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경제학 - 지금 왜 애덤 스미스인가?
고구레 다이치 지음, 유가영 옮김 / 말글빛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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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고구레 다이치는 일본 게이오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한 이후 후지필름을 비롯한 사기업에서 경력을 쌓은 다음, 독립해 현재는 일본 교육커뮤니케이션협회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그는 경제저널리스트이자 일종의 경제학 분야의 작가로서, 일반인들에게는 아직까지 친숙하지 않은 경제학 분야의 글을 번역 및 평역해 논저를 쉽게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일본 내의 기사를 찾아보니 그의 경제학 관련 서적들이 생각보다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나오고 있는데요. 올해 1977년생으로 보기보다 나이도 상당히 적어 글에서도 꽤 진취적인 성격이 드러나 있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는 일년에 약 십 여권의 책을 집필하고 있고 더불어 왕성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는 대중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いまこそアダム·スミスの話をしよう~目指すべき幸福と道德と經濟學~"로 지난 201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7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저자인 고구레 다아치의 이 책은 요즘 한창 나오고 있는 '애덤 스미스 다시 읽기'에 부합되는 글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사실 그동안 애덤 스미스에 대한 사상 자체가 너무나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래 카를 슈미트에 대한 재해석과 연구에 마찬가지로 스미스에 대한 올바른 재해석이 이뤄지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스미스의 정확한 이해를 돕는 연구가 다소간 어려운 부분이 개인적으로 알기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도 경제학 전반의 스미스에 대한 오류와 편의주의적인 해석이 경제학 전반의 변하지 않는 흐름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저는 그동안 애덤 스미스에 대한 꽤 조직적인 오역에 대해 신자유주의자들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일관되게 밝혀 왔습니다. 약간의 일례로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의 입으로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했으면서도 애덤 스미스가 얼마나 '정의'를 강조했는지에 대해 이를 제대로 언급하지도 않은 프리드먼의 저 뻔뻔함에 입을 다물 수 없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만, 저자의 해석대로라면 이러한 스미스에 대한 오역은 당시 신흥 자본가들이 '이기심'에 대한 이해를 작위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러한 가운데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인식이 점차 구축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급격한 신자유주의화의 흐름속에서 애덤 스미스가 이들의 산파로 오용된 것은 분명 학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물론 자유주의 경제학의 틀을 처음 제공한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스미스의 평가가 이뤄지고 있는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그의 사상이 여전히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현재 학계의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은 크게 7장으로 구분되어 있고 1장과 2장이 도덕 감정론을 다뤘다면 3장부터는 국부론의 주요 핵심과 오해되고 있는 부분을 정정하고 재해석하는 순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선, '보이지 않는 손' 과 '이기심'을 먼저 언급하고 싶은데요. 저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명확하게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딱 한 차례씩 나오는 점을 먼저 밝히고, 특히 이 보이지 않는 손은 일종의 '신의 영역'으로서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 정정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을 믿음으로써 인간 사회가 저절로 기능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한데요. 당시 애덤 스미스가 무신론에 가까운 데이비드 흄과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것 만으로도 당시 사회에서 이런저런 기피를 당했다는 일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진정한 규정이 신과 관련된 문제였다는 점은 꽤 놀랄만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진정한 선악의 판단'은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스미스의 인식 또한 앞선 신의 존재와 연관이 깊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선악의 문제를 신성의 책임으로 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회의 판단에 여지를 남기기는 했습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미스의 이런 생각 자체가 그의 신중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 다음, 이기심에 대해선 "사회가 잘 통합되고 발전해가기 위해서는 '이기심'이 필요하다고 스미스는 말했으며, 그 이기심이 정의와 윤리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는데요. 그동안 우리에게 주입된 이기심의 주요 골자는 다소간의 도덕과 윤리를 훼손한다 하더라도 개인의 이기심 추구는 최대한으로 보장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의 본질과 일맥상통하며 스미스의 이기심에 대한 해석은 날로 왜곡되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덕을 위반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그의 주장 역시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명확히 그 궤가 다른 생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좀 이른 결론이긴 합니다만 국부론에서 보여지는 스미스의 '경제 발전에 대한 인식'은 당시 빈곤층의 생활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었고 이러한 도덕적 목표로 인해 이기심을 어느 정도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그의 고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자본의 축적' 또한 마찬가지의 논법인데요. 사회가 경제활동을 통해 자본을 축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들을 좀 더 원할하게 생산하고 공급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 단순히 자본과 생산품이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 구축될 수 있을 만큼의 일종의 효용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미스는 줄곧 부유층이 아니라 빈곤층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물론 그가 획기적인 대량 생산의 초기 단계를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점차 긍정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사회 기류에 당시 국민들이 소비 주체로서의 스스로의 삶의 개선에 대해 희망을 가졌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이런 스미스의 사상이 계몽주의적인 관점에서 비롯되었고 엄밀히 따져보면 공리주의적인 접근 방식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동일하게 오용되고 있는 '격차' 혹은 '격차 사회'에 대해 스미스는 줄곧 일관되게 제한적인 이해를 보이고 있는데요. 즉, 사회의 최하층인 빈곤층을 구제하기 위해 스스로 분업을 용인한 것이며, 더불어 "빈곤이 구제되기 때문에 자유 경쟁을 인정하고 격차를 용인했다"고 그는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격차 자체를 사회의 필요악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지만 자유 경쟁과 격차라는 논법은 스미스에게 구제와 빈곤 퇴치를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 지점에서 현재는 그 당시와 사회 상황이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왜곡이 심하게 하여서 격차에 대한 관념과 이에 따른 능력주의를 시민들에게 줄기차게 강요했던 것에 있습니다. 한 술 더 떠 신자유주의자들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여 이러한 격차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는 것을 이론적으로 방어하기도 하였습니다. 자기들끼리야 제멋대로 저런 주의를 서로 품앗이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신자유주의 이행 자체가 이미 시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정당성이 다소 상실된 상황에 그 거창한 인식론까지 들먹이며 본질을 왜곡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학문의 입장에서도 이 일관성이라는 부분은 설사 흔한 이데올로기로 국한될지라도 그저 이익과 쓸모에 맞게 재규정되고 재구축되는 실정은 잘못된 것이죠. 이것이 도덕의 상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저런 움직임이 다소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기조 뿐만 아니라 사회체제 전반까지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뀌어야 했기에 저들은 그것에 대한 어떠한 당위성을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의 손꼽히는 두 개의 정부가 나서 자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으니 멀뚱거리고 서 있는 시민들의 관념을 개조시키기 위해 저런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억측을 해 보았습니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가치를 바탕으로 현재든 미래이든 간에 자본가가 '공공 정신을 결여'하게 될 것을 크게 우려하였습니다. 스미스가 주창한 그 자유주의야 말로 사회 전체를 위한 함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미스가 도덕 감정론과 국부론을 통해 제창한 사회 시스템적 가치는 "정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로운 경쟁과 이기심, 이를 바탕으로 구축된 경제 발전의 이익이 부유층 뿐만 아니라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에게도 돌아가야 하며 이런 것들이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분업화 또한 인정받게 되고 자본의 축적과 재화의 사용 역시 무엇보다 자본가들의 공공 정신이 확립되어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본질적인 사상의 핵심이 크게 왜곡되어 흡사 자유 경제학과 신자유주의의 화신으로 알려져 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제학계에서 왜 애덤 스미스에 대한 항간의 왜곡을 그냥 눈뜨고 바라만 보고 있는지 지금도 깊은 의문을 갖고 있는데요. 예전에 강준만 교수가 우리의 언론은 "진실을 조금 말하되 그 전부를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떤 세력의 셈법이나 주의 주창에 의해 위대한 사상가의 주장들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듯이 스미스 역시 제대로 된 해석과 올바른 재평가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스트라우스와 스미스를 무조건적으로 동일하게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학계 통념상 이렇게까지 왜곡되어 주장되었던 일례는 아마 스미스가 거의 유일하지 않나 글의 끝머리에서 생각해 봅니다.


- 다시금 애덤 스미스에 관한 글을 읽고 나니,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고백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문구 하나가 떠오르네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사회적 부조를 없애는 일은 그만큼 손쉬운 일이었다"는 취지였었죠. 데이비드 코츠의 글도 그렇고 확실히 1979년 이후의 그 과정에서 대다수 시민들의 이익은 거의 무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 스미스는 사회가 잘 통합되고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이기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기심이 정치와 윤리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미스는 먼저 사람들끼리 문제없이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과 인간으로서 지녀아 할 도덕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덕 감정론)의 서론에는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인간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라고 쓰여있다

올바른 사람이 되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만들어낸 재판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사회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듯한 개인의 행동은 정부에 의해 금지 또는 억제되어야 한다

스미스는 분업과 자본축적의 결과, 부가 증산되고 그것이 사회의 최하층까지 확대된다고 생각했다. 즉, 사회의 최하층인 빈곤층을 구제하기 위한 분업이고 자본축적인 것이다

스미스가 생각하는 국민의 풍요로움이란 ‘국민1인당 상품량(필수품과 편익품의 양)‘이다. 필수품과 편익품이 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증산에 기여하는 것이 유용한 자본축적이다

스미스의 이념이 오해받고 있다는 것은 여러 번 말했지만 이 점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스미스가 주장한 자유주의는 사회 전체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현대적 경제학자들 중에는 애덤 스미스를 자유방임주의자 혹은 사리사욕의 추구를 장려한 이익주의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자본주의 경제의 여명기로 비즈니스를 확장시켜 나가던 신흥자본가들이 스미스의 이론을 "자유주의자가 선이다"라는 부분만 확대해석 해서 마음대로 인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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