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벤저민 카터 헷 지음, 이선주 옮김 / 눌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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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카터 헷은 미국의 역사학자로 주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와 히틀러 나치 시대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저명한 지식인입니다. 그는 캐나다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이라 불리는 앨버타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마치고, 토론토 대학을 거쳐, 하버드 대에서 독일 현대사와 관련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헷은 미국 출신의 학자 치고는 드물게도 독일에서 여러 강연 활동을 벌이면서,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 정치와 관련된 자신의 여러 논저들을 독일 내에 출판하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노력에 힘입어 2007년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도서관에서 현대사 부문 에른스트 프렌켈 상을 수여 받기도 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영국 BBC의 히틀러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제작에도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18년에 원제, "The Death Of Democracy : Hitler's Rise to Power and the Dowmfall of the Weimar Republic"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근래인 2022년 4월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이 글의 원제는 엄밀히 "민주주의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원제가 의미하는 바가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즘이 민주주의에서 시작해서, 자신을 잉태시킨 민주주의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이러한 정치적 전개 과정에서 독일만이 파멸에 이른 것이 아니라, 전 유럽까지 참혹한 전화(戰火)의 소용돌이로 이끈 것은 역사의 진보가 매번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자가 밝히는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을 붕괴시키는 데 크게 일조한 여러 원인들 가운데, 3가지 정도를 언급하고 싶은데요. 우선은 독일 내의 극심한 반유대주의적 인종 혐오와 수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극도로 혐오했고, 민주적이든 반민주적이든 공화국 내의 모든 정치 진영이 하나같이 타협을 막는 강력한 문화적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쿠르트 슈마허가 "나치의 선동은 인간 내면의 저열한 부분에 끊임없이 호소한다"고 고백한 부분은 당시의 독일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는지 짐작하게 하는데요. 이 부분에서 토크빌로부터 시작해 존 듀이에 이르는 '시민의 정치적 변별력'은 이처럼 중요한 가치임이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원인들 가운데, 힌덴부르크와 같은 당시 독일 군부들은 자신들을 제대로 지원하지도 못한 채, 드러난 정치인들의 무능에 깊은 환멸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로는 독일의 영광은 커녕 현상 유지도 힘들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요. 이는 이들 군부가 민주주의에 대한 극심한 혐오 뿐만 아니라, 국민을 하나로 묶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원을 쉽게 배분할 수 있는 권위주의적 체제를 일종의 그들의 이상으로 삼게 됩니다. 힌덴부르크의 노욕(老慾)은 또 그것대로, 황제를 네덜란드에 망명시킨 관련인이라는 정치적 약점과 더불어, 바이마르 정치의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는데요. 그래도 이런 혼란스런 시기에도 바이마르에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 하인리히 브뤼닝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있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들도 가톨릭 중심의 보수주의자들로 국내 정치의 혼란한 상황에서 각 진영 간의 진솔한 대화와 그에 따른 타협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로 제한적인 역할만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힌덴부르크가 후에 히틀러를 가리켜. '일개 오스트리아 병졸'이라는 멸칭을 써가면서 히틀러의 나치와 어떠한 대화나 타협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의 정치가 어떠한 수준이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히틀러가 자신에게 비판을 화살을 날리는 언론들을 '유대인들의 음모, 혹은 유대인들의 배후지시'라고 여겼던 부분이나, 나치 가운데 제법 이성적인 인물로 이 글에서 묘사되는 괴벨스 역시 독일 내에서 유대인들을 축출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은 점도 당시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상황에 놓였는지 충분히 그려볼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요. 최종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사망선고에 이르게 한 인물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폴란드와 면한 동쪽 국경에서 어떻게 폴란드의 군사적 위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어서 그 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경찰 조직이 다른 민주국가들의 비해 매우 미흡해서, 동쪽 국경에 대한 방비에 나치의 돌격대를 비롯한 각 정치 조직의 준군사조직을 이용하고 있었다는 점은 지금의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서 열거한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여러 정치적 문제, 문화적 편견, 반유대주의를 비롯해, 비교적 민주적으로 운영되던 프로이센 주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혐오 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도 역시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이름을 날리는 정치인들과 그들의 지지층들이 반지성주의에 준하는 무지와 편견에 매몰되어 있었고, 상대 세력에 대한 인신 공격은 물론 정상적인 정치적 동반자로서도 전혀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보수주의자들이 좌파에 갖는 극심한 혐오와 불신은 차치하더라도 종교에 있어서도 가톨릭과 개신교도들 사이에서 서로 간의 몰이해와 환멸, 심지어 농촌 계층과 도시 계층의 심각한 계급 갈등은 전통적인 농촌 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나치의 대두에 상당 부분 영향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중산층이 다른 여타 계층과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는 점도 심각하게 여겨졌는데요.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공화국 내의 어떠한 정치인이라도 나서서 정상적인 상식에 기반한 대화와 토론을 유치해야만 하지만 이러한 제 생각은 이 시대에는 거의 통용될 수 없는 가치임이 글 전반에서 증명됩니다. 여기에 나치가 전유럽의 계몽주의에 대해 혐오로 일관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개인들의 두터운 교양으로 유명한 독일인들이 '인세의 지옥'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점은 그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치부해야 될까요.

저자인 헷은 바이마르 시기의 심각한 정치사회적 분열과 대결 구도, 그리고 히틀러가 대두하게 되는 공화국의 붕괴 시기에, 히틀러가 자신이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한 것을 신에게 감사할 정도였다고 밝힙니다. 나치는 유대인들과 공산주의를 대적으로 삼아, 일반적인 독일 국민의 증오에 호소하는 데 노력했는데요. 물론 1차대전 이후, 프랑스에 대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이 자신들의 자존심으로는 허락되지 않는 부분임을 감안하더라도 평범한 독일인들이 이처럼 극단주의에 몸을 맡기게 되는 점도 상당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비교적 상식에 기반한 역사적 해석에 익숙한 저로서도 나치즘의 탄생은 실로 다른 우주의 요인이 기반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이질적인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헷의 이 글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던 것은 바이마르가 전체주의에 이르지 않을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분명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힌덴부르크가 브뤼닝의 겸허한 정치적 요구를 수용해 주었다면 아마도 독일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었는데요. 그보다 그 이전에 슐라이허의 술수를 힌덴부르크가 조심하고 견제했다면 또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힌덴부르크 개인의 정치적 사명감이 무엇보다 전제 되어야만 하지요. 좀 더 나아간다면 보수주의 우파들이 사회민주당에 경멸을 중지하고 서로 간에 대화가 지속되었다면 히틀러의 부상도 역시 희박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브뤼닝이 힌덴부르크에 의해 축출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가톨릭 보수주의자들과 사회민주당의 간극은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저들은 물과 기름보다도 더 섞이지 않았으니, 이 시대의 정치적 폐쇄성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이 될 만합니다.


흔히, 일반적인 역사학자들에 의해 히틀러의 부상은 독일이 갖고 있는 미국과 영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반감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독일 국민을 상당히 고통에 들게 만들었던 막대한 전쟁 배상금 문제도 그렇습니다. 슈트레제만을 거쳐 브뤼닝이 정치적으로 노력했던 점도 승전국에 보내줘야만 하는 배상금의 유예가 사활적인 부분이었는데요. 물론 실제로 모라토리엄이 실행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독일 내부에서 강력한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당시 정치적 무능과 각 세력의 폭력적 수단의 강고화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나갔습니다. 사실 그 당시 불고 있던 세계화와 더불어, 영국이 주도하던 '금본위제'에 대한 히틀러를 포함한 정치 전반의 거부감이 아마도 비타협적인 독일 민족주의와 결합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계화에 대한 거부감이 이러한 사태와 아예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터질 수밖에 없던 파급에 한 손을 거든 것에 불과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임스 Q 위트먼과 자크 파월의 글에서도 입증되지만 독일 은행과 경제계에서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축출하기 시작한 것은 서유럽의 경제적 이해 관계에서 포드와 같은 이가 히틀러를 흥미롭게 봤던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당시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소위 저명한 경제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고려했을 때, 민주주의가 과연 공산주의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과 함께, 이 공산주의의 해결책이 히틀러가 될 수도 있다고 여겼던 것인데요. 당시의 세계 자본주의가 많은 이들의 이익에 얼마나 부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 소수의 경제인들이 자신들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나치와 같은 자들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소름끼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사회적으로 용인하고 중요하게 인식되는 최소한의 상식이 있어야만 하고, 어떤 계층이든 어떤 자본이든 간에 자신들의 급에 맞지 않는 권력을 보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자들을 미연에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제도와 법적 장치가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헷의 이 책은 독자들이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정치적 혼란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그 가치가 상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세계를 지옥으로 몰고 간 진정한 원인과 그러한 면면에 있는 자들을 하나하나 꼬집어 살펴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중요한 일독의 이유라고도 생각되는데요. 저자는 글 써 내려가는 도중에도 히틀러가 대두하게 되는 그 시기의 정치적 배경과 오늘날 프랑스와 헝가리 등지에서 본격적인 기성 정치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의 유사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현 시대의 극우주의자들이 이슬람 혐오와 이민자 경멸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듯이, 반유대주의에 기반한 유대인 척결에 정치적 이상을 건 히틀러의 존재는 지금에도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전반적인 정치 혐오와 양비론에 몸을 맡긴 이들은 이러한 위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겠죠.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저는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아주 손쉬운 극우주의와 연계하고, 오히려 멀고 고통이 따를 수 있는 민주주의적 대화와 토론을 거부한다면 우리나라도 역시 극우 포퓰리즘이 뿌리를 내리기 아주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분단까지 되어 있으니까요. 거기에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역 간의 혐오는 이미 그 도가 지나친 수준이기도 합니다. 사실 민주주의 종말에 대한 여러 사상가들의 불안한 예측은 매번 있어 왔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도 그러했고, 에티엔 발리바르와 좀 더 광범위하게 해석해 본다면 샹탈 무페도 그러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도 역시 죽는 날까지 민주주의의 미래에 걱정했던 지식인었습니다. 그래서 모쪼록 헷의 이 글이 우리에게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히틀러는 600만에 이르는 유대인들의 학살에 오스만이 자행한 최소 75만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의 집단 학살에 깊은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히틀러 이전 세 명의 총리가 그랬듯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핵심 측근 몇몇이 히틀러의 선동가적인 재능과 추종자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간판 역할을 할 히틀러 같은 인물이 없으면 자신들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는 선거에서 극소수의 지지밖에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독일의 나치 시대에 관해 안다고 생각하는 사실 중 많은 부분이 나치가 선전한 내용이거나, 2차 세계대전 직후 몇 년 동안 밝혀진 사실일 뿐이라는 게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났다

사람들은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이 지나치게 모질고 혹독해서 독일인이 분노했기 때문에 나치가 탄생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끈질기게 이야기해 왔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저 독일 국민을 경멸할 뿐이었다. 이 사실이 놀라울 수 있다. 대부분 히틀러를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로 알기 때문이다

1914년 8월, 독일이 선전포고를 하자 "이런 시대에 살게 해주신 데 대해 감격해 무릎을 꿇고 하늘에 감사드렸다"라고 히틀러는 회고했다

세 진영이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는 사실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 사회가 얼마나 뿌리 깊게 분열됐는지를 또다시 잘 보여준다

농촌 사람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회민주당의 득세는 도시 노동자 계층이 전쟁 전보다 더 많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었다

이 문제는 이념적인, 거의 철학적인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민주적이든 반민주적이든 바이마르 공화국의 모든 진영은 하나같이 타협을 막는 강렬한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2년 반 동안 펼쳐진 독일 정치에서 나치를 끌어들이려는 슐라이허의 노력이 중대한 역할을 했다. 슐라이허는 독일을 더 권위주의적으로 개조하고 싶었다

아마 중산층은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사회민주당에서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노동자층과 중산층이 사회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나치는 또한 오스만 정부가 최소 75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죽인 1915년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알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유럽 지도를 보면, 파시스트 정당이 집권까지는 못하더라도 대중적으로 상당히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따로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거나 공산중의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많은 나라였다

계속해서 "나치의 선동은 인간 내면의 저열한 부분에 끊임없이 호소한다. 우리가 나치를 조금이라도 알아본다면, 나치가 독일 정치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완벽하게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꺠달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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