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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주의 ㅣ 사고의 프런티어 2
고모리 요이치 지음, 배영미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일본 도쿄 출신의 고모리 요이치는 홋카이도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후, 세이조 대학의 조교수를 거쳐 도쿄대학에서 정교수로서 강의를 시작해 지난 2019년 명예롭게 은퇴한 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9조 모임 九条の会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 9조 모임은 일본이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고 무력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일본의 헌법 9조의 개정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입니다. 따라서 고모리 요이치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민운동가이자 전후 체제에 있어서 과거 일본의 과오를 인정하고 평화 헌법의 개정을 반대하는 등의 소위 일본 내의 ‘리버럴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9조 모임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오에 겐자부로와 오쿠다이라 야스히로가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같은 그의 이력에 관해 여러 뉴스들를 번역기로 통해 읽어보니 소위 지식인의 책무에 대한 진정성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외에는 나쓰메 소세키에 관한 연구와 최근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평론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이 글은 원제, ˝レイシズム Racism˝ 으로 지난 2006년 이와나미 쇼텐에서 ‘사고의 프론티어‘라는 인문학 시리즈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참고로 위의 ‘사고의 프론티어‘ 시리즈는 국내에 삼인과 푸른역사에서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이 책은 2장까지가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담고 있고, 마지막 3장은 일본의 문학을 통해 바라본 일본인들 자신의 인종차별주의를 드러내어 비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인종차별주의가 매우 잘못 쓰이고 단어라고 여겨지는데요. 이 ‘인종차별‘에 대해 주의를 갖다 붙여 어떤 인식적 체계로 구성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전체주의가 현재는 역사사회적인 범주로 많이 연구가 되어왔듯이 인종차별주의 또한 학문적 분석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이 뿌리깊은 차별의식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 세기에 이 인종차별주의를 서구 유럽인의 시각에서 강화시킨 것이 저 개인적으로는 새뮤얼 헌팅턴의 기여가 크다고 여겨지는데요. 헌팅턴이 범한 가장 큰 잘못은 과거 서구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 따른 과오에 일종의 학문적 면죄부를 주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자신이 속한 서구 문명의 우월성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인류의 각 인종이 우와 열로 구분된다는 식의 히틀러식 논법은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글로벌리즘과도 매우 반대되는 개념이기에 이와 같은 헌팅턴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인종차별주의의 방패막이가 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물론 이 글의 저자인 고모리 요이치는 스스로 일본인의 입장에서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차세대‘라는 현상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경제 차별주의에 대해 우선 비판하고 있는데요. 그가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위 ‘롯폰기‘ 현상은 앞선 신자유주의의 이질적인 결과물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보다 유럽의 경우는 과거 유대인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혐오와 차별의식 그리고 현재에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이슬람인들에 대한 심각한 차별은 배제와 편입이라는 집단 내와 집단 외부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같은 종을 쉬이 살해하고 재산을 수탈하는 등의 수많은 역사들이 증명해 내고 있는 것은 점철된 인간의 불확실성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자인 고모리요이치는 프로이트를 통해 이를 분석하고자 합니다만 저는 이런 작업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만 철학적 접근에서 인간이 노골적으로 이성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그동안 유럽에서 뿌리깊게 각인된 고학력 계층의 백인들이 주도하는 사회 권력은 오랫동안 지배체제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도 동의하고 있습니다만 과거 이들의 견고한 권력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지배에까지 이어져 내려가 전승되어 내면화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거쳐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자기합리주의적 흑백 논리˝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백인 계층의 인종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유럽 전체가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착취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여타 사과의 발언을 기피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아마도 서구 유럽인들에 내면에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억지로 부각시키려는 노력˝이 견고하게 내재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죠.
이미 이러한 차별의 인식적 문제가 초래하고 있는 현재의 유럽 상황에 대해 자크 랑시에르 조차 큰 우려를 밝힌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이행과 맞물려 계급적 차별 의식까지 벌어지고 있는데요. 누구나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면 아무리 인종차별적 혐오에 스스로가 물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당당히 겉으로 드러내는 일은 흔히 양심의 문제와 결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2010년 전후로 극우 포퓰리즘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와 같은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랑시에르는 이 점을 우려하고 있는 듯 한데요. 저는 인종차별주의와 극우 포퓰리즘이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영합하면 유럽에서 유사 전체주의가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많은 현지의 지식인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이러한 유럽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과거에 토크빌과 듀이가 경고한 것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인지하게 됩니다. 시민들이 도덕주의적인 재교육을 하지 않고 시민 본연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 초래되는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무조건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이 인종 차별과 관련해 순전히 계몽주의적 접근 자체를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이성을 배제하고 본능과 자연스러움이라는 원초적 쾌락주의를 주장하는 다수 지식인들의 작태는 유럽의 계몽은 쓰레기통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질 따름입니다.
약간 이른 결론이지만 저자는 이 책 2장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언어 시스템 속에서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긍정/부정의 가치 평가를 수반한 언어의 상호간 결합관계의 그물망 전체에 ˝왜?!˝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그 내구성을 검증해야 한다˝고 밝히는데요. 꽤 수긍이 될만한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내부에서 그러한 만연된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여러 사상가들의 그와 같은 인용을 따로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도가 지금까지 카스트 제도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시름을 앓고 있듯이 스스로 비판 의식과 성찰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여기에 스스로 일본인으로서의 과거 일본제국주의가 고착화시킨 인종적 차별에 대한 언급을 마찬가지로 하고 있는데요. 후키자와 유키치로부터 시작된 소위 ‘탈아입구론‘은 일본인들이 ‘아시아의 백인‘이라는 망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소수의 일제 앞잡이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아시아인들을 고통의 수렁으로 빠트린 ‘대동아공영‘은 일본의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지만 현실을 그렇지가 못합니다. ˝죄를 인정해야만 타자의 존엄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저자의 통찰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시급한 과제로 남은 것은 분명합니다. 일본사회가 스스로 이러한 점을 자각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와야 하겠지만 현재의 일본 정치를 고려했을 때 이러한 소망은 아마도 금세기 내에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 판단됩니다. 그나마 소수이지만 일본 내에 이런 지식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귀중하다 볼 수 있겠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거쳐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자기합리주의적 흑백논리로써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맹위를 떨친 것인 ‘생물학적‘ ‘인종차별주의‘였다
‘인종차별주의‘는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특권, 즉 기득권을 옹호하려고 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생물학적 특징으로 남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고 해서 우리가 ‘인종차별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인간은 다른 여타 동물과는 전혀 달리 같은 인류에게 공격과 폭력을 자행하는 종이기도 하다
수천 년 동안의 디아스포라, 즉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현재진행형 전쟁으로 인한 홀로코스크의 기억을 미국과 영국이라는 두 대국이 이용하면서 중동을 거의 영구 분쟁 지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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