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폭력 - 거대한 사회적 분열의 연대기
미셸 팽송.모니크 팽송-샤를로 지음, 이상해 옮김 / 미메시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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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저자들의 공저라고 할 수 있는 이 일종의 르포 사회학은 프랑스에서 저명한 사회학자 부부로 잘 알려진 미셸 팽송, 모니크 팽송-샤를로의 유명한 논저입니다. 저에게는 이들이 정치철학자인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부부로도 오버랩 되기도 하는데요. 물론 두 부부의 각자의 분야는 명백히 다르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이들이 사회의 어두운 면과 불합리한 면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공을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철회하지 않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끔 쥘리앙 방다의 문장을 떠올리다 보면 모든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책무, 지식인의 역할, 지식인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곱씹어 보기도 합니다. 이미 자본에 굴복하여 개인적 영달만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이 시점에 이들과 같은 존재의 의의는 그 가치를 결코 전부 가늠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셸, 모니크 부부는 프랑스 사회학에서 기피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자들의 터무니 없는 범법 행위 내지는 사익 추구에 있어서의 맹렬한 시도 그리고 시스템 전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각종 로비 활동과 입법 활동에 대한 지원, 마지막으로 이들이 종국적으로 추구하는 과두지배체제를 자신들의 학문적 소신으로 삼고, 이를 포함한 모든 것을 이 책이 담고 있다고 봐도 거의 무방해보인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의 원제는 ˝La Vionlence des riches : Chronique d‘une immense casse sociale˝로서, 지난 2013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5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앞선 문단에서 간략히 소개해 드린 바와 같이, 미셸 부부의 이 책은 일종의 ‘르포 사회학‘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책을 떠올려 본다면 아마도 최근에 번역된 아난드 기리다라다스의 ˝엘리트 독식 사회‘와 그 형식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다만, 이 책은 총 6장에 걸쳐, 프랑스 사회와 정치 그리고 경제적 파행 등을 거의 가감없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부자들의 사익 추구가 다수의 이익보다 더 우선시 된다는 점˝을 비판하며,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주입하고 있는 인간의 이익 추구가 최고의 가치이자, 사실상 이를 수행하는 가운데 어떠한 정치적 제한과 법적 의무를 이들에게는 더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매우 일목요연하게 논술하고 있습니다. 책의 논증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는데요. ˝이익은 사유화 되고 손실은 사회화 된다˝라는 것과 공공연한 탈세와 검은 자금의 구축 등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자들이 겉으로는 매스컴과 공공장소에서 ˝윤리적인 자본주의˝를 부르짖는 것과 같은 이중성에 대해 실로 충격을 받았는데요. 이것은 수많은 보수 우파들이 속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해 불신과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자신들이 더할 나위 없는 민주주의자라고 외치는 것과 아주 유사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우파 정치인들이 그렇게 궁합이 잘 맞는 이유가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먼저, 이 책을 읽기 전에 ˝원칙적으로는 산업 자본주의가 이미 종말을 고했다는 점˝을 독자들은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의 급격한 사조에 따라 세계화가 이뤄지고 이 손쉬운 자본의 이동 상황에서 부자들의 이익을 더 폭발적으로 증대시킨 금융자본주의화의 현실이 이 글을 해석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1장에서는 ˝왜 세계는 불평등한가˝라는 척 콜린스와 동일한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더 손쉽고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 무분별한 해고는 수많은 삶들을 파편화에 이르게 하고서는 현재의 이 시스템이 아주 우월하다는 식의 태도를 여러 부유층의 행태를 통해 목도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저의 어떤 지인은 하나같이 못사는 사람들은 그 핑계가 다 똑같냐고 일갈을 한 바가 있습니다. 오로지 사회에 대한 불만, 국가에 대한 불만, 부자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다면서요. 저는 사실 이런 사람들의 언행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기에 앞서, 신자유주의가 정치와 공공성을 희생시키고 오로지 모든 책임을 개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발생한 전형적인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들이 무지의 변으로 이러한 말들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견고하고 강력한 왜곡된 반사회학적인 주입으로 인해 벌어진 불행한 인식으로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처럼 프랑스의 상황도 매우 유사한 것을 이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맥락은 크게 벗어날 수 없는게, 이 부분 또한 세계화의 영향이며 지오바니 오리기가 밝혔던 것과 같이 ˝자본주의의 왜곡된 파행 상황에 대해 신자유주의가 그 혐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조세피난처에 열심히 자신의 돈을 탈출시키고 있는 부유층의 행태를 여실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특히 LVMH 그룹의 수장 베르나르 아르노의 사례는 의미 심장한데요. 세금이 적은 인근 벨기에로의 국적 세탁을 시도하고, 대서양을 비롯한 세계에 산재한 조세피난처에 유령 회사나 유령 법인을 만들어 부자들의 자금을 세탁해주는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이들이 비윤리적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합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초부유층들은 매스컴과 공공 발언을 통해 ˝자본주의는 보다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외쳐대는 그 일면에는 바로 이런 초법적인 사익 추구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법을 위반하고 사법적 토대를 벗어나는 경제인들의 이익 추구에 거의 100%가 반대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현실과 이론의 괴리라면 이것은 스피노자가 말한 인간의 인식적 본질과 외형적 태도가 완벽하게 불일치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이른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인식의 변을 비난할 게 아니라 매번 말씀드리지만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매우 불행하고 불쾌한 비윤리적 주입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뒤이어, 3장과 4장은 이러한 부유층의 시스템적 영위와 견고한 이행이 어떻게 ‘사회와 국가의 과두 지배에 이르고 있는가˝에 대한 매우 상세한 대답이라고 할만 합니다. 스스로 좌파적인 정치인이라고 여겼던 프랑스 공화국의 제 24대 대통령인 프랑수와 올랑드는 어떻게 ‘부자들의 대통령‘이 되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고위층들의 촘촘한 인맥 관계와 심지어 사법제도 안에서도 부자들의 특혜를 주는 행태 또한 세금 포탈과 관련된 프랑스 검찰의 기소가 전체의 3%도 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저자들은 단순한 생계형 범죄로 법정에 서는 프랑스의 가난한 사람들은 낙인 효과 더불어 다시 사회로 복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반면에 이 부유층들의 경제 범죄는 프랑스 법원이 그 소명할 기회를 사실상 부여하고 있으며 수많은 권고 사항과 협의 강조 등은 단순히 거대한 경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인맥과 시스템적 조롱을 통해 프랑스의 현실에서 지금도 목도할 수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2012년 프랑스의 법관 82명이 부패를 없애는 행동에 나서자고 공개 선언을 한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과연 한국의 법원 판사들이 이런 행동에 나설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과두제 지배체제의 인상에서 바로 5장은 이 글의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담고 있는 장이라 할 만합니다. 특히, 독자들은 이 5장을 유심히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자들은 스스로 사회 다수의 시민들과 사실상 단절이 된 상태로 이미 지배 메커니즘에 의해 수많은 엘리트들에 의한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저자들은 꼬집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민주주의 실패라고 보고 있지는 않은데요. 왜냐하면, 이미 언론과 지식인들에 의해 이러한 시스템적 규모가 다수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는 터무니 없는 설득에 많은 시민이 넘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경제적 메커니즘이 애초에 정치를 배제하는 등의 신자유주의적 사조에 지배를 당하고 있으며, 이 점은 앞선 언론과 변절한 지식인들이 이러한 구조적 규모를 강화시키는 데 힘써 왔다는 점에서 이를 민주주의 자체의 실패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부분에서 헨리 키신저와 같은 ‘민주주의의 과잉‘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며, 단순히 시민의 재교육이나 스스로의 이성적인 깨우침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를 벗어난 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는 다분히 금융자본주의적 경제적 메커니즘에 의한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전반적인 각 사회의 지배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보다 실효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들만이 노력하기 보다는 양심적이고 대의적인 정치인들의 필연적인 호응이 필요하지만 이것이 과연 가능하게 될지는 저로서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다만, 여기 미셸 부부의 이 논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진면목을 다수의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히 의미있는 작업이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나 반대로 신자유주의를 호응하는 사람들이나 본질적인 측면에서 이 지배 메커니즘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리처드 번스타인이 인간 이성의 본질적 임무를 우회적으로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번역은 뛰어나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라 여겨졌습니다. 아무래도 문법적으로 복잡한 불어의 번역이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시장의 법은 새로운 법, 인간의 의지보다 우월하다는 자유롭고 완벽한 경쟁의 힘에 의해 초월적 지위를 얻은 최대 이윤의 추구라는 법의 완곡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계급이 과두 지배를 하게 되면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점점 더 큰 폭력을 행사하고, 영악하고 탐욕스런 개인들이 법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바꿔 개인적인 이득을 취한다

구속도, 국경도, 법도 알아서는 안되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더 이상 죄책감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오히려 도덕적 가치와 돈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던지고 파렴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정신적 자유주의와 좋은 짝을 이룬다

경제적 부유층들은 부와 권력을 계속 누리기 위해 그들은 개인적인 이득은 가능한 한 많이 챙기고 세금을 가능한 한 적게 내면서 윤리적인 자본주의를 권장한다

힘있는 자들이 일탈을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는 건 주로 그것을 허락하는 사회, 경제 시스템 탓이다

법이 사람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그 분야에 대한 대다수 시민의 무능력은 서민 계층이 배제되고 주변화되는 한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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