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적은 민주주의
가렛 존스 지음, 임상훈 옮김, 김정호 추천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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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가렛 존스는 마크로노믹스로 불리우는 노동 개혁과 기업 활성화를 주장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경제학자 입니다. 그는 미국 유타주 프로보에 있는 브리검 영 대학을 거쳐 코넬대학에서 공공행정학을 이후 버클리와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미국 상원에서 일한 바가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뷰캐넌의 잔재가 남아있는 조지메이슨 대학의 공공선택연구센터의 경제학 부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이런 경력을 뒤로하고 어떻게 평범한 역사학자가 최신 경제학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지는 다소 의문이 드는데요. 하여튼 이 책의 추천사를 서강대 김정호 교수의 언급을 보더라도 저자가 반민주주의자 일리는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여느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법을 그대로 차용해 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이 부분은 다음 문단에서 자세히 쓰기로 하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10% Less Democracy˝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동일한 해인 2020년 11월 번역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의 의도를 곡해하지 않기 위해서 책의 제목대로 10% 적은 민주주의의 정확한 의미를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요. 글의 1장 후반부에서 ˝내가 기아와 독재라는 실질적 위험에 직면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민주주의 국가들에게만 10퍼센트 적은 민주주의를 추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저자는 이처럼 쓰고 있습니다. 1장 전반을 통해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국가에서는 좀처럼 기아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으로 보아 추측하기로는 일반적인 독재 내지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되도록이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듯했습니다. 또한, 이렇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에 이로운 측면이 분명 존재하며,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지칭되는 세계 상위 20여개국에 대한 이해는 ˝민주주의하에서의 시장경제˝로 해석되는 것과 비슷한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과 약간 별개로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심으로는 민주주의를 떨떠름하게 내지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밖으로는 결코 이를 드러낼 수 없을텐데요. 일찍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나르시시즘의 기반한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여성차별주의에 의한 평소 언어 표현에 대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설사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결코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된다고 했던 이면에는 아마도 민주주의와 그것을 신봉하는 유권자들이 있었기 때문일겁니다.

사실 저자와 같은 많은 경제학자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들의 학문을 고유한 학문 체계의 특별한 연구물로 여기며 이에 대한 건전한 비판을 소위 전문성이라는 미명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일텐데요. 현지 미국 내에서 정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을 포함해 경제학 분야에서의 공동 연구가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순수 경제학 자체의 폐쇄성은 이미 악명이 자자하기도 합니다. 제가 굳이 이 자리에서 다자간 학문의 연결성과 수용성 등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의학과 법학과 같은 전문 학문 계열과 비슷한 폐쇄성을 경제학 또한 갖고 있으며, ˝경제학도 마찬가지로 경제학을 오래 연구한 전문가들에게 맡겨야한다˝는 논리 또한 매우 강합니다. 이 글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시각을 적잖이 읽을 수 있었는데요. 여기에서 상당한 문제는 전문 인력이 아닌 일반 시민을 포함한 일반인들의 해당 학문에의 접근을 가로막는 보호막으로 그 전문성을 몇 십년간 강조해왔으며, 소위 엘리트 지배체제와 다름없는 ˝전문가들에 의한 통치˝를 좀 더 원할하게 하기 위해 다소 민주주의를 희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사고 체계가 앞선 부분과 매우 유사합니다. 따라서 저자가 2장부터 4장까지의 분량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유권자들의 해당 분야에 대한 이해와 마땅한 견제를 불필요하고 소모적이며, 비생산적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이 경제학자가 얼마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지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제가 결정적으로 실망한 부분은 ˝좀 더 많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더 많은 복지로 읽어내는 듯 보이는 단순무지이자 터무니 없는 이데올로그˝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부국가겠지만 민주주의가 과도화되어 있다는 부분도 실제의 상황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일텐데요. 단순히 캐치프레이즈 정도로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해 있는 상황을 자세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저들이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일반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들로 이해하는 것은 논지에서도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복지에 대한 이념적 잣대를 가진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로 인한 과도한 비용을 줄이는 것만이 개인의 자유에 이바지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과도한 논법이 있을텐데요. 이들이 조금이라도 역사 공부를 해봤다면 존 스튜어트 밀이 주창한 자유주의가 당시 영국인들에게 어떠한 의미였고, 그러한 자유로 어떻게 진보된 사회에서의 공익을 실현하려고 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에 대한 헌신‘ 이 우리가 아는 그런 식으로 왜곡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뒤이어 글의 4장에서는 미국의 사법제도에 대한 임명직 판사들에 대한 소위 전문성에 대한 논의와 이러한 체제 하의 비민주성을 저자는 대체로 옹호하고 있는데요. 현재의 미국 사법시스템은 일부 OECD국가들을 제외하면 꽤 개선된 행태의 조치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사법제도 산하의 소위 인사위원회를 두어 ‘선출직 판사‘들을 요직에 보내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내의 사법제도에 대한 일종의 건전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반대로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선 사법 판사들을 오로지 선발 시험으로 뽑으면서 임용후에 국회의 과반수 비준이 없으면 거의 정년을 보장하는 등의 직무 보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우리의 사법제도가 과연 선거권을 갖고 있는 대다수 시민의 이익에 어느 정도나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직도 부족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짧게 언급하자면 사법부와 판사들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어떠한 제도 장치가 전무하다고 판단되고 판사의 해임 역시 국회 인준을 거쳐햐 하는 등의 제한적인 해고가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다수의 엘리트 기득권은 소위 ˝다수에 의한 지배˝에 대한 맹목적인 공포를 입맛대로 적재적소에 이용하면서도 ˝다수의 이익˝과 같은 대단위적인 공리주의와 관련해 그것을 실현할 어떠한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것을 자주 봐왔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그저 민주주의적인 한계로 몰아부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다분히 광장에 모여 있는 시민들을 통제할 수 없는 폭탄과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 등의 곡해와 같이 글 5장에서 강조하는 일반 시민들에 대한 무분별한 선거권이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1장과 2장의 논의를 거쳐, 민주주의 체제 내에 녹아든 경제적 논법으로 윤리적 기준을 일일이 따지는 것을 비용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고 여기는 모양입니다만 단순히 어느 학력 이상의 시민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이나 전과자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자는 제안 같은 것들은 그것의 합리성을 차치하더라도 사실상 전체주의로 가는 다리를 만드는 것과 유사한 생각이라고 여겨집니다. 저자 역시 1장에서 경제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소위 ‘과두적 체제‘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과 같은 문제는 정치 문제에 있어서 반민주주의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단순한 독재가 아니라 전체주의로 가는 길 자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시장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요구하는 효율성의 문제, 합리성의 원칙, 자유로운 영리 활동 등을 무분별하게 강조하면서 차라리 시장과 경제에 관련해 국가와 정치는 더 이상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논법 또한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 내의 특별한 금융 시스템의 위치와 관련해서도 독립된 중앙 은행과 각종 증권 시장과 채권 시장에 관여하는 수많은 경제 전문가들에 대한 자유권 보장이 어떠한 견제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와 관련해서 어느 경제인들 중에 사법적 책임을 진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익은 우리가 손해는 국가로˝라는 모토가 터무니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대마불사에 기초한 금융 시스템 복구 자체는 국가와 시민의 돈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장에 더 많은 자유와 탈규제를 외치는 것은 자신들은 지금도 ‘마땅한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시장 자체가 헌법과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존재하는 것인데 유달리 통제 안에서 독립하고 싶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얼마전에 서평을 쓴 ‘빅데이터 소사이어티‘의 마르크 뒤갱과 크리스토프 라베가 언급했던 수많은 거대 기업의 수장들이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과 일맥상통 된 것이라 여겨집니다. 더불어 이런 논의에서 현재의 첨예한 양극화가 민주주의가 너무나 과도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일부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기 보다는 시장의 무분별한 자유가 어떠한 일을 초래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0년 정도에 걸쳐 투표를 하는 국가를 감히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뒤에 싱가포르 사례를 대체로 옹호하며 논의를 펼치는 것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처럼 전반적으로 저자는 민주주의에 대해 특유의 주변부적인 인식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곳곳에서 로버트 달과 같은 정치학자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인식의 한계를 단순한 인용으로는 덮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단순히 유권자들을 충동적이고 근시안적이라고 치부하기에 앞서 10%를 뺀 민주주의로 만들 전문가들에 의한 효율적 체제가 무엇을 초래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만 부분이 있을텐데요. 최소한의 경제학자들의 입맛대로 정치를 배제하는 자신들의 기능주의적 소견은 이미 많은 책들을 통해서 인지하고 있었으나 8장에서 보이는 유럽 연합에 대한 인식 또한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유럽의 이민문제와 그에 따른 전사회적인 양극화 문제는 손쉬운 비용 절감을 강조했던 신자유주의에 의한 정책의 일환으로 민주주의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더욱 공익과 더 멀어지게 한 것에 있음에도 이에 대한 부분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점은 그 의도가 실로 명백하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한 국가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수준의 상관관계가 이토록 드러나게 된 것은 그동안 시장 경제의 발전을 위한 사회 전반의 희생과 그에 따른 정치의 퇴장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을 그저 좌파들의 케케묵은 인식이라 여긴다면 협소한 현실 인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지금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시장에 대한 정치의 규제가 너무 과도하다고 여기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1980년대를 지나 시민에 대한 사회적 비용을 대폭으로 삭감하고 근 몇 십년을 시민들이 자조하는 그 하잘것 없는 벌이에 대해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으로 강요하는 시대를 우리는 건너 왔습니다. 그와같은 오직 개인의 문제라는 이데올로기의 시대 말입니다. 이러한 오늘날의 외눈박이 인식을 제레미 벤담이 보고 있다면 어떤 말을 꺼낼지 실로 궁금할 지경인데요. 가렛 존스의 이 글을 꼼꼼히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저자 자신이 뷰캐넌의 학문적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자기 본위적인 것은 대체로 실망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저자가 밝히는 대로 ˝기업의 수장이나 부유층이 오늘날 웹 기반의 기민한 연결성˝에 대해 우려를 갖고 있다는 점은 꽤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졌는데요. 사실 이 부분은 시민들 개개인이 쌓아온 학습의 성과가 천차만별인 상황에서 자신들의 개선된 정치를 위한 최근의 연결성이 근래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담론과 연계되어 많은 학자들에게서 회자되고 있는 점은 기득권층이 다소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광범위한 사회적 양극화는 체제 자체에 대한 불안 요소이기도 합니다만 많은 부유층과 기득권 엘리트들은 이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자제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현실이 자신들에게 초래하는 양가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결국 다수의 정치에 대한 저들이 갖는 두려움의 본질은 사회 자체를 최소한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한 본심이 기반되어 있고 이러한 의도 자체를 저항받지 않는 쪽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본문 65페이지에 1990년대에 대선에 실패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한 언급이 있었는데요. 엄밀히 따지자면 그의 아버지인 조지 H. W. 부시일겁니다. 여기서 궁금했던 점은 저자도 조지 W. 부시로 썼는지 아니면 정확히 조지 H. W. 부시로 썼는데 역자가 마음대로 조지 W. 부시로 표기했는지 무척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다른 서평으로 한번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만, 과거 태국과 같은 경우 민중 시위가 있었을 때, 태국의 의사와 변호사를 비롯한 기득권 엘리트들이 농민층과 하위 계층에 대한 투표권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의 경우는 아직도 사람 많은 곳에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면 당국에 연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 유명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퇴임사인 ˝대두하는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고가 ˝‘민주적 방식‘이라는 이름의 악마˝라는 소제목에 실려 있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인용에도 실로 실소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유권자들이 광범위하고 실질적으로 거버넌스에 관여하고. 시민들이 인지적으로 충분히 평등한 상태에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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