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카르텔 - 갈등적 상호 의존의 역사
박홍서 지음 / 후마니타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인 박홍서 교수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문학사와 정치학 석사를 거쳐 동 대학원에서 "중국의 대한반도 군사 개입"이라는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부설 국제지역연구센터에서 연구 교수로 일하고 있는데요. 온라인 상에서 저자의 간단한 약력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어느 포럼에서 겨우 정보를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글을 통해 박 교수의 얼굴을 확인하게 되니 저에게는 매우 낯이 익은 분이었습니다. 아마도 TV 토론 프로그램 등에서 뵈었던 것 같군요. 여러분의 짐작대로 저자는 한중 관계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특히나 요즘과 같은 미중 대결이 현실화되어 가는 시점에서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전문가로도 생각됩니다. 더불어 구글링으로 저자의 이 책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일반 독자들을 위한 여러 북 콘서트도 있었던 듯 싶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5~6년 기간의 한국 외교에서 미중간의 관계는 그만큼 중요한 지렛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출간은 지난 2020년 9월이었습니다.

책의 제목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카르텔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서로 적대시하고 있는 국가간의 서면 조약'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외에도 관용적인 의미가 많기도 한데요. 박 교수의 이 글을 일독하고 나서 드는 미국과 중국간의 카르텔에 대한 의미는 크게 2가지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과거 냉전 시기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미중 간의 정치외교적 결합과 둘째로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다국적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중국을 자유시장 경제안에 정식으로 초대한 그 일련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요근래 몇년간은 트럼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전세계 공장으로서의 중국에 대한 인식 전반이 부정되어 사실상 자유진영의 또다른 대척점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요. 중국이 과거와 같은 전근대적인 자본주의 체제와는 거리가 먼 전통 국가였다면 우리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이렇게 어정쩡한 느낌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이미 저자가 이 글의 10장에서 미국과 중국이 경제적으로 아주 밀접하게 '연동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미중간의 택일은 그만큼 단순한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죠. 또한, 중국이 한국과 일본처럼 미국의 동맹 이하 세력이 아니라, 지역 패권국에 준하는 국가로 탈바꿈 했기 때문에 이는 더 복잡한 양상을 띨 수밖에 없는데요. 물론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이 어느날 갑자기 경제 대국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중국의 경제적 번영에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이를 뒷받침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아와 가난에 고통받고 있던 중국 인민들을 위해 저 자유진영의 수뇌들이 더할 나위 없는 배려를 한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다국적 기업의 막대한 이익을 위해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소비를 뒷받침 하는 소비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통찰한 바대로, 국제 정치는 선과 악이나 흑백과 같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수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른바 '회색지대'와 같습니다. 이것은 2008년 뉴욕 발 금융위기에서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분에 맞지 않는 신용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투입된 상당한 중국의 자금이 기반되었던 것과 유사한 맥락입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거듭 인정되는 부분입니다만, 미국의 채권을 사들이고 있는 중국 정부의 경제 정책이 전세계에서 미국의 달러 패권을 떠받드는 한 축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부분입니다. 즉, 미국과 중국의 경제 전반은 서로 '연동'되어있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선악의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선악론에 기반한 도덕적 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거니와 이러한 맹목적인 사조가 주도하는 경제 체제 역시 오로지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뜬다면 미국의 방산산업체는 자신들의 이익과 수출 시장을 위해, 과거 구소련에 준하는 (자신들의 기준에서 비도덕적인) 대적자가 필요하고 일본과 같은 미국의 비대칭 동맹도 중국의 위협을 지렛대로 삼아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외교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중국 위협론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명분이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들 때문입니다. 물론 저 역시도 '민주주의가 없는 중국의 경제적 번영'을 별로 달가워 하지는 않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민주 평화론 Democratic Peace'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권위주의 정부가 경제적 번영을 달성했을 떄, 그것의 파급이 좋지 않은 쪽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반면 교사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중국은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시장 체제에 편입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적 번영을 달성하자 기존의 자유 진영이 주도하여 마련된 국제 체제 전반이 과거 중국의 참여가 사실상 배제되었기에 수용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고 판단합니다. 중국의 최고위층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들의 전체적인 국력이 과거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제는 전세계로부터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여기에는 덩샤오핑의 유훈을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숨죽여 때를 기다린다는 신중함은 이미 시진핑으로 인해 철회되었던 것과 관련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자유진영'과 이 자유진영의 속하지 않는 국가들의 진정한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중국이 이러한 번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가 민주주의에 더욱 가까워졌다면 러시아와 친구가 될 필요도 없이 서구와 좀 더 긴밀해졌을수도 있을겁니다. 아마도 베이징 컨센서스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한 많은 서구의 전문가들이 중국의 번영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지 예측하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신자유주의에 어떠한 도덕적 가치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중국을 세계 시장에 끌어들인다면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다소 불편한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정치의 민주화가 추동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데이빗 코츠에 의하면 이 책에 언급되는 군사적 케인스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매우 밀접한 관계이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쉽게 수긍하는 것은 군사적 케인스주의에 대한 인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수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케인스주의에 대해 갖는 적대감을 감안한다면, 거의 반동적 경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는 이 군사적 케인스주의를 신자유주의자들이 용인하고 있는 상황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케인스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가 바로 중국이기도 한데요. 중국의 위협으로 인해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일본에 의한 무기 시장이 열리고 마찬가지로 대만과 한국에서도 비슷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저자는 이러한 결과론에 대해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이 중국을 손봐줘야 하겠다고 결심한 이면에는 이런 복합적인 요인이 기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무기는 인도와 중국의 정치적 지렛대를 위해 용인했으면서도 한국의 핵개발은 기필코 용납하지 않은 점도 국제 문제가 주도국의 이익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는데요. 이 파키스탄의 핵무기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부정하기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는 미국의 이익추구가 항상 자신들이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죠.

1972년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명목으로 미국과 중국이 과거 한국전쟁에서의 군사적 대결로 인한 서로에 대한 백안시를 철회하기로 했을 떄, 당시 키신저는 중국의 저우언라이에게 일본은 물론 한국에 대한 일종의 '통제'를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 당시의 양 국가가 한반도의 한민족이 어느 정도 관리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서로 동의한 것인데요. 이를 저자는 한반도의 내재화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를 다른 한편으로 해석해 보면 동맹이라는 정치적 관계가 매번 우리가 원하는대로 돌아가지 없고 심지어 한미 동맹처럼 비대칭 동맹은 미국으로부터의 방기의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합적인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미국과 중국 어느 한쪽의 필연적인 선택만을 강요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만큼 나날이 강도가 세지고 있는 미중 갈등에 있어서 우리 정부의 기민한 대응이 요구되는 것은 저자의 다른 설득적인 제안들과 더불어 이 글 전반의 중요한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제가 신자유주의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리 역시 경제적으로 중국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은 자유 시장 체제가 기반이 되어 나타난 기본적인 양상이기도 합니다. 세계화에 따른 그 결과가 작금의 자유시장 체제인 것이죠. 그만큼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대부분 무시하고 미국이 하자는대로 했을시 나타날 수 있는 우리 경제에 대한 악영향을 미국이 매번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사드 사태로 인한 중국의 경제 보복에서 그런 우리를 향해 미국이 어떠한 행동을 보였는지는 이미 충분히 증명된 바가 있는데요. 물론 지금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매우 비상한 시기이기에 국제적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어떠한 것이 진정한 국익인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정책과 그에 따른 행동은 특히나 한반도에 있는 우리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상황이 해당 전문가들의 많은 조언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대통령이 말한 반지성주의에 대한 언급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반지성주의를 적극적으로 극복해내는 길은 역사의 경험과 축적된 지식을 통해, 이 나라가 나아갈 길을 찾는 일일겁니다. 냉정한 시세판단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글의 15장에서 저자는 경제 이익은 군사력의 존재 이유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는데요. 미국에 있어 국제 외교의 메커니즘이 이러한 맥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대한 마오쩌둥의 호감은 아편전쟁 이후 중국 엘리트 게층이 가졌던 호감과 다르지 않다. 물론 일본이라는 ‘주요모순‘에 대항하기 위한 현실적 목적도 있었다.

미국의 거대 자본가들은 러시아혁명 직후부터 볼셰비즘에 대한 공공연한 혐오를 드러냈다. 심지어 히틀러의 나치즘을 볼셰비즘에 대한 ‘해독제‘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김일성에게 전쟁 중 소련이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핵무기로 위협받지 않는 한 아시아 국가들 스스로 국가를 방어해야 하며, 미국의 역할은 이를 지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지도 dictate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 assist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2년 2월 23일 베이징에서 닉슨은 저우언라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핵심은 양국이 한반도 전쟁에 다시 연루돼서는 안 되며,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각각의 동맹국인 남북한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중국은 일본이나 한국처럼 미국의 하위 동맹국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좀 더 강하게 낼 여지는 있다.

예컨대, 중국 위협론자들은 미중간 세력 격차가 좁혀진다며 중국 위협론을 정당화하는 반면, 비관론자들은 미중 간 세력 격차는 여전히 크다며 중국 위협론을 반박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6-03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0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