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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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베니아 인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에게 있어서 때론 대중 철학자의 면모를 보이거나 혹은 번뜩이는 사회 비판과 견고한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갖고 있는 전문 지식인으로도 읽혀지기도 합니다. 그를 비판한 로버트 미지크나 노엄 촘스키의 사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계 대중들에게 있어서도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그의 광범위한 사회 비판과 변질된 자본주의적 세계에 대한 일침은 입으로는 열심히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도 내심 금융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전반에 비판의 날을 세우지 못하는 다른 지식인들에 비하면 지젝의 존재는 실로 귀중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젝을 강한 맛의 ‘토니 주트‘라고 언급하고 싶은데요. 약간의 개인적 소감이지만 지젝의 글을 보노라면 이상하게 토니 주트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지젝의 이 글은 마오쩌둥의 일화를 인용한 제목으로 원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한국판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지젝의 오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노력으로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경희대학교가 준비한 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천하대혼돈 Disorder˝라는 제목으로 지난 2020년 경희대출판부에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아마 독자들은 출판사가 선정했을지도 모를 이 특별한 제목으로 말미암아, 근래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여 지젝이 특유의 현실 비판을 담은 글이라 여길 수도 있겠는데요.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실린 글들은 ‘전세계적 전염병 사태‘와는 별반 관련이 없습니다. 좀 더 이 글의 성격을 밝히면 ˝변질된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강요된 자유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정치를 극단적으로 이끄는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 글의 3장에서 지젝은 오늘날의 당면한 문제를 ˝포퓰리즘적 국수주의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꼽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레이션은 제가 얼마전에 서평을 쓴 콜린 크라우치의 인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선 문장의 전자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후자는 아마도 강요된 자유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요. 지젝은 이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자유는 그저 ˝몇 개의 불행들이나 고통을 선택하는 수준의 자유˝로 반대로 진정한 자유주의란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자유주의의 오랜 전통˝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시장의 참여를 주장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시장의 자유를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자들은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행 가운데 지젝은 자본이 ˝금융 엘리트들의 교묘한 사기술˝에 의해 변질되어 왔으며,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런 측면에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젝의 이 글을 일독하면서 문득 한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는 반대하지만 (건전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관한 것인데요. 우선 이 신자유주의와 금융 자본주의를 과연 분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을 먼저 고민해 봐야겠죠. 건전한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젝이 설명하는대로 ˝민주주의적 합의˝를 자본주의에 더 많이 요구하면서 금융 엘리트들이 ˝공익과 개인의 권리 및 다수 시민들의 삶의 통제와 품위있는 삶˝을 먼저 인정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금융 자본주의가 본격화 되면서 소위 ‘카지노 자본주의‘에는 전통적인 가치들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 여겨집니다.

여기에 지젝은 1장에서 ˝오늘날의 고삐 풀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대 새로운 권위주의는 형이상학적으로 볼때 모두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고삐 풀린 자유주의는 만연한 신자유주의로 해석할 수 있고 제한이 없는 개인주의는 과거 토크빌이 우려한 모습과 일맥상통합니다. 즉,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옥죄어 온 신자유주의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개인주의적 이득을 더욱 옹호한 이 개인주의는 결국 극단의 정치를 탄생시켰습니다. 지젝이 인식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이나 앞서 인용한 크라우치와는 동일한 주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의 유럽은 과거의 전통을 잃어버리고 이러한 파급의 한 가운데 놓여있다고 봐야할텐데요. 이에 지젝은 유발 하라리의 ˝민주적 선거의 필요불가결한 선제 조건인 선천적 유대감˝이 건강한 의회 민주주의의 선결 조건이지만 유럽에서 지금 드러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보편적 다원성을 거부하고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정치를 해체하고 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그는 이 글의 중요한 대안을 다루고 있는 2장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어떠한 당위성을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력한 좌파들에 의해 사실상 의회 민주주의가 제 힘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좌파들이 관념적인 비판과 관성적인 자본주의적 수용을 그만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현실적인 좌파가 되기를 지젝은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주장한 ‘좌파 포퓰리즘‘을 확대시켜 옹호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좌파는 보편적 다원주의에 입각해, 시민의 인권과 마땅한 권리 보장, 도덕적 해이에 빠진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적 비판, 신자유주의의 무결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논증 등을 전세계적 네트워크와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이를 진보의 포퓰리즘적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선명한 대결적 구도를 좌파는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며, ˝금융 엘리트, 근본주의자, 진보 진영의 다른 용의자들을 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일종의 좌파들의 사회적 대적에 대한 회복이라고 언급하고 싶은데요. 진보 좌파는 현재의 무기력한 상황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날이 선 비판을 하는 것이 사회 진보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겠죠.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를 이곳에 굳이 대입하고 싶진 않지만 수많은 좌파 사상가들이 카를 슈미트를 왜 열독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파행의 근본적 원인은 ˝자유주의적 합의의 실종과 좌파 무능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피터 콜로지의 언급대로 산업 혁명 이후 우파 보수주의는 자본주의와 너무나 쉽게 화해를 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화 된 자본주의를 마땅히 비판할 세력은 좌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유럽의 진보 좌파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쉽게 두 손을 들고 맙니다. 이것은 지젝이 인용하는 바디우의 명제인 ˝우리는 자본주의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는 비판 세력의 몰락이 급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좌파의 몰락 혹은 좌파의 실패는 바로 이 점을 명백하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시장에서의 개인의 자유˝에 너무나 현혹된 나머지 그 이후의 실체를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시민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부자유‘를 떠밀게 만들었고 이러한 사회 시스템의 이데올로기적 강화는 금융 엘리트들과 결탁한 수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포드에게 좋은 것은 미국에게 좋은 것˝이라는 배타주의를 우리의 삶 곳곳에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파행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연유에는 그만큼 신자유주의 자체가 우리들에게 깊숙히 내면화 된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끝으로, 지젝은 여기에서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세계의 좌파들이 왜 우파들보다 더 민주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는지는 ‘도덕적 민주주의‘의 사실상 소멸이 정치사회적으로 더 위기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일겁니다. 여기에 극단의 정치를 비롯해 거대한 정치 불신과 의회 민주주의의 사실상의 몰락 그리고 군산 복합체와 엘리트들에 의한 과두제 함의까지 심지어 허무맹랑하게 전세계에 민주주의가 너무나 과용되어 왔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이런 프로파간다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인데요. 지젝은 앞서 트럼프와 푸틴 그리고 시진핑을 한 묶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현실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극단주의가 얼마나 권위주의와 맞닿아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만연된 극단주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쇠퇴시키기에 이른다고 봐야하는데 트럼프가 미국 정치 일선에 나오게 된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과잉‘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의 오도된 해석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충분히 짐작될 만한데요. 따라서 이런 트럼프를 실패한 민주주의의 사례라고 해석해야 될까요. 이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인데요. 이처럼 오늘날의 세계는 시민 개개인이 계몽되었다는 이성으로도 제대로 된 현실을 해석하기 어려운 환경이며, 지젝이 몇번이나 언급한대로 ˝기업들이 벌이고 있는 시민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매수와 세뇌˝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가 다음 백년의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랑시에르 조차도 인정한 시민들을 정치에서 더욱 멀리하기 위한 왜곡된 자본주의의 술수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도 있으며, 또한 지젝의 말대로 우리의 다음 세기가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후쿠시마적 자유 민주주의‘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에 대한 사활적 질문일 것입니다.


-유사한 맥락이겠지만 진보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의 확대는 부식되어 가는 정치를 위해 시급한 것이며, 지젝이 언급한대로 케인스 이상의 요술 상자를 꺼내지 않더라도 민주주의적 합의가 시장의 왜곡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답보하리라 생각됩니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 실패의 중심, 그 헌팅턴식 질환이다

고삐 풀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대 새로운 권위주의는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 모두 동일하다

포퓰리즘은 언제나 국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를 승인한 ‘제3의 길‘ 좌파의 문제는 과도하게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면이 아니라 진정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측면이다

좌파가 편가르기식의 대결을 폐기한 이유는 그것이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며,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패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퓰리즘의 진실, 즉 자본의 실재와 대결하는 일의 실패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파의 포퓰리즘적 수사는 자신이 반대하는 척하는 바로 그 금융 엘리트를 위해 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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