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틀란드 러셀은 아마도 그 시기의 진정한 백과전서를 추구한 지성인으로 충분히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저 역시도 러셀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쓰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합니다. 혹자들은 그런 러셀을 허버트 스펜서에 빗대어 분석하기도 하는데요. 아마도 다방면의 분야에 관심을 갖고 당시의 선도적 연구를 해왔다는 측면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체로 이에 반대하는 편입니다. 사회학에서의 스펜서의 악명을 고려한다면 러셀을 거기에 비교하는 행위는 다소 옳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생애 말년에 이르러서 자신이 사회주의자인지 평화주의자인지, 자유주의자인지 모르겠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특히 인류와 정치에 관련된 그의 사상이 격동의 세기를 거치면서 다소 변화될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을 몸소 겪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시대의 첨예한 굴곡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Proposed Roads to Freedom"으로 지난 1918년에 첫 출간되었고, 지금 국역본은 2006년의 영국 스포크스먼 출판사에서 새로 찍은 것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국내에는 2012년 10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러셀의 이 책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피력하는 당시 시대의 여러 문제들과 그러한 것들을 과연 정부가 해결해 낼 수 있느냐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기반해, 대다수 시민들을 위한 자유 자체를 어떻게 하면 소수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서 이를 보장하고 어떻게 하면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누리게 되는 균형적인 자유 사회가 될 수 있는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5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국가의 권력에 대한 장(章)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거듭 중요해지고 있는 경제, 즉, 경제 권력의 국가와 정치 침투에 대해 본격적인 논증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다음 6장에서 러셀은 앞으로 금융 자본주의가 더욱 세를 얻을 가능성을 예측하고, 반대로 종래의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했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분배가 오늘날 이 시대에 더욱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아마도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러셀은 그 시대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극도의 회의를 느낀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앞선 장들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민주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에 대해 러셀 역시 이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평가하고, 민주주의가 어떤 시대의 정치 체제보다도 낫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나, 민주주의가 절대 만능이 아님은 모두가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만 제 생각으로는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들 가운데 무엇보다 민주 체제에서 자본 권력을 분리하지 못한 지난 1세기 간의 실패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슘페터가 비판한 민주주의의 부패의 문제가 어느 정도는 자본 권력의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글에서 러셀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분석을 늘어놓으면서, 정작 본인은 생디칼리슴 (노동조합주의)에 대해 이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가능성에 대해 논하고 있기도 한데요. 우선, 그 시대의 아나키즘의 영향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정치적 불신'이 노동자들의 노동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정치 세력화가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이론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엿보였으나, 과거 아이젠하워 정부를 거쳐, 기존의 뉴딜 경제 정책이 전부 철회되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노동 조합이 전반적으로 분쇄되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부 국가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멀지 않는 미래의 결과물을 러셀이 제대로 목도하지 못한 점은 꽤 유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제가 보기에 이 글에서 논의되고 있는 "자유의 불평등 문제'가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자신의 경제적 조건이 자유의 문제를 가늠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가능하다면 충분한 생산력을 보이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생활 수준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러셀의 원칙에 일정 부분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 3장에서 인용된 길드 사회주의는 확실한 대안일 수는 없겠으나, 꽤 고려해 볼만한 대안이라 여겨졌습니다. 이 길드 사회주의로 의회와 길드 평의회라는 양원화 된 권력 분업 체제가 소비자와 생산자라는 입장에서 균형적인 정치 권력으로 이원화 가능성이 점쳐졌는데요. 이것은 클라우스 오페의 독일 정치에 대한 평가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아직도 노동자주의와 이들의 권익에 민감한 독일은 자신들의 주류 정치가 사회 민주주의라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많은 독일 제조업자들이 노동자들과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있는 점은 길드 사회주의의 정치적 제안들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생산된 것들이 노동자들에게 좀 더 돌아가야 한다는 생디칼리슴의 주장을 정치적 맥락에서 받아들여 자본가들의 권력 비대화를 줄여나가는 쪽으로 견제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만큼 정치에 있어 자본의 잠식이 그동안 아무런 사회적 동의 없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거의 반증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나키스트들에게 있어서 국가에 대한 혐오와 분쇄 노력은 지금에 와서는 다소 맞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보다 아예 직접적으로 언급하자면 이러한 국가 혐오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아주 반기는 내용이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데요. 물론 국가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반대의 의견을 찍어 누르기 위해, 그 권력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진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죠. 저는 아직도 경제적 재분배에 있어서 국가가 소기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단순히 시민의 자유와 체제 전반을 자신의 의도대로 오용될 수 있다는 국가의 공포에만 집중한다면 자본의 횡포를 제한할 길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동안 많은 보수 우파들이 현재의 정치적 불신을 조장하는 쪽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왔는데요. 신자유주의와 보수 우파가 오래전에 결탁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국가로 인한 위협의 문제는 본질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으로선 국가 사회주의와 같은 강력한 국가 체제의 출현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이는 역사학자인 크리스토퍼 클라크가 분석한 것과 같이. 1914년 이후의 유럽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의 본질은 폭력적인 민족주의가 바탕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처럼 어느 주의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 본질이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냐를 밝혀내고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주주의에 대한 한계를 꼬집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연구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겪은 펜데믹 사태로 보았을 때, 국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 따위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것이죠. 러셀이 작금의 펜데믹 사태를 예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공동체의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이동할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사회에 왜 형법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가와 맞물린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개인의 자유는 필요에 따라 공동체를 위해 제한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러셀의 말마따나 이 자유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공공선 역시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자유 그리고 평등을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 정치 체제라고 여기지만 반대로 오로지 자유만을 위해 민주주의가 오남용 되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글 5장에서 언급되는 위선의 탈을 쓴 민주주의의 정치인들의 모습이나 "가장 정직한 사람조차 소름끼치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평가로 보건대, 선출된 자들의 특유의 자리보전이 민주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러한 저들의 정치적 이익이 한편으로는 시민의 자유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익히 모두가 알다시피, 아주 친자본적인 입장에서는 경제적 권력이 월등한 자가 그렇지 않은 모든 자들을 부릴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 스스로가 속으로는 민주주의를 극도로 경멸하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처럼 연기하는 자들이 있듯이, 자본이 은연중에 이룩해 민주주의에 반하게 되는 이 계급주의적 열망은 이처럼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측면에서 아나키즘이 시민들에 대한 경제적 분배의 필요성을 역설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자본의 지배가 이제는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는 이 시점에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직접적인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지점이 있을지는 다소 회의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 정치에 있어 자본의 지배는 너무나 면밀하고 치밀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봉하는 제도와 법률 역시 경제적 자유와 자본의 권력화를 사실상 용인되는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자본에 대한 건전한 비판 역시 점차 성역화 되는 실정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러셀이 이 책의 본질이 가까운 우리의 현재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요. 사회주의와 아나키슴은 물론 저자인 그가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생디칼리슴 역시 그 전망이 비관적이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 실현 가능한 최선의 체제는 길드 사회주의이다. 길드 사회주의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요구와 생디칼리스트들의 국가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국가 간의 연방주의를 지지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여러 직종들로 구성된 연방주의 체제를 채택함으로써 가능하다

반면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는 모든 대의제 기구에 반대하며 공동체의 정치적 사안을 다른 방식으로 규제할 것을 지향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특권과 인위적 불평등의 철폐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 민주주의자이며, 기존 사회의 임금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는 투사이기도 하다

생디칼리스트들은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여기저기 조금씩 해대는 땜질이나 기득권층이 기꺼이 동의할 만큼 사소한 조정이 아니라 근본적 재건, 즉 압제의 모든 근원을 일소하고, 인간의 건설적 활력을 해방하며, 생산 및 경제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고 규제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프랑스는 권력을 거머쥔 수많은 정치가들을 보면 원래 사회주의자로 정치 이력을 시작했으면서도 결국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탄압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생산된 재와의 총량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공동체가 유용하다고 인정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외부 권력에 일절 간섭을 받지 않고 생동한다면 우리는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을 즐거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한, 사회가 선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 따위는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주로 권력이 부와 결탁하여 낳는 해악을 근거로 들며 부의 불평등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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