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크 피셔는 영국 출신의 진보적인 사회철학자이자, 비평가, 문화이론가 및 저명한 언론인이기도 한데요. 더욱이 사적인 측면에서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 영국의 여러 현안에 대해 글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스마트한 글쓰기‘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를 뜻하는 ‘k-punk‘는 꽤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진보적 언론인 로버트 미지크와 비슷하게 공통된 관심사, 유사한 방향성을 가진 인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언론사에 직접 칼럼 형식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으며, 여러 편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피셔는 스스로 우울증 증세로 인해 48세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요. 이에 역자 역시 이에 대한 안타까운 소회를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의 사회병리적 현상을 논하면서, 영국의 우울증 관련 치료비 청구가 이미 건강보험공단에 들어가 있다면서 몇번이나 이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피셔 역시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고(물론 극복할 수 없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역시 이 글에 대한 특별한 헌사를 남기고 있었는데요. 촉망받는 학자이자 사회학 이론가가 이리 빨리 세상을 등진 것은 적잖이 불행한 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영국에서 그의 유고집이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국내에도 빨리 번역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Capitalist Realism : Is There No Alternative?˝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비교적 의미심장한 부제인 ˝대안은 없는가˝는 약간의 중의적인 의미로 마가렛 대처를 비판하기 위한 의미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지젝과 바우만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탐구심과 대체로 일맥상통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자본주의는 유명무실한 포스트 포드주의를 거쳐 성공적으로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지금의 시기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보모 국가‘, ‘거대한 정부‘에 대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논하면서,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안무치하게 2008년 적극적으로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면서 맹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 견고하고 내면화 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다면, 일찍이 거대한 거품을 안고 있던 금융시장을 경고한 누리엘 루비니와 라구람 라잔을 일언지하에 일축한 저들이 천연덕스럽게 정부의 ‘특별한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과거 구소련의 공산주의를 무너트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 ‘역사의 종말‘과 매우 비슷한 어감이 느껴집니다. 더욱이 어느 정도 자본주의가 모순을 안고 있지만 이를 대체할 대안이 명확하지 않다는 수많은 ‘안정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를 정부와 시민들에게 사실상 강요한 파시즘적 신자유주의자들을 우리는 양껏 비판하면서도 언제든지 ˝우리가 자본주의적 거래에 쉽게 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저자의 일침은 많은 사람들의 부실한 양심을 칼로 난도질 하는 것과 유사한 의미겠죠. 사실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에 따른 파행과 사회의 파편화에 대해 오로지 ‘건전한 비판을 상실한 좌파의 몰락‘이라는 핑계로 그동안 죄의식을 애써 떨쳐 왔는데요. 여기서 분명한 것은 우리는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체제 안정주의자들은 우선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수많은 사회병리적 현상을 애써 무시하면서, 자신의 양심과는 아랑곳 없이 이러한 현상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신자유주의자들과는 사뭇 다르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적당히 인정하고 타협하며 ‘적잖은 자본을 소유‘ 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안정주의와 반대의 격렬한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익에 따라 구분되기도 합니다. 마크 피셔는 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하면서 어쩌면 신자유주의 자체의 문제는 오로지 이익을 맹종하는 그 이데올로기 자체로서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및 신념을 쓸모없는 고리타분한 영역으로 몰아세우는 데 있을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밝힌, ˝신자유주의 자체가 시장에서 정치를 몰아내는데, 온갖 파렴치한 노력을 기울인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인 ˝레이건주의적 인간 homo reaganus˝이 시사하는 바는 그래서 극적입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러한 논증보다 더 관심을 끈 부분은 왜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와 쉽게 결탁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였습니다. 앞선 물음에 대해 마크 피셔 만큼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기도 한데요. 물론 자신의 생각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권력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 는 해석입니다. 즉, 오늘날의 각지의 보수주의는 바로 민주주의 내에서 소유한 자본으로 인정받는 일종의 특권 정치를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첨예화 된 능력주의 meriotocracy 와 연계되어 있으며, 자본 이익의 극대화와 이기적인 소양에 대한 전반적인 긍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일련의 사회적 작업이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애덤 스미스를 ‘시장 자유 경제학의 화신으로 만드는 작업‘도 이 지점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과거 자유주의의 이행과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의 강요는 이처럼 완전히 다른 체제일텐데요. 전자의 이행은 계몽주의적 시각에 입각해 인간을 진정한 해방에 이르게 하는데 힘쓴 것이며, 후자는 다수 시민의 자유나 권리에는 별 관심이 없으면서 오로지 돈을 가진자들의 자유, 시장을 완전히 법으로부터 탈피시켜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는데요. 무슨 묵시록과 같은 음모론을 피력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포스트 포드주의를 거쳐 이행된 자본주의의 유일성은 그렇게 간절히 믿고 있는 것만큼이나 병리현상 내지는 심각한 모순을 초래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경제학자들은 반대하고 있습니다만, 현재에 극도의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 및 사회적 격차는 건전한 자본주의를 위한 도덕주의적 관점과 민주적 통제를 손쉽게 제거함으로써 발생한 결과입니다. 이 민주적 통제에 경기를 보이는 경제학자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고, 이에 많은 정치인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반해 우월한 위치를 획득함으로써 먼저 자본주의를 고려할 것을 모든 정부들이 강요 받았습니다. 물론 저는 이를 완벽히 타파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공들여 좀 더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이론적 잣대와 정치적 가능성들을 배제시켜 왔던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마크 피셔가 몇번이나 영국 내에서 우울증을 건강보험공단의 헤택을 받을 수 있는 질병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자본주의 자체가 시민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수년간 누적되어 온 이러한 결과들이 사회와 나아가서는 국가 자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본래의 사회 계약과 시민의 삶을 위해 정부가 필요한 당위성 등을 고삐풀린 자본주의가 위태롭게 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시장자유주의적 경제이론에 마땅한 비판을 거부하는 행태로 이어져 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자인 마크 피셔가 경제학적인 인간의 태동 같은 것을 마땅하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자크 라캉의 정신 분석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점은 꽤 특별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이를 통해 슬라보예 지젝의 또다른 독창적인 연구의 진면모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인데요. 지젝이 그만큼 라캉에 대해 연구하고 알린 것만큼 ˝많은 시민들이 그게 당연한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게 되는 매개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지젝의 작업은 마땅히 찬탄을 받을만 하며, 이러한 지식인의 존재는 전세계인의 입장에서는 실로 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논의를 더 이어가자면 신자유주의의 이행에서 비롯된 관료주의적 이식은 ˝자본이 필요한 데로 정부가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식의 혁명이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경제사회적 매커니즘은 모든 자유주의 경제를 채택한 나라들에서 보여지고 있고, ‘복지의 다운사이징‘을 차치하더라도 자본의 축적 가능성과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거대한 소수 자본가들에 의해 세계 체제가 좌지우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단순히 오늘날의 세계를 ‘포스트 모더니즘적‘ 세계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거의 다른 용어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앞선 1장에서 간략하게 의미를 밝힌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대안은 없다‘라는 마거릿 대처의 독트린이 야만스러운 자기-충족의 예언이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도덕주의적 관점을 자본주의에 새롭게 강요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일부의 사상적 움직임이 있기는 합니다만 신자유주의자들의 조직적인 거부는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결국 지젝의 예언대로 ˝자본주의가 망하는 것보다 전세계가 멸망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라는 뭔가 앞뒤가 바뀌어 버린 것 같은 건전하지 않은 의구심을 정립시키는 것 같은데요. 전세계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자본주의가 바뀌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정부의 주변화라는 결과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도 보모 국가는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일침하고 애초에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데올로기 자체를 배격하는 것에는 사실상 이들에게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없기 때문일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는 양가성이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문제는 이들의 힘이 이미 너무나 거대해 일반 시민들이 최소한의 견제에 나설 수 있는 토양을 이미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피셔의 논의대로 오늘날의 현실이 과연 어떠냐로 시작해 이를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로 종결될 만큼 녹록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자체를 더 강화시키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의 개선의 필요성은 있으나 참고 기다려라 라거나, 시장 자유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배격한다 는 양자간의 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역사적 진보와 어떤 연관이 있을지는 매우 불명확합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생산 능력의 확대가 인류의 비약적인 발전을 비롯한 여러가지 청사진을 기대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던 영국의 사회상은 역시 그를 고양시켰을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당시 설익은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에도 ‘도덕‘을 제외시키는 것은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식인들이 어용이 되지 말아야 하지만 이미 로버트 미지크가 비판한대로 자본에 종속된 지식인들이 대부분인 것은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대량 살상 무기 만큼이나 일방적인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피셔의 이 책은 귀중한 글이며, 그의 짧은 생애가 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한 지금의 정치적 변화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개선 가능성이 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피셔는 이에 대해서도 소위 종래의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한 ‘힙한 문화‘ 조차도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와 밀착할 수밖에 없었다며 진단하고 그저 이 세계가 매트릭스 따름이 아니라는 자포자기로 끝나기 전에 뭔가 희망이 보여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의 보모 국가와 관련해 당시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유포한 복지의 여왕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 조차도 자신의 저서에서 당시 대처와 레이건은 복지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아주 손쉬운 조치였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큰소리로 외쳤던 악명 높은 ‘역사의 종언‘에 우리 자신이 처해 있음을 깨닫고 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자본주의적 교환에 가담할 수 있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욕망의 층위에서 자본의 무자비한 분쇄기 안에 들어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면서 종종 하향식 관료주의가 계획경제에서나 볼 수 있는 제도적 경화증과 비효율성을 야기한다며 맹비난했다

시장의 명령과 관료주의적으로 정의된 ‘목표‘의 이같은 결합은 현재 공공서비스를 규제하고 있는 ‘시장 스탈린주의적‘ 실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알랭 바디우와 데이비드 하비) 두 사람이 보기에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사회를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공식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 기업들은 사실 부패하고 무자비하다는 등의 널리 퍼진 앎 사리의 분할이 그 특징이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정부의 주변화라는 결과는 받아들이기 거부하면서도 보모 국가는 지속적으로 적대시하는 태도는 불신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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