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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평점 :
미국 뉴욕의 소재한 뉴 스쿨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낸시 프레이저는 정치철학자이자 비평가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학자입니다. 특히 그녀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더욱 소홀히 될 수밖에 없는 사회 정의에 대한 완고한 지지자로 자신의 정치철학이 성숙해짐에 따라 마찬가지로 여러 저술 활동을 통해 이를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낸시 프레이저를 특별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녀가 페미니스트 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의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를 주지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아마 프레이저를 전형적으로 뜻하는 것이 아닌가 자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언뜻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의 제목은 지금의 시대상을 설명하는 데 꽤 적절한 표현이라 여겨집니다. 이 책은 지난 2019년, ˝The Old Is Dying And The New Cannot Be Born˝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죽는날까지 전세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에 회의적 전망을 철회하지 않았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문장이 절로 생각날 정도로 글의 초반이 시작됩니다. 저자인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기저에 정치의 문제라기 보다는 특히 경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첨예한 냉전의 시기를 거치고 난 후, 흔히 민주주의와 자유 진영의 승리라는 폭죽을 터뜨린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 있었기 때문에 금융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전방위적인 헤게모니 획득이 여러 사회 문제 내지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대적의 이데올로기, 대응의 신념 등과 같은 서로 직접적인 균형에 따른 시스템의 긴장을 야기하면서도 그 속에 사회적 안정을 보장한다는 특별한 논리에 마찬가지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획기적인 경제 정책의 입안과 좀 더 노동력을 탈피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포함한 첨단 금융화는 ‘더욱 가깝고 밀접한 세계화‘를 주장한 신자유주의의 도래에 급물살을 타게 되었는데요. 이 신자유주의가 일부 자유 진영과 선진국에게 크나큰 이득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개도국들도 이런 혜택을 받기도 했었죠. 사실 굳이 사회학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어떤 현상의 이면에는 또 심각한 문제들이 감춰져 있기 마련입니다. 북반구가 남반구를 경제적으로 착취한다든지,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아프리카의 심각한 빈곤 문제, 굴뚝 산업을 비용 합리화는 미명하에 개도국에 이전시키는 행위 등을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외형적인 경제 규모의 획기적인 증대를 추동한 신자유주의는 승자독식이라는 미명하에 초효율과 초집중으로 수식되는 고도의 경제적 불평등을 야기시켰습니다.
이에 낸시 프레이저는 이런 신자유주의의 파급 효과에 따른 사회진보적 측면을 논하면서 이른바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분화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런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형용 모순이라는 말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는 아마도 1980년 ‘정치적 진보세력의 사실상의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인정‘과 투항을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이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그룹은 과거 빌 클린턴으로 대표되는 성공적인 민주당 세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이런 측면의 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뭔가 ‘강남 좌파‘가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프레이저 식으로 ‘알맹이 없는 훈계 운운‘하는 것으로도 느껴지는데요. 저로서는 저 진보적 신자유주의에 대해 쉽사리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80년대 이후 서구 사회가 신자유주의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봐도 무방한 판국에 경제 전반의 발전과 이를 통한 사회 진보 및 시민의 의식 변화와 같은 신자유주의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결과물만을 가지고 진보세력의 신자유주의적인 수용으로 이해하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것은 마치 막대한 부를 부유층들이 간혹 기부활동과 자선 사업을 하는 것을 보고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분배에 직접적으로 기여를 하고 있다고 홍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힙니다. 어쩌면 프레이저는 무페와는 다른 식으로 진보 좌파의 몰락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으나, 다소 엉뚱하게 건전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진보적 신자유주의와 미 공화당 출처의 반동적 신자유주의를 구분하여 후에 후술될 트럼프 주도의 ‘우파 포퓰리즘‘이 등장하는 일종의 정치 변화를 중점으로 논증하기에 이릅니다.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듯이 도널드 트럼프는 평생에 걸쳐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산 인물입니다. 그는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를 여러 차례에 걸쳐 비판했지만, 집권기에 월스트리트에 어떠한 개혁안도 제시하지 않은 인물이고 또한 이미 희망을 잃고 좌절한 백인 노동계층의 분노를 부추겨 자신의 정치적 이익으로 삼는 그야말로 반지성주의와 반체제에 화신이기도 하죠. 그런 가운데 프레이저가 정확히 짚고 있는 이 파편화의 원인, 즉 ˝전지구적이고 금융화된 현행의 자본주의˝라는 점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관점에서 트럼프의 정치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 건 사실이죠. 그래서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무능˝은 차치하더라도 이를 진보적 포퓰리즘과 같은 새로운 정치 현상으로 사실상 개선시키고자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쉽게 동의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그냥 정치의 많은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경제 전반의 문제를 민주적 통제로 회복시키면 될 일입니다. 그러한 어젠다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그런 취지의 공감대를 설득시키고 정부가 두번 다시는 사회를 배신하지 않도록 민주 정치의 균형과 견제의 가치를 다시 확립하면 될 일이지요. 물론 트럼프의 탄생은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의 사실상 실패라고 볼 수 있으며, 인종 혐오와 성차별 옹호 및 소수자 인권을 쓰레기통에 처박은 우파 포퓰리즘과 같은 괴물과 더불어 대안 우파와 같은 비정상적인 정치 세력을 낳은 것은 전체적인 그림에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거대한 자본의 권력이 정치를 전혀 개선시키지 못한 것이죠.
다만, 프레이저가 이 글을 통해 트럼프의 출몰과 그에 따른 미국 정치의 파행을 지식인의 양심으로 분석해 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자포자기한 백인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된 것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결과물이며, 시민이 제대로 된 비판과 그에 따른 숙고를 하지 못하게 된 연유에도 바로 신자유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같은 결과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프리드먼주의자들과 이에 동조한 금권 정치, 일반 노동자들의 경제적 건전성이 시민 사회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노동 조합 자체를 악마화 시켜 이에 동조한 우리들의 책임도 분명 있는 것이겠죠. 바우만은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누누히 강조한 것이고, 더 많이 확대되고 강화된 민주주의 만이 이를 타개할 유일한 해결책일 겁니다. 이것은 샹탈 무페 또한 동의한 부분입니다. 민주주의가 그동안 1세기에 걸쳐 너무 과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부터 비판의 재갈을 물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자유주의의 승리가 민주주의의 승리와는 아무런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프레이저의 실로 놀라울 만한 양심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진보적 신자유주의를 인용하기에 앞서 민주주의에 헌신하지 않은 수많은 정치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이를 먼저 비판하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뼈아픈 시민들의 반성과 다시 정부에게 정당한 정치를 되돌리기 위해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이 거대한 금융 자본주의의 독선을 막는 실효적인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론으로 수록된 대담집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밝혀두고 싶습니다.
-1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같은 거대한 출판사가 오타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서문에 역자가 쓴 좌파와 우파의 선동가라는 문장에 대해 약간 이견을 내고 싶은데요. 전후 맥락은 아마도 저자인 프레이저가 진단하고 비판한 현 상황의 정치경제적 모순과 파행의 현실 진단 정도로 쓰신 것 같은데, 엄밀히 따지면 좌파 선동과 우파 선동은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좌파 포퓰리즘을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극심한 인종 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격리, 다른 종교에 대한 배격 및 시민의 분노를 조장하는 우파 및 극우 포퓰리즘을 차베스의 그것과 동일 선상으로 보는 관점은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과거 티파티 운동의 초기에는 미국 내의 진보세력을 격멸의 대상으로 삼은 점은 좌파 세력에게 혁명 운운의 철지난 스탠스를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부분입니다. 제 요점은 저 우파 포퓰리즘은 이미 전체주의와 다름 없다고 보는 시각에 동의합니다. 따라서 사회학의 카테고리 내에서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용어 조차도 동의하기 힘들지만)의 인식적 대응은 한쌍으로 동등하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현 지배체제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맞대응하려는 좌파적 정치 운동을 죄다 좌파 포퓰리즘으로 이념 덧씌우기를 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애초에 포퓰리즘 연구가 잘못되었다는 반증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헤게모니란 지배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람시의 개념이다
샌더스와 트럼프 모두 신자유주의적 분배 정치를 맹비난했다. 그러나 둘의 인정 정치는 선명하게 달랐다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훈계 두기가 이 문제(인종주의)를 다루는 데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모든 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크게 흔들리고 있는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들을(노동계급)을 그 어느 때보다 증폭된 병적 증상(분노에서 비롯되어 희생양 만들기로 표출되는 혐오와, 연대 의식이 사라진 골육상쟁의 세계에서 폭력 분출에 뒤따르는 엄청난 억압)속에 침수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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