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며 - 2000년에 1887년을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3
에드워드 벨러미 지음, 김혜진 옮김 / 아고라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이 글의 저자 에드워드 벨러미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피코피 출신의 변호사이자 작가였는데요. 여기서 벨러미 가문은 미국에서도 꽤 유명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회지도자이자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던 ‘조셉 벨러미‘가 그의 선대이기도 합니다. 다시 저자의 약력으로 돌아가서, 그는 뉴욕의 유니언 칼리지에서의 학업 도중에 독일로 가게 되는데, 그때의 유럽에서의 경험이 작가로서의 에드워드 벨러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변호사 시험을 치뤄 개업을 하게 되지만, 현실의 벽에 좌절하면서 그는 변호사 개업을 종료하고 언론계에 투신하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1888년, 그의 이름을 알린 이 책이 초도 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선, 저는 2018년 가을쯤에 조안 C. 트론토의 ˝돌봄 민주주의˝에서 인용된 것을 기억하고 주문을 해서 이 책을 받았으나, 그동안 틈이 나지 않아 읽지 못했는데요. 마침 짧은 휴가를 이용해 묵은 책들을 소화해보자는 마음으로 이제야 일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의 원제는 ˝Looking Backward, 2000~1887˝로서, 지난 188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초도번역인지는 모르겠으나 2014년 8월에 번역되었습니다. 참고로 번역된 책은 해당 출판사의 ‘아고라 재발견총서‘로 묶여 있기도 합니다.

벨러미의 이 글은 모두가 아시다시피, 소설의 존재 의의 만큼이나 한계와 관념적인 문제가 동시에 있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소설에는 보기에 따라 의미상이라든지 구조적인 측면에서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라 되도록이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인식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글의 원제와 동일하게 1887년에서 2000년으로 도약하는 단순한 ˝타임슬립˝의 구성으로 시작된 소설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뒤에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상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디스와 관련된 흥미로운 구성 요소도 있고 글의 구조에 있어서도 내용 만큼이나 꽤 신선한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많은 서평을 통해서도 벨러미의 이 작품이 단순한 사회주의적 소설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분들이 많을텐데요. 이 또한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기자들이나 서평가들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이 책을 쓴 1888년에는 다가올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실질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단순히 공산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균질한 평등 사회라는 식의 독해는 큰 무리가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플라톤이 ˝도덕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이상에 가까운 지도자가 출현할 수 있는 정치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이 책이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벨러미의 이 소설 자체가 꽤 긍정적인 남녀평등의 사회를 그리고 있고 여기에 등장하는 ‘국가‘라는 체계 내지는 정치적 위치가 단순히 기계적인 평등 국가를 내포하는 것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여기에서의 국가는 개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한 매우 조화롭고 자애로운 조정자의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으며, 애초에 이렇게 전진한 사회가 폭력적인 혁명이라든지 어떤 물리적인 갈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자연스런 인식과정에서 이러한 국가 제도의 수립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선 ‘자연스런 인식과정‘이란 과거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와 그것으로 비롯되는 자아 실현의 문법이 정신적으로 고양된 자아의 의미와 그것의 실현 과정이라는 맥락에서 그런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은 이 지점에서 지극히 이상주의 세계관 밖에 안되는 정도의 평가를 내리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어떤 글에서 현재의 꽤 치열하고 일방향적인 소비주의 사회의 맹신이 나중에 어떤식으로 귀결될 것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엿본바가 있는데요. 특히, 지젝이나 바우만 더 나아가서는 샹탈 무페와 같이 이 심각한 소비주의의 광풍이 우리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어떤 식으로 변형시킬 것인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피력한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벨러미 역시 이 글에서 이러한 소비주의적인 수단의 시대가 과연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와 사실상 반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요. 이러한 사회 메커니즘은 이미 우리가 현실로서 목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연유로 이 정도 지점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꽤 변화된 인식과 더불어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지만, 벨러미는 이 부분과 관련해 글의 거의 결말부분에서 ˝부자들 조차도 이런 측면에서 힘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바보가 아닌 이상 주된 현상의 기득권화 되고 있는 일련의 자본주의적 과정들이 종래에 어떤식으로 사회를 파편화에 이르게 할지는 부유층들 역시 이미 예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이러한 강고화가 자신들에게 큰 이득이 되고 있으니 애써 눈을 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나중에는 이들 부유층 조차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가 무당은 아니지만 지극히 우려스러울 만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는 흥미롭게도 1888년 당시에는 고안하기 힘든 ‘신용카드‘ 개념을 글에 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신용카드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긴 합니다만, 이 부분에서 아마도 당시에 작가는 이미 많은 독서를 해온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그 외에도 사회 구성으로서의 노동조합들의 평화롭고 자연친화적인 결말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아 전반적인 작가의 인식론이 꽤 범상치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주인공인 줄리언 웨스트를 일종의 인식적 대적자로 만들어 놓고 그가 어떤식으로 사고 체계 내에서 변화될 수 있겠는가에 대해 독자들이 이를 기대하게 만들고 일개 개인의 변화가 실제 사회에서 어떻게 이어지게 될지를 상상해보게 하는 점도 이 글의 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끝으로, 저 역시 아주 맹목적이고 균질한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반대하는 편입니다. 어떤 경쟁을 통해 자신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수단 또한 자본주의가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삶의 양식 또한 각각의 사람들의 선택에 두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의 상황은 사회적 불평등과 그것에 기반한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 구조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고 더욱더 계급구조화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모두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어한다는 매우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문제이므로, 이를 무조건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비현실적인 요소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회학적 작업들에 지식인들이 대거 이익에 순응했던 나머지 다수의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힘의 불균형적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죠. 벨러미는 이에 ˝모든 인간은 바로 인간이기에 마땅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회주의적인 주장으로 몰고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지금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111페이지의 한 문장에서 조사가 탈락한 곳이 있었습니다.

무슨 권리로 한 개인이 자기 몫을 주장합니까? 재화를 분배하는 근거는요?
"인간성이죠, 자기 몫을 주장할 권리는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다 고결한 성품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 완벽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노력을 유도할 수 있는 보상을 주어야 합니다

지금 국가는 선생 시대에 민간 자본가와 기업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천의 노동자를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지는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널리 퍼진 산업과 사회 문제나 사회 불평등에 대해 모든 계급이 기본적으로 품은 불만, 그리고 모든 인류의 고통이 대변화의 전조라는 사실은 깨달으셨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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