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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이후 중국의 길을 묻다 - 대안적 문명과 거버넌스
백영서 엮음 / 책과함께 / 2021년 4월
평점 :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인 백영서 교수가 엮은 이 책은 국내외에 여러 중국 관련 전문 지식인들의 짧은 글을 모아 출판한 것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제목과 마찬가지로 2019년에 시작된 중국 우한 발 코로나 바이러스 펜데믹 사태 이후, 중국의 변화된 모습을 추정해 보는 것이라 짐작됩니다. 소위 코로나 19 사태에서의 '중국의 통제된 방역 정책'의 본질을 일정 부분 여기에 모인 소 논문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물론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중국 쪽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시금 생각해 볼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다들 짐작하고 있다시피 회의적인 측면에서 말이죠.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21년 4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약간의 첨언입니다만 성균관대의 성균중국연구소가 책의 출간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논문들을 다 읽고 나서 그나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던 글은 미국 펜실베니아 래드너에 소재한 빌라노바 대학에서 사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는 앤드루 류 교수의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서울대 조영남 교수의 "중국이 '최종 통제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및 물적 대가를 지불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통찰 역시 꽤 귀중하게 다가왔는데요. 대부분의 중국 지식인들이 정부의 관변 지식 노동자임을 감안해 본다면, 중국이 외부적으로 밝히고 드러내는 자신들의 입장과 정책 대부분이 의문투성 임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이곳에 이름을 올린 중국 필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인들이 펜데믹 사태 이후, 과연 전세계가 '중국 쇼크 China shock'에 따른 탈중국화가 가능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도 한데요. 이것의 가능 여부를 떠나 전세계적 펜데믹 사태에 대해 중국 당국의 양심적인 고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이 선진 민주 국가들에게 '나약한 자유 민주주의'라는 폄하를 일삼고 있지만 반대로 자신들의 인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통제는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한 부자연스럽고 비민주적인 기법이 가미된 '권위주의적 통제'에 따른 저들의 강력한 효과가 마치 중국 문화와 오랫동안 내재된 중국 역사의 승리라는 식의 해석은 결코 달가울 수가 없는데요. 새뮤얼 헌팅턴 식의 동양에 대한 서구주의의 우월성을 일견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대 중국 문명의 대척으로까지 확대 해석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논점은 쉬이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중국 베이징 대학의 야오양은 자신의 글 중간에서 "국가 거버넌스에서 당대 중국의 정치 체제가 지닌 장점은 서구에서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하고 있는데요. 화둥사범 대학의 쉬지린은 "중국 의 경우는 다른 나라가 모방할 수 없는 모델이다"라고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대단한 사회주의국가라고 여기는 그들이 그러한 강력한 통제속에서 추동한 '중국의 펜데믹 안정'이 과연 다른 국가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것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쉬지린의 앞선 해석을 따로 놓는다면 다른 중국인 석학들은 이런 '통제 모델'에 대한 약간의 부끄러움을 미처 지우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홍콩 중문 대학의 친후이가 펜데믹 상황에서의 소위 민주 진영의 약점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혼란 상황을 민주주의의 약점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근거가 사실상 빈약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유 민주주의에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매우 확실한 구분은 이론이나 현실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시민들은 정부의 보건 통제에 대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하는 것으로 오인해,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반대로 공적인 영역 자체를 깡그리 지워버린 듯한 모습은 실로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 진영의 복지 담론이라든지, 진보주의에 입각한 상호 돌봄과 공익에 대한 관념을 시민들이 아주 잊은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민주적 사회가 시민들의 자발적 통제 없이 물리적으로 통제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나, 사회 내부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관념이 미국과 유럽에 강고한 편이어서 민주적 정부가 이를 중국처럼 시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법이기도 하고요. 이에 많은 중국인들은 서구와 미국의 정부가 '시민의 투표' 때문에 정책적으로 다소 나약하다는 인상을 주입하려는 모양입니다만 그러한 관점은 어불성설이며, 시민의 자유와 진정한 민주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중국인들이 그런 평가를 내릴 자격은 없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 글의 앤드루 류가 제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셈이지만, 그가 쓴 4장의 내용들은 과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비롯한 그의 각료들이 펜데믹 상황에서 얼마나 친자본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오도 되었는지 여실히 드러냈다고 생각하는데요. 앤드루 류의 입을 빌어 언급된 CNBC 릭 샌텔리는 기묘한 진술로 "바이러스를 모두에게 나눠주면 상황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병에 걸리면 사람들이 돈을 쓰거나 일하러 가지 못하게 된다"는 가히 병적인 수준에서 친자본주의적이며,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복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샌텔리 역시 엘리트에 준하는 지식인으로서 그가 엘리트 지배 계층의 모든 의견을 취합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이 찬양해 마지 않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어떠한 수준인지 이를 명백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만인이 더할 나위 없이 고통 받는 펜데믹 상황에서 오로지 소수의 이익을 강조하는 미국의 정치 엘리트들이나 민주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인민의 기본권조차 우습게 보는 중국 당국의 자화자찬은 이들 양자가 신자유주의의 이해에 서로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 공통된 지점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서구 자유 민주주의가 펜데믹 상황에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와 시민들 스스로 안전과 인권을 자유라는 근시안적인 맹목성에 매몰되어 공적인 영역이 삭제된 것은 중국인들의 우려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충분히 부정적인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유라는 가치가 서구의 문명을 규정 짓는 중요한 가치임은 거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인간의 진보에 크게 이바지 한 점도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친후이가 민주주의에 빗대어 만든 '낮은 인권의 우위 개념' 같은 것도 권위주의자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고안해 낼 수 있게 된 것은 한편으론 불행한 일이기도 한데요.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서 민족과 문명의 번영을 위한 특단의 조치라고 할 지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자랑할 수 없는 점은 거의 확실합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번영이 중국 공산당의 주도적인 정책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을 테지만,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 하에서 다국적 기업의 이익이 결부되어 있지 않았다면 중국의 '세계 공장화'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 중국 경제의 세계 시장의 편입이라는 화두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고,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을 제외한 '탈중국화'가 실현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신자유주의적 경제 기조 하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일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중국의 시장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개념을 처음 도출한 조슈아 쿠퍼 레이모는 '민주주의가 없는 중국의 경제 발전'을 아마 예측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많은 서방의 전문가들이 민주주의가 결여된 중국의 경제 성장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이미 충분히 몇 번이나 겪어봤으리라 생각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중국의 성장과 번영이 거대한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국 정부를 비롯한 많은 중국인들도 아마 쉽게 동조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시장의 논리가 비차별적인 논점으로 주도권을 잃지 않고 반대로 강화된다면 중국의 인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시민들이 더욱 고통에 빠질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복지 담론이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거세되었을 때, 실제로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그러한 복지였음이 드러났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최상위 기득권들은 사적인 비밀 의료와 결합해 자신들의 안전은 더 강화되었지만 복지가 자유의 해악이라는 사기에 휘둘린 대다수 시민들은 그와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론 사회의 공익적인 측면이 붕괴되었고 시민의 안전은 위협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3년 간의 펜데믹 사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허울만 가득한 '번영'을 더욱 드러낸 셈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자본주의적 소비만이 강조되어 인간을 정치에서 더욱 멀어지게 한 그 자본주의 말입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당국이 리원량 의사를 체제 내의 영웅으로 추대하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추모와 체제 비판의 글들은 중국 온라인상에서 계속해서 검열당하고 삭제되고 있다
정치적 선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회 균열과 외교 난제의 근본 원인이 코로나19 방역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감염자가 줄어들 줄 모르는 서구를 향해 자신이 방역에 ‘성공‘했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중국이 ‘최종 통제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인적 및 물적 대가를 지불했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그 이튿날, 도널드 트럼프는 ‘중국 바이러스‘라는 용어 사용을 옹호하며, "중국에서 왔기 때문이죠. 인종차별주의 전혀 아닙니다. 아니죠. 전혀 아니에요. 중국에서 왔어요. 그 때문이죠. 정확히 하고 싶을 뿐 이에요"라고 설명했다. 한층 분명하게, 아칸소의 상원의원 톰 코튼은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지난주의 트윗에 중국은 미국에 한 짓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할 것이라는 암시를 덧붙였다
샌텔리는 마땅히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의 논자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그의 논평은 현재 정부와 기업이 얼마나 유례없이 극단적으로 기업의 이윤과 인간의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을 수 없는가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기도 했다
거의 반세기 동안 복지국가를 체계적으로 해체시켜온 사회, 소위 ‘좌파‘로 여겨지는 정당이 보건의료 비용에 대해 정기적으로 짜증을 내는 사회, 그리고 말 그대로 부동산 개발업자를 대통령으로 임명한 사회에서, 우리는 현재 해당 지역의 개인 활동가들이 펜데믹에 대한 대응책임을 거의 전적으로 짊어지고 있고, 믿을 만한 바이러스 검사가 질병통제예방센터에 의해 공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게이츠 파운데이션과 유타 재즈에 의해 확보되어온 기막힌 상황에 직면해 있다
미국의 박식한 논객들이 사회복지에 대항하여 ‘시장 선택‘이라는 무기를 휘두를 때 잘못 생각하는 점은 사회 안전망이 인간의 자유를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자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철학자들은 이것을 필요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 사이의 구분이라고 불러왔다)으로 적용한다는 사실이다
부당이득 행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법률 및 유인의 전지구적 시스템이 심판대에 올라있다
그런데 ‘복지국가는 더욱 더 큰 권력을 필요로 하며, 적극적인 권리는 이전지출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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