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 개정판
로버트 달 지음, 박상훈, 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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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오와 주 인우드 출신의 저명한 정치학자인 로버트 앨런 달 (이하 로버트 달)은 예일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스털링 교수로서 대학과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긴 학자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의 대한 가능성,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으며,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현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인물입니다. 저역시 여러 서평을 통해 그의 학문적 논점과 주장들을 인용해 왔는데요.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자체가 정치적 본질을 얼마만큼 구현해 내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했습니다. 특히 자유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와 왜 사람들은 평등이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믿는가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죠. 그런 면에서 실로 정치학 본연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사심없이 연구를 했던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호불호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다수의 불평등한 조직들이 추구하는 권력이 어떻게 정치적 하모니가 되어 시민의 평등과 기본권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아직까지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점은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 책은 원제, ˝How Democratic Is The American Constitution?˝으로 2002년 초도 출간 되었으며, 국내에는 2004년에 처음 번역 되었고, 이후 2018년에 개정판이 새로 나왔는데요. 아마도 서지 정보에 따라서 이 개정판은 2003년 제2판으로 번역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저는 최근에 나온 2018년 개정판을 구해 읽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가지 더 첨언을 드리자면, 최장집 교수의 한국어 해설판이 약간의 보론으로서 삽입되어 있는 점이 특이사항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국의 건국 초기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 혹은 ‘국부들‘은 헌법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미국인들 가운데 가장 비범한 인물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조지 워싱턴이나 제임스 매디슨과 같은 인물들일텐데요. 이들은 공화주의적 기초 아래 미국인들을 위한 헌법을 마련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연유로 현재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헌법에 대해 갖는 의미와 약간의 숭배 그리고 구태의연한 왕정을 거의 혁명없이 극복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심은 꽤 놀라울 만한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로버트 달 교수는 ˝구체적으로 미국 헌정 체계가 오늘날의 민주주의 기준에 얼마나 잘 부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왜냐하면 그가 논증하는 바와 같이 이 최초 헌법에 상당수의 비민주주적인 조항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인에는 13개주 (엄밀히 말하면 11개주) 대표자들과 연방주의자들이 모여 각자의 이견을 좁히고자 여러 무리한 합의를 한 것이 그와 같은 맥락이라고 서술됩니다. 이를테면, 남부의 사활적인 노예제 유지를 인정하게 되는 식의 북부 주들의 양보와 같은 것입니다. 또한, 오로지 백인 남성들에 의해 주도된 이 헌법 초안은 1919년에야 인정 받은 여성들의 투표권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노예로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던 아프리카 출신의 이주민들에게도 해당이 되지 않는 그 한계가 명백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18세기의 영국 정치에서 옥스브릿지(옥스포드와 캠브리지) 출신의 남성들이 갖는 우월한 정치적 지위와 유사한 체계라고 볼 수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 지점에서 이러한 과거의 전통(혹은 한계)이 녹아든 헌법을 미국인들이 숭배하는 상황이 과연 이치적으로 맞는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단적으로 로버트 달은 명료하고 근본적인 이 글을 통해 두 가지 정도의 헌법에 대한 한계 내지는 비판점을 밝히고 있는데요. 그것은 승자 독식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소위 ˝불비례성‘과 개혁되지 않은 대통령 선거인단에 대한 문제, 이를테면 지난 수년간 연방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단 제도에 대한 개선을 하원에서 통과시키기는 했으나, 상원에서 필리버스터를 이용해 저지한 문제 등 국민 다수가 자신들의 투표 효능을 위해 바꿔야만 한다는 주장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연방 내에 인구가 많은 주가 인구가 적은 주의 권리와 이해를 부정하거나 침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로 주마다 각 2명의 상원의원을 두는 제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달은 이와 관련하여 ˝과연 지금의 민주주의 하에서 상원에 대한 개혁이 인구가 적은 주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이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우리의 민주주의가 초래할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이들 선거인단의 선출로 취임하게 되는 이 연방 대통령제에 대해 과거 전통의 유지 요구를 떠나서 인구수가 적은 주들이 갖고 있는 이 연방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을 결코 놓고 싶지 않은 이유라고 달은 해석합니다. 더군다나 선거인단 제도와 관련된 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상원 의원의 3분의 2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 권력과 다수 국민의 이해가 전혀 일치 않은 현재의 미국 상황은 이것이 민주주의의 요구와 얼마나 부합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이러한 양쪽의 불편한 상황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줄곧 우려섞인 시선으로 본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억압‘과 같은 정치적 선입견을 대변한다고 여겨지는데요. 초기 연방주의자들에 의한 ‘재산의 보유 여부로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논의‘나 줄곧 백인 남성에 의한 의견 수렴과 같은 다소 민주주의에 반하는 논리들이 근래에 있어서 계급주의적 측면에서 기득권 층을 함부로 억압하게 될지도 모르는 다수의 민주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으로도 읽힌다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현재까지 미국의 사법제도가 선출직이 아닌 일종의 고용직으로 유지되는 것은 소수대 다수라는 권력 관계에서 그러한 균형점을 유지시키기 위한 제도 혹은 수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앞선 논의는 언급했던 대로 3장과 4장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는데요. 대통령의 선출 문제를 쓰고 있는 4장에서 저자는 ˝선거인단 제도를 변경하는 헌법 개정안을 폐기의 무덤 골짜기로 몰고 가는 것은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불평등한 대표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상원이다˝라고 핵심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정부의 수장에 선출 문제에 대한 큰 골자를 기반으로 5장에서는 이 초기의 미국 헌법이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얼마나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고찰해보고 있는데요. 특히, 이와 관련해 근 50년간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은 22개국의 정치적 사례와 제도를 미국과 비교해 보고 그 차이점과 개선할 부분에 대해 논하고 마찬가지로 논하고 있습니다. 모두 이즈음에서 짐작하시겠지만 그것은 비례대표제와 다수 대표제에 대한 사항입니다. 미국은 후자인 다수 대표제에 특유의 승자독식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국가인데요. 원칙적으로는 비례대표제가 다수 대표제에 비해 공정하다는 인식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정당 정치가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견고한 양당제보다는 민의를 잘 반영할 수 있는 것이 다당제 시스템일텐데 그것을 잘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비례대표제입니다. 이 비례대표제에 대해 다수 정치인들의 거부감을 차치하더라도 미국 국민들의 통념도 꽤 견고한데요. 분열적이고 논쟁적이며 불안정한 무능한 정부라는 비례 대표제 하의 국가들에 대한 이해는 꽤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달 교수는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사례를 들며 오랜 시기동안 정착한 이 비례 대표제의 정치적 안정성을 오히려 반증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국가 별로 최선의 정치가 있기 마련이고, 그동안의 정치사에 있어서 많은 논의가 엘리트들 사이에서 있어왔을 겁니다. 다만,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저자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관점은 각 정치 시스템 하에서 얼마나 시민의 기본권과 권리 그리고 정치인들의 책임감을 이끌어낼 수 있겠는가에 있습니다. ‘공정하고 유능한 민주 정부‘라는 가치 아래 양 제도가 얼마만큼의 실적을 올릴수 있는가라는 주제는 누구에게나 관심을 끌 만한 요소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 곳에는 라이파트의 36개국 연구가 눈길을 끕니다. 그는 다수제 민주주의 보다 합의제 민주주의가 좀 더 뛰어난 실적을 얻었다고 평가하고 ‘공공 정책의 관대함‘도 마찬가지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미국은 바로 혼성 체계의 대표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달은 미국의 헌정 체계와 앞선 비교점과 관련해서 약간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점은 현재 미국 정치가 그가 중대하게 여기는 ‘기본권의 보호 공정한 대표, 더 많은 합의와 같은 민주적 목표‘를 원만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글 중간에서도 제가 강조를 한 부분이었지만 이 글의 저자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 하에서 평등의 실현을 중요한 가치 문제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행정권의 수립부터 그에 기반한 헌법 및 여러 정치 제도의 편람은 바로 이 평등의 문제를 민주주의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끌고 나갈 수 있느냐에 있었는데요. 토크빌 역시 민주주의에서의 평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 모두를 달성하기가 어렵다는 측면의 여러 학설들과 이론들이 존재하는데요. 흔히 자유 민주주의라고 일컬으며 사익화된 보수주의자들과 시장 자유주의자들은 꽤 계층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자유를 달성하는데 온갖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시장 자유가 정치적 자유를 얼마만큼 보장할 수 있느냐에 대해 연구라든지 개연성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약간의 형용 모순처럼 이미 시장 자유 논법은 정치를 배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보이지 않는 손은 믿지 않는 사람인데요. 경제적 편의를 위해 정치적 수사를 남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느냐에 답변을 요구해야겠죠.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우리의 평등은 꽤 이념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인식들을 여기서 다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평등은 민주주의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죠. 바로 토크빌은 유럽과 다른 미국의 조건들의 평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 여기가 새로운 세계라고 느꼈을 겁니다. 따라서 이 지점에 달 교수는 정치적 평등을 어떻게 하면 확대 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권층 엘리트들이 자신들이 가진 권리를 아주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그것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 반대에 있는 계층에게 이들의 저런 권리가 어디까지 정당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겁니다. 아니 의구심을 무조건 가져야만 하죠. 결국 앵무새들처럼 이 정치적 평등이 다수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논법으로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매우 공격적인 작업이 이뤄져 왔습니다. 시민 개개인들의 인식의 기반 차원에서 혹은 주입된 사회 체계적 가치관으로서 뭔가 비판과 견제가 없었다는 것이죠.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따른다고요. 그러면 자유는 왜 의무가 따르지 않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기득권과 엘리트들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야만 한다는 그런 논법일까요?

자본주의적 해석을 두서 없이 늘어놓기 전에 저는 순수한 민주주의가 계급 정치나 불평등한 권력으로 인한 계급 고착화 등을 자인하는 정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버트 달의 인식 또한 저와 그 궤가 유사한 것이고요. 달리 말하면 이처럼 민주주의의 강화는 바로 다수 시민들의 권리 확보와 인식의 공감대 및 충분한 이해를 동반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 연유로 ˝정치적 평등의 선결 조건은 민주적 제도의 확립˝일텐데요. 여기서 문제는 미국의 경우 왜곡된 금권 정치하에 민주주의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데에 있을겁니다. 우리도 이것에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포퓰리스트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직접적으로 표를 얻기 위해 알량한 믿음 조차 없는 민주주의를 수단화시킨다는 것과 포퓰리스트들과는 달리 꽤 정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겠죠. 프로파간다의 본질적인 폐해는 저런 진지함을 가장하고 무엇보다 선을 굳게 믿고 있는 식의 거짓된 외면에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이나 사익에 매몰된 정치인들 모두 매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헌법을 비롯한 사법 제도가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저 역시 회의적입니다. 정치적 갈등과 모든 문제들을 법의 판단에 기대는 것을 반대하는 편이고, 균형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에 대한 공청회라든지 의회 정치인들이 얼마나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성역없는 공개와 정치 제도하에서 로버트 달이 강조한 것처럼 실효적인 시민들의 정치 담임권 등을 사회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해 보입니다. 이미 정치적 자원의 불균형은 소위 사회경제적 엘리트들이 더 우월한 편이므로 시민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정치적 평등의 강화에 있어서 이것을 이념적으로 몰아세우거나 자유라는 명목하에 강제적으로 입을 막게 하는 언론을 비롯한 일련의 여론 작업들에 대해 분별력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로 봐야겠죠. 그래서 로버트 달이 생애 말년에 이 부분에 대해 집중한 것은 이토록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가 사회의 정치, 경제, 법조 엘리트들에게 달려있다는 부분은 정말 오래도록 제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정치적 평등은 과연 자유를 위협하는가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공공연하게 침해하는 요소들을 유지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대표의 불평등이 모든 시민의 정치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인민의 직접 투표로 선출된다면, 작은 주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이 무시도거나 악용될까?

나로서는 그 답이 그 나라의 역사, 정치 문화, 민주주의 존속을 위협하는 내부적 전략적 요인들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런 생각이 타당하다면, 결국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자유의 보장은 그 나라의 헌정 체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일반 시민과 그들에 부응하는 정치계,법조계,문화계 엘리트가 공유하는 신념과 문화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붕괴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극히 드물며,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심각한 위기나 혼란에 처했을 때에나 나타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 해결책은 이런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법률이나 정책을 채택하기 전에 가능한 한 폭넓은 합의를 이루도록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다수결에 따라, 물론 그럴 때에도 늘 민주적인 기본권을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결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정치체제이다 (이 문장 하나 만으로도 로버트 달이 얼마나 위대한 정치학자인지 가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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