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소설가인 아니 에르노는 루앙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도중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실존해 있는 작가임에도 문학상이 만들어진 매우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단순히 첨예한 냉전 시기의 여성들의 삶을 그리는 데 작품 활동을 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배경으로 어머니의 죽음, 낙태, 결혼 등과 같은 주변의 이야기로 글을 써온 특별한 신변 이야기의 화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보편적인 개인‘에 집중한 그녀의 집필 작업이 프랑스 내에서 나름 인정을 받은 것으로 봐야하겠죠. 거대한 담론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작가로서 에르노의 역사도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책은 원제, ˝Passion Simple˝로 지난 1991년에 초도 출간이 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점은 당시 출판사인 문학동네가 야심차게 민음사를 벤치마킹을 했음에도 비용상의 문제 때문인지 세계 문학 시리즈물의 양장본을 일찍 절판시킨 것은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이런 연유로 저 역시도 중고서점에서 구입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명한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작품의 문학성과 선정성은 가히 종이 한장 차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니 에르노의 이 짧은 분량의 소설이 선정성에 속하고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동의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요. 남자의 성기라는 단어와 애무와 섹스라는 단어 만으로 지금의 시기에 선정을 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이 나왔던 1990년대 초반 서유럽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만 과거 D.H 로렌스가 받았던 무책임한 악명을 아니 에르노에게도 투사하는 것은 실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부르주아 인텔리와 동유럽 출신의 유부남과의 관계는 이 시대의 기준으로서도 아름답지 못한 사랑임은 분명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지대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차피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짐작을 하고 계시겠지만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 본인의 모습이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며, 주인공의 편집증적이고 다소 우울한 나레이션은 작가 본연의 내면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글 자체를 문학적인 측면이나 독자들에 대한 파급력까지를 두고 해석하기 보다는 개인적으로는 일반 여성들이 연인과의 헤어짐 이후, 보일 수 있는 꽤 설득력있는 감정선의 모습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동유럽 출신의 유부남과의 관계는 서유럽의 인텔리 여성의 현실적인 위치를 차치하더라도 어느 정도 그 종지부가 예견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작품 전체에 어떤 윤리적인 잣대를 먼저 들이대기 이전에 여성인 주인공이 어떻게 보면 내면의 감정 기복이라고 여겨질 수 있을 만큼의 혼란스러움과 불확실성을 꽤 생활체적인 접근으로 시도하고 있는 점 또한 매력으로 여겨졌는데요. 이 곳 서평에서 꽤 노골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헤어진 연인의 ‘성기‘를 매번 상상하는 주인공 여성의 심리 묘사는 외설을 떠나서 제가 남자임에도 심정적으로 동감이 될 정도였습니다. ˝스무살 때는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겁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과 ˝낙태 수술을 했던 곳에 또 가보는 사람˝이라든지, ˝어느 날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남겨줬을지도 모르잖아˝라고 나레이션을 하는 부분은 작품의 격을 낮춘다기보다는 어쩔 때는 철없는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을 심상에 끄집어 내기도 하는 등 흔한 애증의 감정을 배설로 토해내는 여느 작품들과는 꽤 다른 면모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처럼 한참 해빙의 무드가 시작되고 있던 유럽 전체의 상황에서 동유럽 출신의 남자와 연애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당시 시대상으로는 꽤 신선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내뱉기 전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이미 유럽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지 본능으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마음을 작가인 에르노 역시 고르바초프를 인용하며 당시의 시대 모습을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도의 측면에서 유부남과의 관계 자체를 굳이 미화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앞서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끝을 이미 알고 있는 연애를 경험한 여성의 심리적 변화와 그 관계의 주변부에 놓였던 자신의 삶을 애써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은데요. 특히, 여성들의 꽤 내밀한 감정 기복에 대한 묘사는 대체로 일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 사람과 함께일 때를 제외하고 내게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새옷이나 귀고리, 스타킹 등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서 하나하나 몸에 맞춰보는 때였다

그는 이브 생 로랑 정장과 세루타 넥타이, 그리고 대형 승용차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성공을 꿈꾸고, 이삼 년마다 한 번씩 정부를 바꿔가며 성욕을 해소하고 사랑을 즐기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가 그에게로 가면 돼‘라고 생각했다. 내가 왜 그에게 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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