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적 피해 - 지구화 시대의 사회 불평등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다소 혼란스러웠던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으로 바르샤바 대학에 교편을 잡고 있던 중에, 폴란드 정부의 박해를 받고 영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후, 유동하는 현대와 그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초래한 여러 사회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에 천착했던 그는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사회전반에 도덕적 원칙의 필요성의 의무를 남긴 채, 지난 2017년 1월 영국 리즈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그의 살아 생전에 노엄 촘스키와 만나 서로간의 의견을 교환하는 작은 대담의 자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민해봅니다. 촘스키와 더불어 바우만도 여러 대담집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요. 이 세기의 두 지성이 세계와 사회에 대한 서로간의 의견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굉장하고 의미있는 일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또한, 이 코로나 창궐 시기에 바우만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에게 뭔가 올바른 방향을 제시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바우만의 이 글은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있었던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이기도 합니다. 각설하고, 이 책은 ˝Collateral Damage : Social Inequalities in a Global Age˝라는 원제로 201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년뒤인 2013년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제목대로 이 부수적 피해라는 점은 현재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세계화의 파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이 도덕적 범주의 사회 바깥에 있는 수많은 좌절된 하위 계층이 직면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평등 문제를 꺼내는 자들은 하나같이 그 이유와 변명이 똑같다고 비아냥대기도 합니다만, 여기에서 고찰해 볼 수 있는것은 사회 현상의 문제에서 어떤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면이 나타난다면 마땅히 그것을 개선하는데 힘써야 하지만 사실상 시장이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시장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이후, 우리는 그저 견뎌내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우만은 1장에서 ˝경제적 부유층이든 그 반대 있는 계층이든 공통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는 세태˝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손쉬운 이익‘을 선호하고 이것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본가와 부유층의 배타적인 경제 활동을 통한 전반적인 지위 획득이 그 내면에는 자신의 권리 보장(기본권을 포함한)을 공고히 하고 수많은 선택의 문제에서 자원의 우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바우만은 이 점에 대해서도 ˝현대의 일개 개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삶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일반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우리가 스스로 선택에 대한 수월하고 만족스런 자원을 쟁취하는 건 현재로선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며, 이러한 ‘정치적 자유가 전무한 경제적 자유‘는 모두에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경제학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거나 반대로 이를 은폐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우만은 그 뿐만 아니라 모두가 바랬던 현대의 근본적인 의미란,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 명령이 함축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양도할 수 없는 재능인 이성을 발휘할 때,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제기할 수 있고 자연법으로서 보편적으로 따르고 싶은 종류의 행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취지의 가능성을 8장에서 언급하고, 이러한 인간 진보의 희망이 현대의 출발 시점에서 그리고 상당한 부분에 걸쳐 전개되기를 바랐던 인간사의 모습처럼 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불행일 것입니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은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에게 모두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편이자 의무였지만 ‘현재의 시장은 거의 불의에 가깝습니다.‘ 과거의 포드주의적 자본주의의 이행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총체성과 사회와 공동체라는 개념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에 밀턴 프리드먼은 시장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나, 개인의 합리적인 이기심의 정도와 범위라는 것이 인간의 복지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율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이 거의 40여년간 사회를 지배해 왔지만 그것의 결과는 어떤식으로 나타났는지는 거의 명백해 보입니다. 이와 같이, 바우만은 4장에서 ˝우리의 (공중의) 태도는 사실상 매우 쉽게 조작 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사회의 진실이라든지 이 세계가 돌아가는 작동원리의 진정한 이면을 감추는 데 몰두하는 세력은 마땅히 그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경제학이 이러한 흐름에 사실상 동조한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시장 우위 시대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시장에서 정치가 제거된 이후, 국가의 책임은 그만큼 자유롭다는 점입니다. 바우만은 이에 대해 시장이 시민의 안전망과 같은 이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지만 이 이면에는 분명 국가가 이러한 일들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되었지만, 마냥 결정 자체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이를 다시 회복해야만 우리가 국가의 의무를 요구할 수 있으며, 바우만의 인식대로라면 ˝인간이 불활실성과 취약성˝을 갖고 있는 본성의 존재라면 이를 등한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천적인 문제들의 틈바구니에서 - 이를테면 유럽의 이슬람 이주민 문제,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부수적 피해로 국한지어질 하위 계급들, 아무리 안전을 부르짖어도 마땅히 충족되지 않는 사람들- 오로지 국가만이 이를 (그러니까 안전과 평안) 보장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바우만이 ‘유동하는 현대‘를 개념화했던 것은 19세기를 넘어 정착되었던 국민국가 개념의 강제적 탈출과 자본주의의 꽤 강압적인 이행이 국가의 기능과 의무를 점차 제거했고, 이에 권력이 정치를 배제하면서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도 역시 현재의 ‘정치없는 권력‘에 대한 비판을 바우만은 강도높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바우만의 유작인 ‘레트로토피아‘에서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을 우리와 같은 남은자들에게 그는 의무의 유산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기가 꽃을 피웠지만 이내 애덤 스미스를 오역한 이들이 도덕적 전통까지 퇴출시켜왔던 그 결과가 현재의 모습입니다. 자본주의에 의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제약되어 왔다는 것을 새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평등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지금의 고삐풀린 시장 자유의 이행이 과연 금융 위기 하나만으로 끝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테러의 방지라는 일념 하나로 미국에서 이행된 시민의 무차별적인 기본권 침해와 정당한 시민권을 보유한 시민들조차 정보당국에 의해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은 개인이 보유한 자원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주변부로 갈수록 권력은 멀어지는 것과 같은 폭력적인 배제의 정치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수적 피해 취급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 사회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그것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도 갖지 않게 하는 것을 포함한 이 반사회적인 움직임이 결코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는 아마도 그 합리적이라는 이성이 실종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바우만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경제의 양적 확대만으로는 이러한 현상을 시민이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 책을 내놓은 것 같습니다. 앞선 괴이한 흐름의 여러 원인들을 고찰해보면서 바우만은 8장에서 카를 슈미트를 지목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 예외 상태를 향한 고결한 결단주의는 아마도 현재의 일부 권력층에게 양심의 회피를 위한 근거가 되지 않았나 추정해 봅니다. 이와 관련해선 따로 글을 빼서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거의 7시간에 걸쳐 이 책을 정독했는데, 레트로토피아도 그랬지만 역자의 번역은 뭐랄까 쉬이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장 자크 루소가 인간의 불확실성을 강조했던 봐와 같이 이 글 전반의 해석 수단은 바로 ˝인간의 불확실성과 취약성˝이기도 합니다.

-바우만은 종전의 ‘복지 국가‘라는 개념 보다는 ‘사회 국가‘라는 개념을 새로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의 이러한 처방은 오늘날 과거로 후퇴하고 있다. ‘복지 국가‘ 제도는 점진적으로 붕괴되거나 폐지되고 있고, 기업 활동과 자유로운 시장 경쟁과 그것의 비참한 결과에 부과되어썬 제약은 하나씩 제거되고 있다.

인간의 취약성과 불확실성은 모든 정치 권력의 기호다

현재는 전례없는 탐욕과 광신적인 자본주의의 시기이다

존경받는 도덕철학자인 레비나스는 "사회는 도덕적 충동이라는 무기이자 부담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에 대한 무조건적인 책임을 떨쳐버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비 시장은 양심의 가책을 완화하거나 심지어 눌러 버릴 수 있으며 그렇게 하고자 한다

윤리적 책임은 인간 유대를 구축하는데 주요한 재료이자 수단이다

자본주의는 인간 욕망의 잠재적 무한성에 판돈을 걸었으며, 그 무한한 성장을 만족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시장 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국가는 자유시장의 논리 (보다 정확히는 논리의 결여)에서 파생되는 취약성과 불확실성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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