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
질베르 리스트 지음, 최세진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의 저자, 질베르 리스트는 스위스 제네바에 소재한 저명한 국제대학원인 국제발전학대학원의 명예 교수입니다. 이 국제발전학대학원(혹은 국제 연구 대학원)은 세계 최초의 국제학 단독 전문대학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는 전통적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연구로 스위스 내에 명성을 얻고 있고 몇편의 논저들이 이러한 연구 가운데에서 출발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국내에 2013년 번역 출간된 그의 또 다른 논저,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의 보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또한, 무분별한 성장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세르주 라투슈의 여러 저작들과 그 인식적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원제, ˝L‘economie ordinaire entre songes et mensonges˝로 지난 2010년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는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엄밀하게 이 글의 목적은 경제학이 스스로를 ‘경제과학‘이라고 인정하고 다른 어떤 류의 비판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신성‘에 비견되는 과도한 평가와 오늘날 전반적으로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 환경 오염과 사회적 불평등 및 극심한 빈부 격차에 있어서 현재의 경제학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드러내는 일련의 논증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저자는 현재의 경제학이 단순한 수학 기법과 도표 인용으로 대표되는 환원주의적 설계로 여기에는 현실 자체가 빠져있다는 점은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경제학 자체가 스스로가 규정한 전문학적인 입장으로 인해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다른 학문들과 철저히 괴리되어 있다는 점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크게 우려할 만한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특히, 저자는 일상과 세계 체제 전반에 제일주의로 녹아든 이 경제학이 보다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는 심리학과 인류학 내지는 역사학 차원의 비판적 논증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은 과거 에밀 뒤르켐이 ‘사회과학을 비롯한 학문이 그 자체로 인정받기 받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철저한 논증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이 어떻게 이 경제과학자들에게 거부되고 있는지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대니 로드릭을 비롯해 현재의 전반적인 경제학 기조에 비판적인 글들을 읽으면서 문득 드는 사유는, 과연 이들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빈부 격차의 문제에 대해 과연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현재의 지구 자원이 무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처럼 무분별한 상품 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양적 자본주의가 어떠한 결말에 이르게 될지는 상식선에 예측 가능합니다. 물론 경제학 자체가 ‘현재만을 위해 사는‘ 클라이막스적 예찬의 학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 할 수 있으나,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면 지구 환경의 변화를 우려하는 사람들과 그 운동을 ‘생태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것과 현재의 미국 교육계에 대한 ‘지구 환경의 오염 문제와 그 우려스런 미래‘에 반대하는 로비 자체에 막대한 자금을 뿌리고 있는 형태는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처럼 위와 같은 현실을 참고해본다면 확실히 현재의 주류 경제학이 기득권 경제에 더 규합되고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의 무결성을 주장하는데 여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됩니다. 과거 애덤 스미스가 경제 전반의 현상을 일종의 자연주의적 논리로 귀결해 받아들였다면 이후 멜서스를 비롯한 학자들이 경제적 비관주의로 후대 인류에게 무분별한 생산의 한계를 경고했으나 지금의 후세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별로 큰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만약, 이런 인식적 기반을 전제하고 있다면 저자가 강조하는 ˝자본주의를 좀 더 윤리적으로 만들어 보자˝는 주장은 현재의 문제를 상기시키고 그에 대한 점진적인 해결책을 만드는 데 이바지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 가운데에 한 발 들어서기 위해서는 꽤 심각하고 어려운 결정이 필요하다는 점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4장 교환과 5장 희소성, 6장 효용과 무용, 7장 균형, 8장의 성장 강박은 종래의 경제학이 위와 같은 견고한 이론들을 통해 현실 세계와 자본주의 전반에 이해되고 있는 상황을 경제학 논리 뿐만 아니라 여러 학문적 수단을 통해 비판해 내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자본주의 경제학이 우리의 전반적인 생활과 인식 수단으로서 강고하게 자리 잡게 됨으로써 발생한 ‘합리적 인간‘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원리와 그에 따른 ‘보이지 않는 손‘, ‘합리적 이기심‘ 등이 어떻게 뿌리깊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는지에 대한 확실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효용 가치 이론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과도하게 이해되어 철저한 경제학 논리에 이바지한 점은 문제였다고 보는 관점과 같은 것들입니다. 결국 이 점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과학‘을 희소성이라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세움으로써 사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도입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관점에 맞춰 사회를 형성했던 것이다˝라고 이해될 정도로 현실 세계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패러다임의 철저한 변화가 과연 ‘공익의 기여‘나 ‘다수의 이익‘에 부합했는지에 대해선 역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루소가 강조했듯이, 인간자체가 불확실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본성 가운데서 과연 ‘합리적 이기심‘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예견하는 바와 같이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경제학은 이러한 우려를 인지조차 하지 않았거나 혹은 일부러 무시했을 정도로 그들 학문 자체에 대해 스스로가 무결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바로 이 점이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경제학에 대한 종교적 위상과 같은 범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저자는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학이 초래한 전지구적 상황에서 북반구와 남반구의 차별적인 현실을 짚고 있습니다. 최근까지 남반구 국가들에게서 최신의 자본주의적 이행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북반구 인구들를 위한 농업 생산과 어업물 수출, 1차 광물 생산 등의 종속 상태를 언급하고 이 부분은 현재의 지구 환경 오염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초래한 심각한 결과라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종래의 학자들이 주장했던 부분과 거의 일맥상통하고 소위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하청 관계와 유사한 현재의 북반구-남반구의 경제적 관계가 일정 부분 전지구적 부의 불평등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주목할 만합니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불균형과 차별이 초래될 수 없다는 원만한 가능주의에 경제학이 적극적으로 편입되면서 원칙적으로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게하는 면죄부가 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의 차별과 부의 불평등은 경제의 자연스러운 일면이라는 점을 들어 오늘날의 매우 차별적이고 극심한 사회적 및 경제적 불평등을 더 심각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마치 과거에 복지 제도와 같은 지출 문제에 있어서 매우 손쉬운 ‘신자유주의적 기법‘을 받아들인 정부가 얼마나 신경제 이념에 매몰되어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합니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라고 불리우는 미국과 서유럽의 경제계와 경제학의 이중적인 로비를 보노라면 일반적인 정부가 시장주의와 경제학의 이익에 균형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지에 대해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떠한 대안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저로서도 쉽게 판단내리기 어렵습니다만 저자의 주장대로 경제학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해 소위 전문가 집단이라는 허울아래 시민을 비롯한 어떠한 비판도 용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경제학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어떠한 파급을 끼쳤는지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끝으로, 이 글 4장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모든 활동이 경제 논리에 잠식되기 전에, 또한 단순한 인간적 거래가 경제적 수단으로 견고화 되기 전에, 우리의 전통주의적 사회에서는 개인간에 혹은 집단간에 인간적이고 배려하는 미풍 양속과 같은 주고 받음이 있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같은 많은 사회학자들이 자본주의의 전통주의적 환원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개념일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경제 거래와 경제 논리로 무장한 시장 자본주의가 현재의 시민을 파편화에 이르게 하고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종래에는 소수의 부유층의 이익에 결합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이러한 사회 불균형적 상황에 이를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 오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결론에서 보이는 저자의 함의대로 우리가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경제학을 가질 수 있을지는 무엇보다 이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게 되는 시민들이 얼마나 많이 자각할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을겁니다. 모든 사회학의 본질적인 기법들이 단순히 시민들이 얼마나 현실 세계에 적응하고 순응하고 만족하며 지내게 할 것이냐에 집중한 것은 분명 아닐겁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사회학의 새로운 노력이 필요한 시기이며, 얼마나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느냐에 우리의 몇 십년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다스베이더와 그 암흑 황제를 지지하는 자들을 얼마나 더 개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할 때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자가 몇번이고 글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그의 이 책은 명확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기법을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독자들이 이해하고 있어야 하겠죠

-일종의 전작이라고 볼 수 있는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이 현재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점은 다소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사회가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이 급증하는 상황을 계속 용인한다면 그 사회가 진실로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동차나 휴대폰, 이메일이 보급되기 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이는 ‘진보‘의 혜택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요점은 우리에게 ‘현대성‘의 관행에 순응하도록 강요한다는 사실이다.

실제 현실은 대체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과학적인 지위를 요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생각해낸 그 모든 모형보다 오히려 경제학처럼 과학적인 지위를 요구하지 않는 ‘비경제학적인‘ 사회과학자들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떄로는 예측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사회학과 심리학 (정신분석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인류학이 인간 주체의 합리성에 대해 오랫동안 의문을 제기해 왔다는 사실은 경제학자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이런 상황은 끔찍한 윤리적, 정치적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떻게 끊임없이 불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한쪽만 이득을 보는 상태로 함께 사는 게 익숙해질 수 있는가?

표준 경제학이 과학적이라는 자만은 불가역적인 생태상의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뉴턴 역학을 기초로 한 것이다.

경제학 대체로 과학과 수학에 대한 ‘현대적‘ 신앙으로 설득력을 갖춘 현대적 주술로서 세상의 바깥에 위치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