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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파이어
카밀라 샴지 지음, 양미래 옮김 / 북레시피 / 2020년 1월
평점 :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태어나 현재 스스로 무슬림 정체성을 갖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여성 작가 카밀라 샴지는 안티고네의 현대적 버젼인 ‘홈 파이어‘로 근래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그녀는 뉴욕의 사립 리버럴 대학인 해밀턴 대학과 저명한 공립 대학인 메사추세츠 대학에서의 예술인들을 위한 MFA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이후, 여러 단편 소설과 1998년 처음 출판한 장편으로 영국을 비롯한 미국과 서유럽 문단에 큰 기대를 받은 바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지금까지 매우 생소한 작가이기도 했는데요. 최근에 서평을 쓴 슬라보예 지젝의 논저에서 그녀가 받은 불합리한 처사가 글에서 소개되어 한번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손에 책을 잡은지는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처절한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이제야 키보드를 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 글은 지난 2017년, ˝Home Fire˝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대략 3년 뒤인 2020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샴지의 이 장편을 최근에 출간된 리얼리즘적 소설들 가운데 우리가 처한 현실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특히, 다소 설명하기 어정쩡한 지하디스트 아버지를 둔 세 남매의 각기 다른 행보가 유럽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이슬람 가정들의 ‘현지의 벽‘과 유럽 백인들에 의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감없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은 이 책과 관련된 여러 신문사들의 서평을 통해 책을 읽지 않은 기자들의 그저 단순한 ‘페미니즘적 소설‘ 운운에 속으실수도 있는데요. 샴지의 이 글은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먼 유럽과 이슬람, 현지인들과 이주민 그리고 과연 이 시대의 국민국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이 글을 고찰해 봤을 때, 크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주요한 시점과 행적들을 소제목으로 구분해 서로 교차시키는 기법으로 작가는 글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각기 인물들의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오로지 이 책을 완독해야만 그 결과를 얻을 수 있기도 합니다. 사실 처음에 맏딸인 이스마의 도입 부분만을 봤을 때는 단순하게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 오해할 법했으나, 이 이스마라는 인물은 아직 현지 세계에 미처 수용되지 못한 평범한 이슬람인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녀 자신의 만학에 대한 욕망이라든지 학문을 대하는 태도 등은 이스마라는 한 이슬람 여성의 아주 전형적인 인물상을 구현해 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책 몇장을 채 보지 못한 기자들은 이것만으로 페미니즘 소설 운운을 한 것이었죠.
또한, 과거 자크 랑시에르가 언급했던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되고 소외되어 있는 이슬람 청년들의 문제를 작가가 잘 받아서 파베이즈라는 인물로 잘 풀어내고 있는데요. 아주 계획적으로 움직이며 유럽 내의 19세에서 23세에 이르는 이슬람 청년들을 포섭해왔던 최근의 IS의 수법이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미처 아버지의 제대로 된 정을 받지 못한 ‘결핍된 한 청년‘의 비참한 결말까지 낱낱이 밝혀내고 이러한 불행한 한 개인의 문제를 지금의 서구 언론들이 가증스러운 프로파간다로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 글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2001년 이후 진행된 ˝법원 영장 없이 진행된 이슬람인들에 대한 구속과 고문˝과 세련된 국민국가 시대에 엄연히 시민권이 부여된 이슬람인들에 대한 소위 구별짓기가 과연 무엇을 위한 수단인지 깊이 고심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 유입된 알제리 출신의 이슬람인들이 당시 사양길에 들어서고 있는 프랑스 산업 전반에 투입되어 그 목숨줄을 이어가게 했다면 최소한 이 사람들이 프랑스 사회에 기여한 점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뿐만은 아니죠. 전반적으로 이들이 현지 사회에 적응하지 않으려고 했다기 보다는 종교적인 문제에서 양 세속 사회가 첨예하게 서로간의 이해없이 대립되어 왔고 나중에는 이슬람을 백안시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국민국가의 어두운 면을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그문트 바우만을 비롯한 프레카리아트 문제로 소급된 것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이슬람 사회가 단절되어 있으며, 이것은 뭔가 미국에서 하류층의 냄새나는 흑인 거주지로 이해되는 것과 유사한 시각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비참한 결말의 파베이즈와 쌍둥이 남매로 나오는 아니카 또한 영국의 명문인 런던정경대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현실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일면 그렇게 묘사되지만 그녀 역시 보통 여성이 직면할 수밖에 없는 ‘성과 섹스에서의 수단화라고 불리우는 저급한 편견‘에 집중되고 영국 정계의 유력한 정치인의 아들에게 접근한 일련의 과정이 일견 글의 복선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만 아마도 작가는 고학력의 이슬람 여성은 영국사회에서 그다지 개인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전혀 미미한 존재라는 점을 밝히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철저하게 파베이즈와 의식적으로 표면적으로 단절하게 되는 이스마 역시 기본적인 개인의 자아실현과 이를 지켜보는 영국 사회의 진정한 태도와 시선이 무엇이느냐에 따라 가족까지 저버릴 수 있는 인물상을 글에서 구축해 냈습니다. 결국, 파베이즈가 깨달은 ˝아버지가 파베이즈 자신보다 더 보살핌을 받아야 마땅했던 가족 전체를 버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는 문장은 아무리 대의와 개인의 정의로움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가족의 문제는 현실이며, 더욱이 IS와 같은 현실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목적 의식과 관념적 추구는 그 자체로 허망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신조차 끝내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결말에서 저는 뭔가 먹먹함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파베이즈라는 인물이 이슬람이라는 뭔가 고아하고 품격있는 가치에 몸을 맡겼다기 보다는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에 이용당한 인물이어서 그 자체로도 매우 안타까운 배경속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현실을 도외시하는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자들이 과연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우리가 신봉하는 종교 자체가 한 가정을 파괴에 이르게 했다는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입가에 감도는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죽은 사람들을 통해 증오의 역사를 되물림시키는 자들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하겠죠.
-본문 62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의문이기도 한데, 몇몇 문장에서 서술어미가 삭제된 채, 명사형으로 완료된 문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냥 눈에 거슬린다기보다는 왜 이런식으로 번역이 되었는지 약간 의문이 드는군요. 구어체를 따로 다른 글자체로 표기된 문장에서는 초성체까지 나오는데 역자의 노력이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포로들의 고문 장면이 간혹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파베이즈가 자신의 아버지가 어떠한 지옥속에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장면에서 작가가 꽤 많은 준비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이런 전근대적인 ‘선진심문기술‘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은 과연 이후 역사가 이를 어떻게 평가할 지, 수많은 미국인들은 이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 습관이 되면 다른 것들도 망가진다는 사실이란다
폭력을 가하는 이들이 존중하는 유일한 대상은 더 극심한 폭력일 뿐이란다
복지국가란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쌓아 올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민자들을 쫓아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환영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였지. 그런 나라에 사는 게 어떨지 상상해봐.
세상 사람들이 휴지 조각 취급하는 여권을 갖고 살아가는, 혹시라도 비자 발급 신청이 거부될까 봐 아무런 빌미도 잡히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삶은 보이지도 않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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