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바꾼 세계 KODEF 안보총서 45
매튜 휴즈 & 크리스 만 지음, 박수민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이 글의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매튜 휴즈는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전쟁사에 대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영국 런던에 소재한 브루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는 중동 역사와 팔레스타인사의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과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대학 등의 방문 교수를 거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저자 중 한 사람인 크리스 만은 매튜 휴즈와 마찬가지로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런던 서리 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유럽 역사 및 2차 대전사와 나치 정치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히틀러와 관련된 글을 언론사를 통해 기고하기도 했는데요. 아무래도 전체주의에 대한 연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약간 더 첨언해서, 이 책을 기획한 플래닛미디어는 다수의 전쟁사로 유명한 출판사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출판사의 손을 탄 몇몇 전쟁사의 제목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글의 원제는 ˝Inside Hittler‘s Germany : Life Under The Third Reich˝로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1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만 아쉽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우선,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연대는 1920년대초부터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의 패망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분량은 색인을 포함해 420여페이지 정도가 됩니다만 책 대부분의 페이지를 당시의 생생한 사진들을 삽입해 본문의 내용이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사진들은 그 자체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독자들이 좀 더 생생하게 히틀러의 대두에 따른 ‘국가사회주의‘의 독일 제국을 이 책으로 열람할 수 있겠다 하겠습니다. 물론 모두가 아시다시피 히틀러와 그의 파괴적 정치에 대한 글들은 이미 국내외에 많은 자료가 출판되어 왔습니다. 민중을 손쉽게 손아귀에 넣고 자기 입맛에 맞게 다룬 히틀러의 정치적 술수에 관심 많은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히틀러의 제3제국을 반면 교사로 삼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다고 봐도 크게 오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얼마전에 서평을 쓴 자크 파월의 ˝자본은 전쟁을 원한다˝의 논증을 받쳐줄 여러 내용들이 이 책에도 나타나 있기도 합니다. 히틀러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독일 재계의 할마르 샤흐트의 행적 또한 마찬가지로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제가 이 두 공저자의 논점 가운데 주목한 부분은 과연 히틀러는 언제부터 반유대주의를 신념으로서 주창하게 된 것에 대한 단초였습니다. 일각에 히틀러 스스로 고백한 제1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 산재해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대책을 고민했다고 하는 점은 다소 불분명하고 사실상 친위 쿠테타에 성공한 이후, 본격적으로 반유대주의에 따른 유대인들의 척결에 나서게 되었다고 이를 두 저자는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만, 이 점은 다소 명확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히틀러는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심각한 여성차별주의적인 인식을 내면화 시켰고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그 시점에 지식인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와 일찍이 로버트 S. 위스트리치가 그의 논저에서 밝힌 ˝이미 19세기 이전부터 전유럽에 반유대주의의 뿌리는 존재했다˝는 주장을 이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틀러가 허버트 스펜서 류의 사회진화론에 심취해 있었고 2차대전에 이미 독일 내에 있던 장애인들을 비롯한 ‘아리아인의 순결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즉결 처분‘했던 일로 유추해 봤을 때, 이미 이 반유대주의를 어떻게 휘둘러야 될지 사실상 그는 결정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성문 헌법으로 삽입시킨 뒤에, 히틀러 정권이 이후 전개한 ‘유대인들에 대한 대책‘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제가 그의 ‘순수한 아리안의 혈통‘이라든지 ‘게르만 민족만의 국가‘에 대해 당연히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나와 적으로 구분해 인식하는 이 ‘피아식별‘에 대해 카를 슈미트가 어디까지 조언을 했는지에 더 궁금해졌습니다. 물론 카를 슈미트는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무혐의로 풀려놨습니다만 이러한 특단의 대책에 대한 논리적인 제공자라고 여긴다면 저의 이런 해석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일까요. 그동안 몇몇 글들을 통해 카를 슈미트와 레오 스트라우스는 분명 나치에 대해 다른 행적을 보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사람은 의심의 동물이어서 그런지 이렇게 역사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후세의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앞선 것과 더불어 한가지 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당시 로마 바티칸의 교황이었던 피우스 12세 (혹은 비오 12세)에 관한 일들일겁니다. 그는 초기에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대한 분명한 반감을 표출하고 유럽의 추기경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역에 무솔리니 정권이 대두하고 그리스 사태와 더불어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자 독일군의 직접 개입이 로마 인근에까지 이르게 될 가능성이 생겨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교황이 얼마간 히틀러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이미 독일 내에서 기독교와 천주교 양자 종교가 나치와 일체화가 되면서 무력하게 굴복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일부 인사들 가운데 나치에 저항했던 마르틴 니묄러 목사를 제외한다면 그 서슬퍼런 나치의 화살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에 대해 대다수의 독일 국민이 이에 침묵을 한 것은 이 국가사회주의가 총체성을 바탕으로 단 하나의 불협화음도 인정하지 않는 종교와도 같은 체제였던 것인지, 아니면 다수의 국민들이 용기가 없었기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않은 것은 ‘공산주의는 유대인들의 소행˝이라는 히틀러의 인종차별적인 궤변이 현실화가 되는 역사의 한 장면이었음은 확실합니다.

패전이 가까워질 무렵인 1943년의 항구도시 킬과 함부르크에 가해진 영미 연합군의 무차별적인 폭격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드레스덴에서의 비극, 그리고 1945년까지 무고한 독일 여성 200만이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에 의해 강간을 당한 것은 당시 이 독일인들이 마땅히 감내해야만 하는 죄의 값은 분명 아닐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앞으로의 역사에서 히틀러와 같은 파시즘을 다시는 잉태하지 않기 위해, 이 히틀러의 역사를 계속 되새겨보고 있는 중입니다. 국가를 제멋대로 그리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은 권력자의 욕망이라는 것이 이제는 소수의 계층이 다수의 정치에 반하는 것을 시작으로 좀 더 복잡해지고 있는 실정인데요. 전후 냉전을 거쳐 다수의 편협하고 상식을 저버린 정치인들과 이에 동조하는 적지 않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깎아 내리고 폄하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 시민이 주도하는 정치에 대한 군중 정치의 망령을 계속 끄집어 내고 있습니다.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일면이라고 주장하는 보수 정치인들부터 개선된 전체주의를 운운하며 이에 동조하는 극우주의자들이 현재에도 만연한 지금, 우리와 같은 많은 시민들은 이 히틀러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43년 이후 연합군에 의한 독일 도시들의 폭격이 날로 심화되면서 히틀러에게 폭격 피해를 받은 도시들을 방문해야 한다고 괴링조차도 조언했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확실히 히틀러는 단순한 정치인의 기준을 넘어서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들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그의 논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서 논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독일에 과도하게 지워진 전쟁 배상금에 대해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독일이 재무장의 길에 들어선 이유들 중에 중요한 원인일텐데요. 다만, 루르 지대에 프랑스 군이 진주하게 되었을 때 독일인들이 분노해 마지 않았다고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차대전 종전의 의미는 매우 복잡한 양상이었음은 분명해보입니다

(아리안의 순수성 유지에 따른 사회적 약자들의 절멸과 같은) 이런 상황은 조지 오웰이 말한 ‘빅 브라더‘ 접근 방식으로 생물학적인 유대 관계를 새로운 관계로 대체하려고 한 것이다.

나치의 반사회적 인간들의 범주는 "노숙자, 집시, 매춘부, 알코올 중독자, 일하기 싫어하는 자, 유랑자, 괴벽이 있는 자"들이 이에 속했다

대중매체에 실린 나치 풍자문화는 유대인 남성을 순진한 독일 소녀를 건드리는 색골로 묘사해 왜곡된 인상을 심어주었다

독일인들이 다소 적극적으로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히틀러가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는 부정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치는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 덴마크, 노르웨이의 원료와 공장을 모두 독일이 직접 감독했음에도 연합국의 생산 격차를 결코 줄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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