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미래 - 경제에 현혹된 믿음을 재고하다
장 피에르 뒤피 지음, 김진식 옮김 / 북캠퍼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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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뒤피는 프랑스의 엔지니어이자 최근에는 철학자로서도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는 파리 남부에 프랑스에서 권위있는 그랑제꼴 중 한 곳인 에꼴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도미해, 스탠포드 대학의 언어 및 정보 연구센터 CSLI 의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작가이자 지식인으로 유명한 장-마리 도메나흐와 더불어 에꼴 폴리테크니크 내에 인지 과학 및 인식론 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프랑스 가톨릭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한 뒤피는 철학과 사회 문제에 대한 여러 저작 활동을 왕성하게 해오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12년에 원제, "L'Avenir de l'économie: sortir de l'économystification , Flammarion"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4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전에 질베르 리스트는 비경제학자들이 경제와 경제학에 대해 더 많은 비판적 의견 개진과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사실 경제학의 영역이 경제학자들 특유의 전문가주의론에 매몰되어 사회에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인 지경에 이른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만약 소위 전문가의 영역, 전문가의 정치라는 것이 시민과 일반 정치에 괴리되어 있다면 그만큼 사회에 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저자인 뒤피는 이 글의 2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경제학 전반의 비타협적인 자기 초월적인 측면에 대해 비판하고 이를 베버의 인식론대로 인류가 탄생시킨 많은 학문이 실질적으로 아주 기초부터 형이상학적 토대에서 발전하여 이것이 입증된 것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자기 초월적 관념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뒤피는 이 점을 도식적으로 비판하기 전에 자본주의가 이와 같은 연료를 바탕으로 생명력을 발휘하기에 어쩌면 터무니 없는 자기 예언적 측면의 인식을 기반으로 경제가 추구하는 미래가 항상 장밋빛 전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비평은 그만큼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뒤피는 이러한 경제학에 대한 굳건한 믿음들에 대해 (거의 불가능한 예측까지 포함하여) 동일한 2장에서 학계와 사회 전반이 경제에 '현혹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일정 부분은 소위 전문가들에 의해 경제학이 신학의 범주 안에 스스로의 대관식을 치러낸 이래로 비판에 대한 전면적인 성역화가 강요되어 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지점에서도 뒤피는 이러한 맹목적인 분위기 자체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 의지'를 사실상 박탈당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라 일관된 논점으로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식들은 경제가 스스로의 가치보다 더 많은 권위와 권력을 부여받으며 정치를 단순화 시키고 정치학 전반을 경제학을 뒷받침 시키는 소위 '시녀'로서의 역할로 한정했습니다. 미국과 같은 경우는 이미 경제 엘리트들과 정치인들, 정치 엘리트들 간의 서로의 이익에 따른 아주 긴밀한 협조가 증대되어 왔고 일반적인 자본이 이러한 사회개조가 이뤄졌을 때, 흔히 쉽게 내면화 된다는 점에서 어떤 이의 발언대로라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텐데요. 사실 여기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할 생각은 없지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가 경제적 자유와 배타적인 이익을 더 증대시킬 수 있는 소위 경제 권력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는 쪽으로 강화되어 왔다면 이쪽에 있는 이들이 보기에 평등과 경제적 분배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눈엣가시 같았는지 쉽게 짐작할 만합니다. 저는 애초에 경제학에 대한 어떤 권위 부여와 권력화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학문의 입장에서 공공의 이익과 보편적인 사회의 안정을 위해 과연 경제학이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 프리드먼과 같은 자들의 왜곡에 거짓으로 휘둘려 왔다는 점을 먼저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있어서도 뒤피 역시 일관되게 동의하고 있었는데요. 저의 이러한 인식이 뭐 거창한 측면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많은 학자들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합리적 이익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증명해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좀 더 솔직하게 경제학과 시장이 원하는 사회와 정치라는 점을 우리가 먼저 인식하고 이들에 대한 어떠한 신성한 측면 내지는 고유한 가치 체계에 시민들이 더 이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의무와 채무와 전혀 존재 하지 않는 이익"이란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먼저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 글에서 저자는 이런 경제학에 최근 윤리학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여러 학계의 의견을 터무니 없는 조언으로 치부하고 있었는데요, 3장에서 인용 된 피터 틸의 투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지만 하이에크를 비롯한 사이비 경제학자들이나 경제적 이익에 함몰되어 있는 이들이 주장하는 합리주의라는 문제는 그저 얼마나 자본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느냐는 의도가 강력하게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미 보이지 않는 손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이 입증되었는데도 경제학이 윤리학의 당위를 받아들여 '인간 다운 경제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달걀에서 마땅히 꿩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경제와 경제학에는 오로지 모두가 동의하는 법에 의한 규제와 책임과 책무에 대한 원칙이 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더욱 강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뒤피의 4장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본의 이익에 결코 반할 수 없는 것이 경제학의 관념이라면 지금은 무엇보다 자본이 갖는 역설들을 타파하고 수많은 경제학자들에게 터무니 없이 공격당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제 궤도에 올리는 길만이 시민들의 보편적 이익과 수요와 공급이라는 맹신의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우리들의 삶을 보전하는 방편이 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비합리적인 선택'에 대한 자본의 맹비난은 이처럼 다시 생각해 볼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모인 사회 역시 타도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얼토당토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인간 스스로가 비합리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장 자크 루소가 견지한 일반 의지는 이러한 대목에서 도출되었다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뒤피가 인식한 루소의 공화론, 즉, 어떠한 매개조차 없이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행위 자체가 진정한 정치 행위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자연 상태를 올바르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자기 운명적인 서사에 있어서 우리 인류의 미래는 단순한 인과론의 굴레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제와 자본이 추구하는 이윤에 대한 문제도 그런 식으로 살펴 볼 수도 있고 뒤피의 말마따나 "냉전 시대에 전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을 핵전쟁을 그야말로 '가까스로' 모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제가 신성한 범주 안에 마땅히 들어가는 그리고 시민들이 결코 그것의 권위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옥죄고 있는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글 서두에 뒤피의 언급대로 이러한 경제적 초월성이 실제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실질적으로 박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던 것이죠. 즉, "경제인들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타심도 관대함도 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비도덕적'이어서일까?"라는 주장은 이처럼 자본과 경제의 메커니즘을 실질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로드릭의 글이나 크라우치의 글들에서 시장과 경제에 좀 더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가치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었는데요. 경제에 대한 아주 평범한 인식을 갖고 있는 많은 시민들에게 뒤피의 이 글은 매우 적나라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르네 지라르의 주장대로 어떠한 것의 권위를 제거하는 일이 그것으로 인한 문제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더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전문가들의 무조건적인 소멸을 바라는 반지성주의자는 결코 아니지만 많은 시민들의 견제, 토론, 비판적 의견 개진 등은 전문가 혹은 전문가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현대 사회에서는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엘리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해일 수도 있지만 경제와 사법을 막론하고 사회 내의 '완벽한 균형자'를 엘리트 사이에서 찾기 힘든 연유는 이러한 무관심과 괴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계급주의적인 배타성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은 그래서 더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뒤피는 이 글의 4장에서 '논리적 선택이라는 가설'로서 경제학에서의 합리주의 및 자본의 이익추구가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학문에서의 형이상학적 연구가 실질적으로 불가하다는 점을 뒤피가 피력한 것일까요. 물론 저의 억측 일수도 있겠습니다.

사회와 한 민족의 정치 형태가 아무리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모든 시민은 항상 자기를 감시하는 몇 개의 지점을 느끼면서 끈질기게 그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은 학문을 행하고 있으므로 모든 관념적 가설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순을 시장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개인들이 가격에 대한 인과율적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격을 고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경제에 이런 정책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제학이 철학적 노력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상호 의존성이 강한 경제에서 구매력의 회로는 매우 복잡하므로 기업가들이 과잉 생산한 상품이 결국 재고품 전문 가게로 가지 않는 것만 바랄 수 있을 뿐이다

경제 이론이 최대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합리적 인간이 서로를 신뢰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루소가 규정하려 한 것은 중개자도 대표자도 없는 국민에 의한 국민의 직접 통치이다

하지만 경제는 정치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면서 절실히 필요한 외부 힘을 상실한 채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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