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문성원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유동하는 근대 혹은 액체 근대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유명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금세기의 수많은 사회학자들 가운데 가장 존경 받는 진정한 지식인이자, 학문의 길에 있어 모두의 귀감이 되었던 학자였습니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운동에는 평생에 걸쳐, 반대하는 입장에 섰기에 이런 학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주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세계와 사회를 좀 더 한 발 물러서 분석할 수 있었던 그의 주변 환경은 근대의 수많은 문제들과 자본주의적 종속성, 인간의 소외라는 현실적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엄청난 독서와 사유에 근거해, 고결한 논증과 실제적인 비판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그의 학문적 일관성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수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바우만의 글과 발언을 놀랄 만큼 증오했던 점은 특히 유명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이보다 그의 유작이었던 "레트로토피아"에서 드러난 남은 사람들, 특히 인류에 대해 그가 본질적으로 가졌던 깊은 애정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마치 토니 주트의 그것과 다름없는 '인간에 대한 애정'은 그가 왜 자본주의를 그리 신랄하게 비판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Freedom"으로 지난 198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에 초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현재 국내 번역본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바우만은 글의 서두 뿐만 아니라 각 장에서 틈만 나면 자유의 정의에 대해, "너무나 모호하고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우만이 자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그저 모호하게 인지하고 있는 이 자유가 현실의 범주에서는 이른바 자원과 권력의 유무로 그 실효성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극소수의 기득권들과 엘리트 지배층이 절대 다수의 보편적 자유에 대해 명확한 규명을 얼마간 회피해 왔다는 점을 바우만의 이 글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좀 이른 도입이겠지만 바우만은 3장에서,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자기 자신의 자원에 의존해야 할 필연성"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에서 막대한 자원을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자유는 확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동안 자본주의가 '근대에서의 자유 개념'를 도출시키고 이것이 개인주의와 맞물려, 인간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실현 가능성과 그 보장에 대해 발언해 왔는데요. 5장에서 인용된 한나 아렌트는 "공공의 자유를 향한 혁명적 추구가 실패한 것은 진정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라는 그녀의 비평이 역으로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는 개인의 자유에 의지가 될 수 있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1장에서 전반적으로 논증되고 있는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과 연계해 분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민들이 공공의 안정과 더불어 그것에 기반한 자유를 원하고 있을텐데요. 반대로 모든 개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누리고자 한다면, 그 사회는 거의 폭력적인 종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펠라지우스 (펠라기우스)의 언급대로, "구원을 향해 사는가 아니면 멸망을 향해 사는가는 인간들에게 달려있다"는 헉슬리 식의 극단적인 논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당시 사회지도층과 가까웠던 제러미 벤담은 그 소수의 계층이 원하면서, 그것대로 확실한 이익이 되는 통제 사회의 틀을 판옵티콘으로 그려보았는데요. 관리자들의 자율과 수용자들의 통제는 기본적으로 대립되는 조건이지만 이러한 양가적 틀 안에서 균형과 통제를 통해, 사회가 모든 사람들의 통제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요구를 효과적으로 공공의 이익(엄밀히 따지자면 소수 기득권들의 이익과 안전)에 부합할 수 있느냐를 실험해 본 당시로서는 꽤 근사한 사회적 모델이라고 평가 받을 수 있을겁니다. 저는 이 글의 1장에서 바우만이 왜 판옵티콘을 끌어왔는지에 대한 실로 현실적이고 정확한 이유는 "모두의 자유는 사회의 계층화에 따라 차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요구하는 '안정'이라는 가치가 이처럼 받아들이는 상대의 입장에 따라 양가적일 수밖에 없기도 한데요. 물론 공공의 이익 차원에서 사회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은 저 역시 이에 동의합니다. 즉, 벤담의 판옵티콘은 다수에게 어떻게 거의 자발적은 수준에 준하는 통제를 받아들이게 할 것인지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모델화라고 전제한다면 '자유선택'.'자유의지'와 같은 자유의 갈래들은 확실히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불행한 건지 좋은 건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동안 바우만은 사회학에 대한 관점에 대해 뒤르켐보다 더 일관되게, '인간을 위한 학문'으로서의 일종의 의무를 강조해왔습니다. 그의 이런 사회학으로서의 개념적 범주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자유'역시 인간의 진보와 인간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요. 다만, 2장에서 약간 드러난 바와 같이 중세의 시기에 있어서도 '자유민'에 대한 봉건 영주들의 야료와 술수가 음이든 양으로든 존재했고, 다음 3장에서도 근대에 있어서 자유가 자본주의에 의해 거의 강제적으로 규정됨으로 인해, 우리가 미약하게 나마 인지하고 있었던 자유에 대한 본질이 어쩌면 자본을 위한 부차적인 수단으로 국한되었다 볼 수 있겠는데요. "만인을 위한 자유, 기본적 주권이 포함된 자유"가 자본과 자원 그리고 권력의 유무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졌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는 일관되게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와 맞물려, 다수 시민의 자유라는 함의의 소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수많은 정치인들에 의해 이 자유라는 단어는 재생산되었고, 누구나 손쉽게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한 강조는 틈만 나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자유를 향한 욕망은 억압의 경험에서 온다"는 3장의 도입은 "자유에 대한 요구와 동일하게 사회적 작용에 대한 소위 긴장 관계"와 연관되어 있고, 앞선 자유의 근대적 형태는 "개인성과 자본주의와 맺는 밀접한 연관"에 있어서, 근대와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된 이래로 개인이 자기 확증적이고 독립적이며 주권을 지난 개인의 형태를 띠지 못하고 있는 점은 일종의 억압의 새로운 형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우만은 자신의 여러 논저에서 '자본주의적 소비 사회'에서 개인이 주도권을 갖기란 실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며, 노동 자체가 인간의 삶 전반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에 안토니오 네그리의 "삶 자체가 노동에 처해졌다"는 다소 불편한 현실 인식은 이를 아주 잘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유가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계층과 계급에 따라 격차가 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차이와 혹은 차별에 설사 사회에 '겸허한 도덕적 중재자'가 존재한다 손 치더라도 우리가 깊이 자본주의를 내면화한 상황에서 모두에게 '주권이 포함된 자기 확증적인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글의 전체적인 논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자신의 이 글을 통해, 시민들에게 현실의 실체를 면밀하게 폭로하고 싶었던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당시에는 뭔가 혁명적인 사건으로 미화되는 '근대적 개인의 탄생, 개인주의의 발명' 등은 이처럼 현실을 오도하기도 했는데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 하에서 '진정한 자유'라는 의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막대한 자원의 보유와 그에 준하는 권력의 유무가 대체로 좌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비 자본주의가 모두의 자유에 부합되지 못하는 것도 실로 자명한데요. 한나 아렌트의 시민 모두의 자유에 대한 선결 조건이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경제적 조건의 현실화가 실질적으로 필요하다고 전제했다면 오늘날 서구 사회가 그러한 조건을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충족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 비용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많은 기득권들과 엘리트들에게 있어 평범한 시민들의 삶의 안정이 자신들이 바라는 체제 안정과 자유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 시민들의 자유와 삶의 안정이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국한시켜 버리는 것은 아주 손쉬운 태세지만 이를 조금만 들여다 보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저들이 하이에나 무리와 같은 단순한 '약탈적 사회'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실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모두의 자유'에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 글의 서두에서 "민주적 통제에 따라 잘 수행되고 있는 국가에서 시민들의 자유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보다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는 문제로, 앞선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해악을 설파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결국은 자유의 본질적 증대와 같은 문제를 포함한 것들이 사회의 자본의 종속화는 물론 시민들에게도 내면화가 됨으로써, 크나큰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후세에게 베버가 여실히 비판한 대로 "이성을 그 자신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해 적용하는 일은, 선택된 소수에게만 열려 있었고 또 열려 있게 될 선택지였다"는 일종의 경직된 미래가 되물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의 민주적 통제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감시 사회가 그려나가고 싶어하는 그러한 일방적인 통제 사회에 대한 견제와 가까운 미래의 민주주의 붕괴에 따른 '과두제' 출현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민의 야생성'을 잃어버린 우리의 현재 모습을 각자가 노력하여, 바꿔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한 조언은 이미 존 듀이가 우리에게 명확히 보였던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벌을 받거나 감옥에 가거나 고문당하거나 박해받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 될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도 염두해 두자.

그러므로 자유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원 resource이 있어야 한다.

계몽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더불어 사회학자들도 세계를 탐구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사람들이 살기에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우월한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행동의 순응성일 따름이므로, 지속적인 보상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기술은 배우기 쉽고 학습자에게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

통제의 영속성과 편재성은 수용자에게 자유만 빼앗는 것이 아니다. 효과적일 경우, 그런 통제는 수용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 자기 자시느이 행위를 선택하고 이끌 수 있는 능력, 자기 자신의 삶을 틀 잡고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가 버린다.

‘자유‘라는 제목이나 부제를 달고 있는 책들은 대부분 이상과 비슷한 ‘자유‘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책들은 대개 아 주제에 대해 쓴 영향력 있는 지적 저작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며, 비판적으로 접근하려고 시도한다.

자유민은 주인에게 충실할지 또는 배신할지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그 선택에 따라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받아야 했다

오직 타율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쓰기 위해 자유를 정식으로, 또 정면에서 악의 편에 가져다 놓은 이론이 등장한 것은 아마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고 복종시킬 것이며, 물리 법칙을 지배하고 사물에 대한 권력을 가질 것이다. 이런 심성은 배운 대로 사람마저도 사물을 취급하는 방법과 똑같은 방식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속에서도 표현된다. 우리는 사람들 역시 사물인 듯이, 서로를 주조하고 조작하는 수단으로 본다‘

베버가 볼 때, 이성을 그 자신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해 적용하는 일은, 선택된 소수에게만 열려 있었고 또 열려 있게 될 선택지였다.

우리 사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이든 그 자유는, 근대와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된 이래로 우리가 자유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라고 간주했던 자기 확증적이고 독립적이며 주권을 지닌 개인의 형태를 띠지 못하고 있음이 확실하다고 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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