 수 있을지도 거의 미지의 영역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러 인용들을 통해,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사실상 시녀로 취급했다는 해석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는데요. 여전히 우리의 정치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다시 뛸 수 있을지도 불명확한 시점에서 자본주의가 어디까지 우리를 끌고 갈지 문득 두려운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기본 소득'으로 인한 현실 비판과 더불어 불평등을 조금 더 감쇄 시킬 수 있는 제안 등을 담은 내용 전반에 저로서는 동의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일부 비판을 수용하여 기본 소득에 대한 '정액론'과 모든 시민의 소득을 고려하지 않는 일괄 지급과 같은 내용에 있어서는 다시금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이들은 기본 소득 운동 자체를 포퓰리즘과 연계시키는 실정이기도 해서 요즘과 같은 SNS 시대에서는 시민들의 정확한 이해를 돕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원론적인 정치적 입장도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과연 어떤 것이 최선인지 많은 고심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오래된 것이지만, 대체로 그것은 개인의 미덕의 발로로 여겨졌을 뿐이다

빠르게 위력을 더해가는 자본주의의 모순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단 과거의 자급자족적인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그로부터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페인, 스펜스 등 초기 논자들은 선량하기만 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기반을 상실하고 떠돌다 죽어가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국가는 ‘자본가들의 공동위원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다수 인민의 이해관계를 구현해야 하는 근대적인 ‘공화국‘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득세제가 자본주의의 심화 발전의 한 결실이라면, 대중의 삶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데 그것을 이용하지 않을 까닯은 없다

그러나 소득을 이렇게 결과 측면에서 정의한 뒤 거기에 적용할 적정 세율을 사회적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성장의 표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민 수당 수급자가 되려면 소득자산조사 means test 를 거쳐 국가로부터 ‘빈민 인증‘을 받아야 하고, EITC를 받으려면 억지로라도 어디든 고용되어 저임금 노동이라도 해야 하며,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구직활동에 성실히 임했음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이렇게 가난하다는 것을, 무능하지만 비참한 노동을 하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으면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수당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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