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 비판 - 지식 경제 시대의 부와 분배
가 알페로비츠 & 루 데일리 지음, 원용찬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미국 위스콘신 출신의 역사학이자 경제학자인 가 알페로비츠는 특히 손꼽히는 냉전사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소위 원자폭탄 외교와 원자 폭탄이 냉전시기에 갖는 여러 함의들에 대한 저서들을 쓰기도 했는데요. 최근에는 미국 의회의 격식있는 조언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추측하건대 최근에는 세계 경제적 상황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부의 불평등과 재분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위키 백과와 이 책의 소개에서도 그를 정치경제학자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위스콘신 대학과 버클리를 거쳐 캠브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알페로비츠와 함께 공저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루 데일리는 영국의 유명한 민주주의 연구의 싱크 탱크인 데모스의 선임 연구원으로 주로 GDP와 관련된 연구를 지속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최근에는 미국 시카고 대학과의 공동 연구도 있었던 듯 싶은데 그외 그의 학력이나 주요 사항이 구글링으로 잘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로 사회 민주주의자로 그를 소개하고 있는 언론사들이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저의 검색 스킬 부족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08년 ‘Unjust Deserts‘라는 원제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1년에 번역 출판되었지만 현재에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마지막 장까지 일독하고 나서 먼저 떠오른 생각은 국역된 책 제목이 다소 적절치 못하다는 소감이었습니다. 좀 더 엄밀히 번역한다면 ˝불공정한 보상˝이 적절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알페로비츠와 데일리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막대한 부를 쌓은 부유층과 기득권을 보유한 상위 계층의 그 부가 명실상부한 ‘사회적 지식‘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일전에 소개한 질베르 리스트의 글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현재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축적된 사회적 지식의 여러 산물로 인해 발생한 과학지식의 발달과 그로인한 경제적 발전에 대해 오로지 ‘경제학의 산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런 자신들의 특수성이 아주 기본적인 역사의 과정을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진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뭐 이들의 그러한 행동의 해석상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교육을 받은 경제학자들이 역사와 사회학과 괴리되어 있는 연유에는 시장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어떠한 것에서도 훼손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학적인 교조주의적 관점에서 안온하려는 의도 떄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저는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이론적 배경의 인식 개선을 위해 자주 강조하는 리처드 번스타인의 가류주의 즉,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틀렸거나 잘못되었다면 언제든지 이를 철회하고 새롭게 재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학문적 태도가 자신들의 선에서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에서 저자들은 이 이상은 현재의 심각성을 단순히 인식하고만 있는 분배점 함의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일종의 제언으로 남기고 있는데요. 하이에크 조차 경제 성장에 대해 ˝지식이란 세기마다 진화하는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발달에 부분적으로 힘입어 경제성장에 기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이 글 2장에서 논증되고 있습니다만, 17세기 이후 인류가 전시기에 비해 이토록 많은 지식을 구전과 기록을 통해 후대를 위한 ‘지식 축적‘에 나선 것은 꽤 경이로운 일이며, 예를 들어 ˝양자 역학이 없었더라면 반도체가 마이크로 전자공학, 자기공명 영상이나 레이저 같은 기타 무수히 많은 기술에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그 지식의 축적을 통한 기술 발전의 일면을 이렇듯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술 진보가 누적된 지식의 새로운 결합이다˝ 라는 3장의 주제 또한 말하는 바도 명백한데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듯이 이 기술 진보에 따른 과학 기술의 발전은 생산 기술의 향상과 그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체계가 층층이 쌓이며 분화되고 발전되는 그 결과물이 경제 발전에 직접적으로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 진보의 산파가 바로 ˝계몽주의 시대 이후 거대한 축적된 지식˝입니다. 이것은 당시 평범한 개인들이 마치 ‘사과 껍질을 깎을 때는 어떻게 칼로 깎아야 잘 깎이는지‘와 같은 가벼운 것들의 경험들까지 포함한 누적된 지식의 총체적 산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매커니즘에 따라 산업혁명에 따른 포드주의와 기술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즉, 경제적 계산에서 계상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진 무언가 바로 그것은 ‘잔차‘입니다. 따라서 ˝현대 경제학이 20세기 중반까지 지식과 기술의 중심 역할을 대체로 무시했다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는 진술은 저역시 무척 놀라울 정도였습니다.그런 의미에서 경제학 자체는 자신들의 존립이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같은 위상을 강요하며, 경제학을 인문학의 잣대로 해석할 수 없다, 경제학을 역사학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없다, 경제학을 사회학의 수단으로 환치시킬 수 없다는 등으로 자신들의 배타적 권리를 다수의 학문군에게 집요한 태도로 강조해 왔습니다. 이것을 경제학의 오만으로 받아들여할지 아니면 다른 학문들보다 더 고차원적인 무언가가 진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당위성으로 받아들여할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만 어찌됐든 이러한 배타성이 학문적 접근을 거부하는 수준을 넘어 불평등 이상의 사회경제적 폐단을 낳은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저들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이 강조했던 것은 명확합니다. 능력있고 수완이 있는 자들이 더 많은 과실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 말입니다. 아니 논리라기 보다는 믿음에 가까운 것이겠죠. 여기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의 ˝우리가 자신에게 매우 관대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소득의) 5분의 1 정도가 ‘노력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 주장할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를 전적으로 인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까지의 일련의 경제적 시스템의 거의 대부분의 산물이 인류가 축적해 온 사회적 지식에 기반해 있으며, 이를 뭔가 손쉬운 ‘거저먹기‘로 혹은 아무 의미없는 ‘뜬구름‘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이에 관련한 과학사적 증거와 일련의 논의들을 저자들이 이 글 2장과 3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만 논증의 의미를 떠나서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사회적 지식 자체가 일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에 동의를 하고 계신다면 4장의 ˝지식 생산의 가장 큰 투자자는 공공 부문이다˝라는 함의에 동의를 하실 겁니다. 사실 항암 치료제인 텍솔 Texol 에 대해 저자들이 언급하는 대로 정부나 공공기관들이 사회 공적인 안전과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그에 맞는 여러 투자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미미한 기술의 안전 투자자가 바로 정부라는 소리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겠죠. 이런 중요한 논리는 다른걸 다 떠나서 시장에서 정부와 정치는 필요없다는 소리에 반박할 증거가 되는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교조주의적인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대로 하되, 마찬가지로 다수의 시민들의 사회적 보장 장치를 일찍이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언급한대로 ˝없애는 것은 그 자체로 손쉬운 일이었다˝는 일종의 소회가 시민다수를 웃음거리로 취급하는 것은 이제는 없어야 할 겁니다. 모든 체계는 법과 도덕이 규정하는대로 ‘경제적 인간‘ 모두가 이를 준수하고 축적된 자본과 보다 많은 기술을 보유한 부유층은 어느 정도로 적당한 이기심을 발휘할 자유와 반대로 그렇지 못한 많은 시민들에게는 충분히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을 국가와 사회가 보장하면 될 일입니다.

이 책의 논의 가운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존 스튜어트 밀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근로소득과 불로소득에 대한 좀 더 면밀한 논증이 부족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생산성 효용 한계와 그를 기반으로 분배적 정의에 몰두하는 로버트 노직과 다소 다른 입장에 있는 존 롤스를 통해 이 불로 소득의 의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지식 경제 수준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마도 한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니 로드릭의 말대로 이 거대한 불로 소득의 문제는 ‘고빠 풀린 금융화‘의 문제이며, 대다수의 경제학자들이 거품 경제에 한결같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거품과 불로소득은 아주 연관성이 크기 때문일겁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활동을 하던 국내 한 소장학자가 이러한 금융화에 대한 비판 연구를 도미해서 시작했을 때, 당시 금융계와 경제학자들의 로비를 받은 로비스트들이 끈질긴 공격을 했다는 어느 짤막한 후일담을 담은 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사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학과 전세계적인 글로벌 금융화에 대한 어떤 이념적 태도는 거의 교조주의와 흡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이 생산품이 적정 수준까지 소비되지 않으면 강한 압력을 받고 이에 따라 재투자된 금융계 저변까지 영향을 끼치는 거의 단일대오적인 형태의 종적이면서 횡적인 영향관계에 놓여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하이먼 민스키가 어느 정도의 거품이 끼어야 적잖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했다는 일설이 이 시장과 행위자들의 복잡한 관계를 일견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많은 시민사회가 수면위에 올리고 있는 불평등 문제 전반에 대한 매우 불쾌한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러한 시스템에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부유층이 있어야 약탈 경제가 지속된다는 그 해괴망측한 논리들 말이죠. 그래서 종장에서 인용된 로버트 달의 마지막 유고와도 같은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과연 언제까지 해결이 가능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제학적인 문제를 담은 원문을 번역한 역자의 노고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번역의 질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는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으니 그 점은 아쉽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기술 진보는 역사적 과정 없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소수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거나 똑똑했기 때문에 오늘을 이룩했을 것이라면서 그들의 성공을 개인적 과정으로 보도록 길들여졌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생산 활동과 직접적 인과 관계가 없는 소유물을 당연히 사회적 부의 일종이며, 그렇게 취급 되어야만 한다"고 촉구했다.

밀과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개인적 기여와 무관한 이들은 분배적 정의라는 관점에서 특별히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개인적 노력으로 기여하여 이룩했다고 보이는 것 조차도 상당 부분은 각 개인이 받은 유산, 사회적 영향, 행운이 낳은 생산물이다.

아직도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공동의 유산이라는 입장에서 제기하여 평등 문제로 다룬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고소득자들은 획득한 지식이 많고 지식 획득의 기회도 많기 때문에 고도로 교육받게 된 것이다.

현대에서 가장 눈에 띠는 현상은 한마디로 말해 총체적 지식의 증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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