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 파시즘과 인문주의에 관하여
롭 리멘 지음, 조은혜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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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유명한 공공지식인이자 참여지식인인 롭 리멘 (혹은 리먼, 리에멘)은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에 있는 사회과학 명문 틸뷔르흐 대학을 거쳐 현시대의 ‘인문주의의 위기‘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인물인데요. 그는 네덜란드 내에서도 손꼽히는 토마스 만 연구자이며, 소위 ‘유럽 정신의 회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많은 강연을 펼치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미국을 비롯한 여러 대륙에서 그의 강의를 요청하고 있기도 한데요. 확실히 그는 강단 지식인이 아니라 사회 참여적인 지식인이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인문주의 잡지 ‘넥서스‘를 창간했고, 뒤이어 동명의 ‘넥서스 연구소‘를 창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평생을 거쳐 집중한 주제는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에 집약되어 있다고 봐야할 텐데요. 이 책의 2부에서도 그러한 그의 노력이 잘 정리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두 편의 인문학적 에세이를 합쳐 출간한 이 글은, 원제 ˝To Fight This Age : On Fascism and Humanism˝으로 2018년에 나왔으며, 국내에는 2020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간략하게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그것은 ‘극우 포퓰리즘이 도래한 현재의 유럽이 직면한 시대˝를 인간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인데요. 앞선 극우 포퓰리즘은 파시즘과 매우 가깝다는 측면에서 이 글의 맥락은 전후 유럽인들이 과거 파시즘에서 과연 어떠한 교훈을 얻었는가?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1장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정치적 수사와 인문학적인 방법론 그리고 파시즘에 대한 고찰은 여타 어느 글보다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나 생생해서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책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쩌면 많은 분들이 현재의 유럽이 그 정도로 심각한 위기의 시점이냐 반문하실 수 있겠는데요. 1장에서 논증되는 가운데 특히, 저자는 1940년대 초반의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현재의 ‘반이슬람주의‘를 같이 비교하며, ‘증오의 정치‘,‘대적의 정치‘가 히틀러의 그것과 지금의 극우 포퓰리즘과 매우 유사하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사실 많은 지식인들에 의해 이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이 어떠한 유사적 관계가 있을 것인가에 대해 수많은 토론과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세기 후반의 공산주의권의 몰락으로 극우 이념이 대척점을 잃어버렸다는 식의 허무맹랑한 관점부터 자유와 민주주의를 입아프게 강조하는 선동 정치인들이 사실상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단으로만 삼는 정치적 행위에 대해 꼬집는 주장들도 있었는데요. 저자인 리멘 역시, 토마스 만의 연설을 인용하며 이렇게 답합니다. ˝제게 여러분에게 완전한 진리를 말해드리죠. 만일 파시즘이 미국으로 온다면 그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전에 서평을 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재인식을 리멘의 이 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가세트에 대해 꽤나 엘리트주의적이고 반대중적인 지식인이라는 틀을 갖고 있었는데요. 아도르노를 이 가세트에게 갖다 붙일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유의미하게 받아들일만한 점은 가세트가 민주주주의 쇠락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는 단어 ‘대중 민주주의‘가 거의 같은 맥락으로 ‘군중 민주주의‘와 그 함의가 공통적인 것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에서 토마스 만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교육‘이라는 점이 유독 제 시선을 끄는 것은 앞선 연유 때문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인 리멘 역시 현재의 고도로 교육받은 많은 시민들이 이 포퓰리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 아마도 토크빌이 강조한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부족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강조되는 ‘특별한 변별력‘이 우리 시민들에게 부족한 것은 확실합니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무지 ignorance 야 말로 대중민주주의에서 파시즘이 이렇게 쉽게 회귀하는 주된 이유다˝라고 말하는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 거짓말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정도로 발달했고 단어의 의미는 늘 왜곡되기 때문이다˝는 주장은 정말 제 뇌리에 박힐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좀 더 첨언한다면, 이 대중들을 선동하는 정치인들, 언론인들 및 지식인들은 ˝모든 진실을 밝히지 않고 그 중에 한 두가지만 전하는 것으로 그 목적을 다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리멘은 현재의 엘리트 계층이 사회적 책임감을 상실하고 오로지 돈을 많이 버는 것에만 집중해, 과거 유럽의 계몽주의적 전통이 상실되는 상황을 스스로 획책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도 한데요. 엘리트들에 대한 수사가 과격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상위 계층에 대한 인식은 거의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현재의 사회경제적 토대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인가에 집중하는 분위기를 반영한다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전반적인 ‘경제적 효용감‘에 대해 뒤에 2장에서 다루고 있기도 한데요. ˝오로지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것은 바로 경제적 효용감˝이라는 진술은 현 시대가 어떠한 상황인지 명백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유 시장이 사회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칼 폴라니의 해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엘리트들의 스스로의 궤멸적 변용‘과 더불어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인식은 1943년의 독일 엘리트들의 정신 구조와 매우 유사합니다. 더군다나 2장에서 줄곧 비판되고 있는 정치 엘리트들의 그 만연한 아둔함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를 망국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심장한데요. 우리는 그동안 소위 대중민주주의를 통한 선동 정치인들의 사적 이익에 따라 아무런 대안도 없이 사회가 깃발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것을 2010년 이후 유럽에서도 목격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리멘은 자신의 모국인 네덜란드의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일침하는데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사회적 모순과 경제적 불평등의 분노를 엉뚱한 대상들에게 표출하게 만드는 극우 포퓰리즘이 과연 민주주의를 어떻게 절망에 빠트리게 될지에 대해 무슨 묵시록과 같은 허무맹랑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아예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으로 경고하고 있는 많은 사회학자들의 외침을 우리 또한 경청해야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한나 아렌트 역시 가까운 미국 사회에 벌어질 일들이라는 정치적 분석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 포퓰리즘에 매우 취약해 훗날 제 2차 파시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진행되는 저의 진술과는 약간 논외지만,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사생아‘라는 거친 표현에 대해 지극히 반대합니다. 이에 2장에서 저자는 현재의 유럽은 ‘영혼 돌봄‘이라는 계몽주의를 즉시 회복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민주주의는 자유와 참정권, 표현의 자유, 법치, 인권˝으로 측정되기 때문에 극렬한 민족주의와 함께 포퓰리즘과 파시즘은 명백하게 민주주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을 민주주의의 사생아라고 말하는 것과 민주주의가 스스로 자살을 꿈꾸기 때문에 대적자로 탄생한 것이라는 이 비웃음들은 시민들이 더욱 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체념하게 만드는 꽤 면밀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많지만, 껍데기만 그런 자들이 대다수인 시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지금도 저는 로버트 달에게 의문을 갖는 부분이라면 과연 그가 다원주의를 신봉하면서도 저런 자들까지 포용해야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요청일 것인가에 대한 한가닥의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고백하겠습니다. 물론 슈미트 식의 정치적 이분법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시민들이 이상적인 분별력을 발휘해 스스로의 힘으로 저런 반정치를 몰아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얼마간의 불안감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시민들의 역할과 가능성을 제가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 스스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적 바람막이가 전무하다는 현실은 그저 회의적인 분위기를 양산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시민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 이제는 정말 역할을 다해야 될 시점임은 매우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저자는 이 선동 정치인들에 대한 귀중한 인식을 제공하는데요. 이들 선동가들이 실상 다수의 시민들의 삶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약자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에도 하등 관심이 없다는 진술인데요. 여기에는 자신들의 권력에만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엘리트들의 배신 또한 한 몫을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우리가 비즈니스 엘리트들에게 버림 받았다˝고 강조하는 것은 경제적 효용성을 제일 가치로 삼은 저들의 폐쇄성과 그외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는 저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진지하게 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이들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 일찍부터 깊은 회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다른 식으로 해석되고 왜곡된 이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차라리 가진자들과 권력을 항유한 자들의 이익을 위해 경제 제도와 사회를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으면 받아들일 수는 없을 지언정 차라리 솔직하다고 말했을 겁니다. 이러한 과정은 다들 아시다시피 대처와 레이건이 주도해 만든 것이며, 그러한 이행 가운데 현 시대의 불행한 일면들을 이용한 포퓰리즘의 도래는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중하게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 및 기득권층에 사회적 책임의 결여로 언급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라이트 밀즈가 중요하게 주장했던 엘리트들의 책임 의식을 지지하는 편이며, 엘리트들과 일반 시민이 격리되고 구분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무조건적이고 안일한 시민들의 엘리트들에 대한 배척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또한, 지금도 이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리멘의 이 글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끔 파시즘이 기억 저편에 망각될 무렵에 이 책을 수시로 꺼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일개 개인의 삶으로서 이 사회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의 만연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각성할 수 있는 시기가 각자에게 왔으면 생각을 간절히 해봅니다. 제가 이런 사회학적인 책에 굳이 서평을 쓰는 이유가 바로 이런 연유이기도 한데요. 스스로 재교육을 한 시민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민주주의와 정치의 건전성이 강화되리라 또한 의심치 않습니다.

무솔리니는 모든 대학교수에게 충성 선언서에 서명하기를 강요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직업을 잃게 되었다. 1100여명의 교수 중에 서명을 거부한 교수는 단 10명이었다

파시스트들은 이렇게 권력을 잡았다. 자유를 향한 두려움과 최악의 소인배스러움에 뿌리를 둔, 증오와 원한이 가득한 정치학을 들고 나온 사상 없는 대중 선동가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파시즘은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적 정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중-인간은 지적이거나 정신적인 가치와 관련해 책임감을 느끼기는 커녕, 그것과 직면하기조차 원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는 어리석음과 공포 그리고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능력이며, 이성의 힘을 사용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그것은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 외에는 안중에 없는 선동가들이 이용하는 형태의 정치학으로, 결국 그들은 원한을 악용하고, 희생양을 지목하고, 증오를 조장하고, 지적 무능을 시끌벅적한 슬로건과 모욕 아래 감추며, 포퓰리즘을 활용하여 예술의 경지에 달한 정치적 기회주의를 실행한다

우리 사회은 왜 이렇게 기술, 속도, 명성, 겉치장 그리고 외모에 많은 가치를 두는가? 그 대답을 소크라테스가 2500년 전에 친구들과 나눈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쾌락에만 초점을 맞추고 최고선을 경시하는" 삶의 방식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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