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세계
도메 다쿠오 지음, 우경봉 옮김 / 동아시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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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도메 다쿠오 (혹은 도마에 다쿠오) 교수는 일본의 명문인 게이오 대학의 경제학부를 마치고 교토대의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리츠메이칸대학의 조교수를 거쳐 현재 오사카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오사카 대학 홈페이지에 가보니 그의 직위가 풀타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교수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그는 일본 내의 여러 경제학회에서 학술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토마스 멜서스와 애덤 스미스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고 있는데요. 대학 홈페이지에서 그의 연구를 소개하는 항목을 보니 ‘도덕적 정서와 국가 부 이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연구‘라는 수식어는 꽤 인상적이었는데요. 왜냐하면 일반적인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관념에 대해 별반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해드릴 이 책은 지난 2008년 원제, ˝アダム·スミス―『道德感情論』と『國富論』の世界˝로 일본에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0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으로 널리 유명한 지성인 애덤 스미스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본의 아니게 논란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물론 저는 스미스가 자신이 쓴 주저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그러한 평가를 받는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제가 몇 편의 서평에서 짧게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이것은 스미스를 신자유주의의 교조로 만든 다수의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것이기도 한데요. 이런 인식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신자유주의자들이 묘사한 애덤 스미스와는 달리 그는 매우 도덕주의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일단 도메 다쿠오 교수의 이 책은 짧은 서문과 함께 크게 두 부분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여기에 많은 독자들이 국부론에 대한 부분만 따로 읽어보실 요량을 갖고 계실텐데요. 개인적으로는 도덕감정론에 대한 논고를 읽고, 이후 자본론에 대한 부분을 차례대로 일독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비판한 ‘중상주의‘에 대한 의미와 왜 중상주의를 비판해야했는지에 대한 정밀한 답을 얻기 위해선 앞선 도덕감정론의 논증이 필요하며, 그가 결론에 이르러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의 처우에 보인 중상주의적 결정이 어떻게 영국과 신생 독립국에 해가 되었는지를 좀 더 면밀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미스와 가까웠던 데이비드 흄은 ˝계몽속에 내재된 오만함에 대해 통찰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아마도 데이비드 흄에 의해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되는 스미스는 흄과는 약간 달리, 도덕주의와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요. 바로 1부 ‘도덕 감정론‘에서 이러한 인식의 궤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로 스미스는 이 도덕감정론을 통해 사회질서를 이끌어내는 인간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일반적으로 계몽주의의 선연한 목적이 인간 본연의 조화로운 질서라는 측면에서 당시 많은 지성인들에 의해 관심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자연법이 발전하는 단계에서 변질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법이 특권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초기에 법의 필요성이 요구된 연유가 하위 계층에 의해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적 차원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홉스를 거쳐서 우리의 사회가 특별한 계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자연상태의 인간의 불확실성을 염두해 둔 것이겠죠. 어차피 그것이 타인을 위한 선의이든, 인간 본연의 도덕적 관념이든 간에 스미스처럼 자애심에 의지하지 않는 작게나마 서로가 이익을 추구하게 되는 과정에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필요성이 얼핏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사회 전체가 거대한 선의로 가득차 모두가 모두를 책임지는 지그문트 바우만 식의 유토피아를 우선하는 것은 중요하겠습니다만 아마도 스미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에서 적절한 단계의 사회 질서가 달성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1부에서 진술되는 ˝이기심과 자애심은 의무감에 의해 제어되어야 하며, 통상적으로 제어된다˝고 스미스는 그와 같이 믿었습니다. 즉, 인간이 구성한 사회와 세상 자체가 불규칙성을 가지며 개인의 행위를 평가하는 것은 인간이 정의로움과 지혜를 가능한 한 갖고 있어야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는 ˝실제로 부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유효한 방법은 덕과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재산에 이르는 길‘과 ‘덕에 이르는 길‘을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미스는 강조했는데요. 오늘날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저 재산에 이르는 길은 더할나위 없이 충분히 강조되고 있지만 후자에 관해서 전혀 입을 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가 도덕을 상실하게 된 연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1부의 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주장들은 서로 연계가 되어 있어 따로 개별적으로 놓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자와 재산을 쌓은 자를 개별적으로 인식해서는 그 참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저자에 의하면 ˝세상은 지혜와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어리석음과 악덕을 경멸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와 동시에 부유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놓은 사람을 존경하고 가난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경멸하거나, 적어도 무시한다˝고 언급하면서 이 양자의 인식 문제는 사회에서 지혜와 덕은 잘 안 보이는 반면에, 부와 지위는 아주 잘 보이는 법이라면서 어느 새 부턴가 현대 사회에서는 이 양자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사실 이 지점의 진술도 저자가 왜곡해서가 아니라 후에 자본주의가 그 약탈적 속성을 드러내면서부터 부유한 자는 즉 지혜로운 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부를 지키고 자식들에게 되물림하기 위해 사회적 자본과 자원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부자들의 격언이 소위 ‘지혜로움‘으로 포장되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요. 스미스는 이에 명백하게 반대되는 입장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와 정의를 논하면서 관용, 인간애, 친절, 동정심, 우정 등의 이러한 감정들에게 인간은 선호하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이러한 바탕의 자혜로운 사회가 물론 필요하겠지만 스미스의 판단으로는 그것보다 ‘정의로운 사회‘가 더 필요하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정의감에 의한 정의로 인한 불의에 관한 분노에 대해 저어하고 불편한 감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불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주저하는 본성이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스미스는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요. 바로 이 지점에서 완전한 사회적 질서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본질적인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기에 완벽한 사회는 없다는 것이 그의 해석인 것 같습니다.

2부 ‘국부론‘과 관련된 저자의 해석에 있어 가장 제 눈길을 끈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 = 이기심 + 페어플레이 정신 (도덕과 정의감)‘의 도식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보이지 않는 손이 건전한 이기심을 발휘하여 모두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연적으로 제어될 수 있다고 강제로 주입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스미스는 저 이기심에 분명 페어플레이 정신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을 말하되, 전부를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스미스가 비판한 중상주의 역시 이러한 맥락에 기반하고 있었는데요. 어떻게든 이익을 추구하고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는 이 중상주의가 당시 영국 권력층에 있는 인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를 사실상 착취하는 식으로 흘러갔다는 점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실제로도 그러한 역사가 존재했지요. 아마 이 지점에서 스미스는 중상주의가 모두의 이익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계급주의적 사회를 거의 용인하고 있긴 하지만, 애초에 중상주의는 하급 계층이나 노동 계층의 이익을 해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점에서 스미스가 주장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도 스미스의 주장이나 사상을 오독해 자신들의 주의를 위해 써먹은 하이에크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그와 같은 ‘오류 관행‘이 아직도 경제학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점은 그저 유감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방법론과 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학문을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수단과 목적으로 공익을 위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익과 권력의 이익을 위해 굴종하는 학자들이 제법 많은 것은 어쩌면 현대 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도덕을 강제로 거세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연유로 도덕에 이어 다음 법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시장사회에 대한 스미스의 인식도 우리가 익히 짐작하는 것과는 반대였습니다. ˝시장사회를 떠받치는 것은 자애심뿐만이 아니다. 시장 사회는 페어플레이를 받아들이는 정의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교환 성향 그리고 설득 성향에 의해서도 유지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설득 성향은 법의 정신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가 이를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시장의 논리와 언어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일방 통행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상식적인 선에서의 시대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지금부터 많은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더 수월하게 약탈적 경제‘에 몰입할 수 있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명정대한 거래가 기반하는 시장을 만들 수 있겠는가‘에 더 많은 학문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입니다. 저들이 입만으로 애덤 스미스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끝으로, 앞선 스미스의 진술에 대한 목표 의식을 담은 것이 2부 8강 ‘지금 이루어야 할 일‘ 입니다. 이 지점에서는 지혜로운 통치자에 대한 서술을 빼놓을 수 없겠는데요. 어떻게 보면 시장 본연에서 정치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정치에 능수능란한 통치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도주의나 자혜에서 우러나온 공익적인 사람이 사사로운 특권이나 특혜를 폭력적 방법으로 제어하지 않으리라는 부분은 자기 조국에 대해 폭력적인 수단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같은 진술의 요는 개인의 권리에 대해 정부가 어떠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소위 작은 정부론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보통 정치적인 측면이 아니라 시장의 분업을 강조하는 스미스의 입장에서 어떻게 페어플레이 정신을 시장에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그의 논저 전반에 제시되지 않는다고 봐야할 것 같은데요. 다수의 인간이 모여 만든 사회가 완벽하지 않고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면 시장 또한 당연히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고 봐야되지 않을까요. 또한, 앞선 스미스의 사상대로 저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의 구축이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다시금 주지시키고 있습니다만, 적절한 정부와 효과적인 정치 없이 어떻게 저러한 목적이 가능하게 될지는 회의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토크빌 조차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와 정치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여겼는데요. 과연 시장이 그 건전한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여전히 불명확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찬가치로 스미스가 중상주의와 관련해 당시 미국의 식민지에 대한 정책을 비판한 연유에는 이러한 일정부분 시장의 문제점을 확인한 것이라 판단됩니다.


-도메 다쿠오 교수의 이 책은 알려지지 않은 스미스 사상에 대한 보론으로서 적합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미 많은 사회학자들을 통해 애덤 스미스의 진면모가 드러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프랜시스 허치슨은 "사회의 질서는 인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도덕감‘이라는 하나의 감각에 의해 인도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감정과 행위에 공평한 관찰자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지를 상상하고,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공평한 관찰자가 인정할 만한 것이 되게끔 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또는 실제로 행위를 했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해로운 행위를 의도한 것만으로도 실제로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 경우와 같은 비난과 처벌이 주어지는 사회는 매우 가혹한 사회다

사치품과 생활필수품을 전체 부의 분배라는 시점에서 보면, 지주만이 사치품을 소비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사치품을 소비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애덤 스미스가 분업이 교환의 원인이 아니라 교환이 분업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가 생각하는 문명사회는 계급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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