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맞선 이성 - 지식인은 왜 이성이라는 무기로 싸우지 않는가
노엄 촘스키 & 장 브릭몽 지음, 강주헌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노엄 촘스키는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큰 명성을 얻은 학자로 사회비평가이자 정치운동가 및 철학자로 92세의 고령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학계의 거두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권위주의적이라거나 상아탑안에서 자신만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인물은 아닙니다.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에 내각에 암약했던 네오콘들은 그가 빨리 죽었으면 한다고 빌었다는 일화도 너무나 유명합니다. 더욱이 촘스키는 CIA에 감시를 받기까지 했었는데요. 당시 기성 권력이 얼마나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는지 짐작할 만한 부분입니다. 예전에 제가 지나가는 투로 한번 이뤄질 수 없는 소망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타계하기 전에 이 두 노대가가 현시대의 여러 문제들을 놓고 토론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간혹 상상해 보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촘스키의 이 절판된 책을 뒤적거리다가 여지없이 앞선 아쉬움이 깊게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원제, ˝Raison Contre Pouvoir˝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원서와 관련해 참고할 부분은 아마도 벨기에에서 불어판으로 출판된 원전을 국내에서 번역한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역자인 강주헌씨가 불어를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영문판으로 나온 것을 번역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같은데요. 구글에서도 정확한 서지 정보가 잡히지 않아 추가적인 내용을 적어 봤습니다.

이 글을 간단히 소개한자면, 노엄 촘스키와 벨기에 루벵 대학의 물리학 교수 장 브릭몽의 대담집을 엮어 편찬한 것입니다. 이 대담의 형식상의 구성은 장 브릭몽이 촘스키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주제에 대해 약간의 반문을 보이면 이에 보충 설명과 비슷한 촘스키의 해석이 나오는 식입니다. 일단 도입에서 대담을 진행한 브릭몽 교수가 이 책의 제목 ˝권력에 맞선 이성˝을 소개하면서 이것은 거의 촘스키의 저작과 일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언급합니다. 만약 쥘리앙 방다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그가 주장한 지식인의 겸허한 의무를 촘스키의 일생이 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지금도 우리가 존경하는 테오도르 아도르노 조차도 기존의 기득권 정치를 옹호하면서 촘스키와는 다른 결을 산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업화 시대 이후 어떤 사람의 가진 부가 명백한 권력이 되고 이러한 사회적 연계 방향의 최소한의 비판적 분석을 지식인들이 하지 않음으로써 식자 층의 의미 변질은 이 시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때론 부에 때론 권력에 영합함으로써, 건전한 사회와 대안이 될 수 있는 책무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 부합하는 촘스키의 논증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의 2장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이 어떤 한 편으로는 불확실성을 띠고 있는데, 인류의 역사에서 이를 입증할 만한 단서는 아주 많습니다. 특히 유럽의 왕정 시기에 쓸데없이 피를 흘려야 했던 수많은 전쟁들 그속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떨 때는 인명을 파리만도 못하게 여기는 풍조가 팽배해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이 피와 살육을 즐기는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석해 버리면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인식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 시대를 인간이 욕망하는 것을 충분히 충족시켜주고 이기적인 본성에 부합되는 실로 적절한 사회 체제를 갖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을 우리는 그들이 터무니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느 누군가에겐 이 시대가 지옥이고 반대로 어느 누군가에는 더할 나위없는 천국일 수가 있는데, 촘스키는 아무리 인간이 경험적인 동물이라 할지라도 생득의 조건에서 누구나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오늘날의 이 신자유주의가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연민과 동정, 보살핌과 같은 본연의 인간성을 사실상 거부하는 데 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사실 제가 봤을 때는 보수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이나 거의 한 몸이라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자신이 보수주의자지만 신자유주의를 경멸하거나, 신자유주의자가 보수주의를 철지난 헤게모니로 보는 경우는 거의 목격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전통성과 가치, 공화주의적인 담론을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될 이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시장 자유와 극한의 개인의 이기심을 추종하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어찌됐든 개인의 신념체계에 있어 리처드 번스타인의 가류주의, 즉 내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증명이 되었을 때 이를 철회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누구나 말하는 성인의 단계가 저런 단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논외로 촘스키가 정명한 수학의 법칙이나 논리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라는 말에 이런식으로 인간의 발달 정도가 차별화 되는 것인지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이기주의를 낱낱이 논하고 싶은 심정이야 굴뚝 같습니다만, 저는 촘스키의 문장을 여기에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기주의가 인간 본성의 중심이라고 근거 없는 이론들이 그들에게는 편할 것이다. 그래야 다른 동네의 병약한 과부를 먹이고 돌봐야 하는지, 또 건넛집 아이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보장해야 하는지 등을 따지는 일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몇개의 문장들입니다. 원래는 유럽의 계몽주의가 제국주의 시기의 식민지 건설들로 부침을 겪에 되기도 하지만 역사의 공교로운 흐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차례의 대전을 거쳐 비로소 진정한 계몽주의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이 계몽을 바탕으로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좀더 발전된 민주주의와 (본래는 공화주의적 담론이었지만) 생활 양식의 발전을 가져다 준 경제적 번영이 서로 절묘하게 인간 사회를 더 진보의 영역으로 이끈 것은 분명합니다. 데이비드 흄의 영향을 받았던 애덤 스미스는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을 거의 도외시하는 모습이 인간 본성의 완성˝이라고 밝히며, 조화로운 삶을 위한 주춧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자유 시장 주의의 화신으로 읽히고 있는 교조 애덤 스미스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요. 촘스키가 논하는 이 애덤 스미스의 사례는 이 책에서 여러번 등장합니다만 본래 진정 전통적인 경제학은 바로 인간의 진보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경제학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인간의 진보는 지갑이 두둑해지는 진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 지금에서야 촘스키가 인정하는 데로 이 신자유주의가 너무나 민주주의를 공격해대서 만신창이가 된 상황입니다. 물론 그는 이를 너무 비관적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만 저는 쉽게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찍이 대니 로드릭을 통해 경제적 번영 뿐만 아니라 좀 더 나은 정치,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의 회복 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의 욕구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이를 얼마나 숨기는 데 급급해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미국 시민들에게 크나큰 기대감을 갖게 했던 버락 오바마가 당선 이후 월스트리트를 개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월가의 경제인들의 눈치만 봤다는 사실은 꽤 유명한 일화입니다. 공적 자금으로 은퇴 자금 놀이를 했던 경제 인사들의 후일담은 꽤 유명하기도 한데요. 과연 저들이 법적인 처벌을 받았는지 의문입니다. 과거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사실상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는 상황을 혐오하면서도 사회의 권력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특정 계층에 대한 합리적인 대처 방법에 대해 전해지는 바가 없습니다. 그가 모른 척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오래전 시대의 협소한 인식 상황을 한계로 여기며 실제로 인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이해하는 식의 변명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화주의와 이를 통한 ‘손에 안잡히는 돈들‘의 이익 체계는 무엇보다 평범한 시민들이 건드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은 당연히 축적되기 마련이니 이를 그냥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모두가 뛰어나가 깃발이라도 들어야 될지 인식과 행동의 차이는 오늘날 재빠른 네트워크 시대에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에 촘스키는 바우만과는 약간 다른 관점을 피력하고 있는데요. 그는 그래도 희망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희망을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많은 이들이 좌절하지 않고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바우만도 많은 시민들의 각성과 행동에 대한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지만 말년이 되었을 때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파행을 돌이킬 수 없다고 여긴듯 합니다. 뭐 이 점은 아까도 언급했지만 누구에게는 이러한 체제가 천국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촘스키는 그러면서도 인간이 정의와 자유의지, 평화를 갈구하는 것은 그것에 어떤 대단한 이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수한 인간이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고 단어하는데요. 물론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따라서 글 말미에 드는 생각은 이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보수 정치가 과연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을지에 대한 매우 궁금한 호기심이 드는데요.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결여된 상태의 인간을 인간 본성의 불확실한 측면으로 봐야할지, 아니면 이기심을 마음에 푸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되는지 어떤 사회학자가 이 지독한 연구를 해줬으면 좋겠군요. 끝으로 촘스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논하면서, ˝비열한 프로파간다라고 할지라도 진실 하나쯤은 섞는다˝는 주장이 유독 마음에 남았습니다. 대범한 신자유주의자들이 모든 시민들을 자신들과 비슷한 부류로 타락시킨 그 자유 시장 논리와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는 지독한 편견은 뭔가 촘스키가 말하는 프로파간다와 묘하게 닮아 있다고 느껴집니다.

-아마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4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그들에게 자기 이익뿐만 아니라 영국민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 특히 ‘유럽인들의 야만적이고 불공정한 결정‘에 피해를 입은 다른 곳의 사람들이 받을 고통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스미스는 "타인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을 거의 도외시하는 모습이 인간 본성의 완성"이며, 조화로운 삶을 위한 주춧돌이라 생각했다

이기주의를 찬양하면서도, 타인을 향한 연민과 타인의 행복에 대한 염려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가정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이 틀렸다는 증거는 역사와 경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국민건강보험 요구처럼 덜 급진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핵무기로 진압할 수 있을까?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면 억압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주된 목표로 공격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의도대로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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